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권
(Photo : 기독일보) 안인권 목사.

기독교인들의 교회 생활 가운데서 교회 절기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해마다 꼭 지키는 행사가 있다. 그것은 가정의 달에 지키는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이다. 목사님의 어버이 주일 설교를 듣는 동안 성도들의 마음에는 무심했던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감회가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다가 설교가 끝날 때 쯤이 되면 가슴 속의 뜨거움이 눈 주위로 모여 들어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눈물과 울음은 목젖까지 올라와 있게 된다. 마침내 설교가 끝나고 찬송가 대신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어머님 은혜 노래라도 부르게 되면 거의 모든 교인들은 첫 소절도 다 부르지 못해서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심장이 좀 든든한 남자 어른들일지라도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사랑은 가이 없어라' 라는 대목에 까지 와서는 더 견디지 못하고 목젖이 떨리고 만다. 모든 성도들의 눈이 붉게 물들고 빰에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그렇게 해서 교회당 안은 온통 눈물 바다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가정의 달 행사다.

말 할 것도 없이 그 가정의 달 주일에 목사님이 특별히 설교를 잘 하셔서 성도들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터트리게 된 것은 아니다. 그날 성도들을 울린 눈물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모든 자녀들의 '어머니' 그분 자신이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렸어야 하는 자녀들이 아니라 그들을 평생 키우신 어머니들이 눈물과 울음을 참지 못하시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전폭적인 사랑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을 수 없듯이 어머니의 사랑도 비 처럼 전폭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한하다. 다른 사람의 어머니는 몰라도 적어도 '나의 어머니'의 사랑만은 나에게 있어서 무한한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또한 전 인격적이고 전 생명적인 사랑이다. 어머니와 나는 차라리 한 몸 일체다. 나 라는 존재는 다름 아닌 그 어머니의 몸 속에서, 그 살 속에서 지어진 분신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폭적이고, 무한하고, 전 인격적인 사항을 받아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어머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해 줌으로써 그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게 해 줄 수가 있을까? 없다.

아무리 설교를 잘 하시는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을 어머니의 사랑 속에 푹 젖어서 자란 사람처럼 감동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말로 대신 할 수 없고 노래로도 대신 할 수 없으며 그림으로도 다 그려 낼 수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또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낳으신 바로 그 어머님의 품 속에서 자라는 것 뿐이다. 그 외에 어떠한 것으로도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 노래의 가사처럼 하늘 아래는 어머님의 은혜 보다 높은 것도 없고 어머님의 사랑 보다 깊은 바다도 없다.

기독교란 무엇이냐 할 때 가장 설명 하기 어려운 대답이 바로 기독교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종교라는 대답이다. 세상 어머니들의 사랑이 아무리 완전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어머님들도 인간인 이상 객관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의 어머님'일 경우에는 그 사랑은 무한한 것이 되고 그러므로 말로도 대신 할 수 없고 노래로도 대신 할 수 없으며 그림으로도 다 표현 할 수 없게 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는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기독교란 무엇이냐에 관해 설명할 때 기독교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근본이 되는 종교라는 설명을 하기가 제일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기독교가 사랑과 은혜의 종교라는 것 쯤이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다 잘 알고 있는 일인데 그것이 제일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라니?" 라고 의문을 가지실 분이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만약 누구든지 안 믿는 사람에게 단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은 금방 천국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단 30분의 설명을 통해서 어머니의 사랑을 어렸을 때부터 넘치도록 받고 자란 사람과 똑 같은 경험을 하게 해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지식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경험 자체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종교라는 지식은 가질 수 있지만 바로 그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그 사랑과 은혜의 경험은 가질 수 없다. 교회를 아무리 뱃속에서부터 다녔고 아무리 유명한 목사나 장로라 할지라도, 또 유명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일이 없고 그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일년 열 두 달 52주일 똑 같은 하나님의 똑 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또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요일에도 하고 또 금요일에도 모여서 기도회도 열고 성경 공부도 하고 또 하는데도 왜 신자들의 신앙이 잘 자라지 않고 기독교가 무엇인지 여전히 몰라서 10년 20년 교회에 다녀도 기독교인다워 지기는커녕 구원에 대한 확신마저도 없게 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어머님의 사랑처럼 본인이 하나님의 품 속에서 태어나야지만 되고 그 품 속에서 자라는 것 외에는 그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할 길도, 체험하게 할 길도 없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체험하고 태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경험하여 태어나고 자란 그것으로 너무나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고향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 생각하는 그것만으로도 그립고 눈에 금방 눈물이 핑 돌게 되는 까닭은 그 어머니와의 전 인격적이고 전 생명적인 사랑의 관계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복 빌어 받는 일 같은 것에는 아무 비교도 할 수가 없는 전 인격적이고 전 생명적인 관계의 사랑이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나의 존재와 생명을 지으시고 나의 영혼을 창조하신 창조적 인격 관계의 우주적 생명 존재로써의 관계의 사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