최윤환
(Photo : 기독일보) 최윤환 목사.

시끄러운 소리가 차츰 줄어들면서
울퉁불퉁한 고동색 石 성벽 문 위에
깊게 새겨진 쌍사자상 아래의
천정 둥그런 문 앞에 느닷없이 멈춰 선 다

북쪽으로 향하는 행인들은
다마스커스 로 목적 둔 客人도 있을 터
城 예루살렘 모퉁이 대 통행로 돌 아,
상거래 꾼도 있을 터
분주한 통행로 성문은 우뚝 높이 서있어서

북으로 줄 다름 행하면
예수꾼들 잡으려,
사울이 살벌하게 칼 휘두르며 騎馬兵 선두에 서서 헬몬 산을 넘다가
하얀 눈밭에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서 神의 소리로, 가슴 철렁 내리치더니
한 생애가 완전히 뒤바뀌어, 새 역사의 시작을 열었네.

문 밖, 동쪽 산등성이로 넘으면
소란한 사방 통 통로를 건너서
험난한 언덕 예수 무덤 앞에 멈춰 서자
세계 東. 西로 펼쳐지는 생명의 새 역사가 참회(懺悔)로 터져나가네_

다른 명칭의 獅子 門은 '스테반의 문' 이라 불리 우는데
사나이 젊음에 그리스도 와 대면한 사건이
핏줄 안에 묻어 흘러서
십자가 한 움큼의 눈물 앞에 젖어서는
거리를 울리는 외침으로 되다가
돌무더기 무서운 상처 속에서, 역사를 되돌리는
하늘 둘 루는 천사의 얼굴 되었네.

나는 지금, 무엇이 되어야 하나,
뒤틀리는 몸 가누고서
온 몸을 휘둘러 돌아 나오는 소리가 되어
땅위에 엎드려 져, 써지는 글씨 한 줄이 되어

한 여름의 물기 잠겨 내는 물들임이 되다가
바람을 맞아내는, 가을날들 아래서
잔득 물감 들여 그려지는
새 햇볕 아래의 새 색깔그림 되려는가.

몇 자의 새 글씨로 낙엽들 위에 그림으로 씌어 져서
돌무더기 아래 아래로 잠겨 버리는 한 生命이 되어
사자 문에, 살아 소리 지르는 벽돌
날라 드는 돌 모래알 하나하나쯤의 만남은, 되어야 하겠네.

미국생활, 오래 보내 온 중에 인상 깊었던 몇 분을 손꼽아 보라면, 내게는 두 분쯤 올려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분은 Mr. Shapington 이라고, 70년대 초반의 내가 참가했던 교회연극 교실 교수십니다. 몸집이 무거운, 짧은 머리에 턱수염 가지런히 기른 분으로서, 두어 번째 교실 시간에 나를 향해 <스테반>의 모습을 단독 무언극으로 해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그때 내 몸짓이 어떠했는지는 교실 학생들의 밝은 격려 박수를 받았던 기억만 남겨지는, 그 교수 한 분이시고, 또 한 분은 90년도 후반, 내가 목회하던 중, 섬기는 교회에 3번을 찾아 와서, 피아노 앞에 당당히 서서, '주 기도문'곡 과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역시 둔중한 몸의 검은 양복에 하얀 깃 와이셔츠 빛나게, 부르던 검은 턱수염 수북한 Mr. Terry 부부, 이 분은 NY.브로드웨이와 이태리 무대에서도 활약했던 명사였는데, 예쁘게 태어난, 자신의 어린 아기를 잃고서는 기독교 가창무대로 몸을 던져, 눈물로 반짝이는 눈가의 간증과 함께, 아리따운 부인은 또 공연 때마다 무소로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곡을 러시아 풍으로 힘차게 피아노 울리던 부부십니다. 이 두 분은 나의 맘 새김 속에 깊이 묻혀있는, 내가 아는 분 중의 두 분입니다. 아니 아리따운 부인까지 세 분이십니다.

아니, 오늘 이야기의 초점을 잡자면, 역시 젊은 스데반의 맘에 부딪혀 온 신앙적 切實 感이 그로 하여금 순교의 場까지 맞서게 된 사건과, 이로 인한 사울(바로 후에는 사도바울로 변신함)의 마음에 부딪쳐 진 신앙충격이겠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門>자리에서 벌어진 사건 現場에서, 나는 나 나름대로의 시간 分. 秒가 멈추어지는 듯한, 아니 갑자기 내 핏줄에 피 흐름이 멈추어지는 듯 한 감격적 순간을 맞았다는 신앙적 맘 격랑이었습니다. 나도 스데반 만큼의 신앙 의지를 펴 낼 수 있을 것 아니겠느냐는 순간의 신앙적 자신감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전란에 殉敎로 生을 맞고 마셨던, 나의 前 핏줄 父親 崔相鉉 목사의 담대하셨던 그 피를 받은 내가 아니겠느냐는 순간의 그 때, 내 각오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門>만 제대로 통과하는 것이라면, 사도바울의 改心頂點도 만날 수 있겠고, 이 門만 제대로 통과해 내면, 예수의 십자가와 그 무덤, 그리고 빛나는 부활의 새 生命도 戰慄처럼 내 몸에 電擊的으로 대면해 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강한 이 장소에서의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信仰은 무서운 결단과 몸에 흔들려 오는 戰慄이라고 생각 듭니다. 죽음이든, 갑자기 맞는 빛나는 <부활의 감격>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