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근무하다 이 곳 뉴욕에 파견되어 온 기자로써, 뉴욕 기독교계 취재 경험도 별로 없으면서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한다는 것이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얼마 안되는 그 취재 경험 안에서도 느낀 바가 있어 몇 자 적으려고 한다.
첫째, 기자는 사진사가 아니다.
둘째, 신문은 행사 소식지나 광고지가 아니다.
셋째, 언론이 사전 기사 검열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
넷째, 기독교계는 기독교계 신문을 살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
취재를 끝내고 나면 사진을 부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기자는 교인들의 알 권리와 알아야 될 책임을 위해 취재를 하러 그 곳에 가는 것이지 그 곳의 행사자료를 남겨주려고 가는 것이 아님에도 기자를 마치 사진사처럼 생각해 사진을 부탁하고 심한 경우에는 한 신문사의 기자가 찍은 사진을 아무런 카피라잇없이 다른 신문사에 보도자료로 넘기기까지 하는 매우 비상식적인 행동이 눈에 띈다. 이런 행동은 알게 모르게 언론의 취재활동과 그 가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참으로 유감스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아직 온전한 궤도에 접어들지 못한 한인사회의 언론, 특히 기독교계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빌미삼아 언론을 행사 소식지 및 교회,기관 홍보지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취재요청을 하려하는데 광고낼 것이 있느니, 없느니.. 를 얘기한다든가, 권위적인 태도로 '행사 있으면 부를께'라고 말한다거나 선심이나 쓰는 듯 '취재꺼리'를 던져주는 등의 행동은 여론의 힘을 상징하는 언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곳 미주한인사회의 미성숙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물론 이는 우리 언론인들의 언론인의식과 자질부족 문제에 기인한 것일 터임으로 우리들의 자성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어떤 곳을 취재할 때, 그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등의 부탁 역시 참 거리끼는 부탁이다. 자신들의 취지가 잘못 해석되어지거나 잘못된 정보가 기록되는 등의 오보에 대한 불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십분이해하나 그 이면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사전 방지하고자 하는 검열 마인드가 없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기사는 기자의 것이고 편집은 편집장의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계는 기독교계 신문을 살리는 데 앞장을 서야 한다. 아무리 종교계 소식이 다뤄진다 하여도 일반 신문은 세상의 논리로 만들어지는 세상 신문일 수 밖에 없다. 크리스천의 촛점과 세상의 촛점은 분명 다르다. 중요한 것도 다르다. 신문을 단순히 행사 소식지로 생각한다면 세상 신문과 크리스천 신문이 다를 것이 없겠지만, 언론을 진정 언론으로 대우한다면, 사건의 중요도를 판별하고 시대의 문제에 가장 적절한 오피니언을 만들어내며 사회를 정화하는 언론으로써의 역할을 인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된 크리스천의 사명실천의 한 일환으로써의 크리스천 언론을 생각한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독교계 신문을 좀 더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크리스천 기자들은 기자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을 받은 크리스천의 한 사람이다. 실질적인 영혼 구원에 매진해야 될 우리들인데, 기독교계의 건강과 화합, 일치를 위한 언론사역이라는 기치를 걸고 언론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역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감히 기독교계 언론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를 인정한다면 교계는 교계 언론을 자신의 귀한 선교 동반자로 맞아들여 아끼고 사랑해주며 그 독자성과 가치를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첫째, 기자는 사진사가 아니다.
둘째, 신문은 행사 소식지나 광고지가 아니다.
셋째, 언론이 사전 기사 검열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
넷째, 기독교계는 기독교계 신문을 살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
취재를 끝내고 나면 사진을 부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기자는 교인들의 알 권리와 알아야 될 책임을 위해 취재를 하러 그 곳에 가는 것이지 그 곳의 행사자료를 남겨주려고 가는 것이 아님에도 기자를 마치 사진사처럼 생각해 사진을 부탁하고 심한 경우에는 한 신문사의 기자가 찍은 사진을 아무런 카피라잇없이 다른 신문사에 보도자료로 넘기기까지 하는 매우 비상식적인 행동이 눈에 띈다. 이런 행동은 알게 모르게 언론의 취재활동과 그 가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참으로 유감스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아직 온전한 궤도에 접어들지 못한 한인사회의 언론, 특히 기독교계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빌미삼아 언론을 행사 소식지 및 교회,기관 홍보지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취재요청을 하려하는데 광고낼 것이 있느니, 없느니.. 를 얘기한다든가, 권위적인 태도로 '행사 있으면 부를께'라고 말한다거나 선심이나 쓰는 듯 '취재꺼리'를 던져주는 등의 행동은 여론의 힘을 상징하는 언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곳 미주한인사회의 미성숙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물론 이는 우리 언론인들의 언론인의식과 자질부족 문제에 기인한 것일 터임으로 우리들의 자성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어떤 곳을 취재할 때, 그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등의 부탁 역시 참 거리끼는 부탁이다. 자신들의 취지가 잘못 해석되어지거나 잘못된 정보가 기록되는 등의 오보에 대한 불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십분이해하나 그 이면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사전 방지하고자 하는 검열 마인드가 없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기사는 기자의 것이고 편집은 편집장의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계는 기독교계 신문을 살리는 데 앞장을 서야 한다. 아무리 종교계 소식이 다뤄진다 하여도 일반 신문은 세상의 논리로 만들어지는 세상 신문일 수 밖에 없다. 크리스천의 촛점과 세상의 촛점은 분명 다르다. 중요한 것도 다르다. 신문을 단순히 행사 소식지로 생각한다면 세상 신문과 크리스천 신문이 다를 것이 없겠지만, 언론을 진정 언론으로 대우한다면, 사건의 중요도를 판별하고 시대의 문제에 가장 적절한 오피니언을 만들어내며 사회를 정화하는 언론으로써의 역할을 인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된 크리스천의 사명실천의 한 일환으로써의 크리스천 언론을 생각한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독교계 신문을 좀 더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크리스천 기자들은 기자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을 받은 크리스천의 한 사람이다. 실질적인 영혼 구원에 매진해야 될 우리들인데, 기독교계의 건강과 화합, 일치를 위한 언론사역이라는 기치를 걸고 언론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역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감히 기독교계 언론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를 인정한다면 교계는 교계 언론을 자신의 귀한 선교 동반자로 맞아들여 아끼고 사랑해주며 그 독자성과 가치를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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