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인비는 새로운 문명의 물결이 몰려올 때 우리는 문명의 바깥 요소부터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 문화나 기독교의 외곽적인 형태를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배, 찬송, 기도, 헌금, 봉사 등. . . 겉으로 보여지는 교회생활의 형태나 기독교적 언행의 외적 요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익숙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이해하고 신앙의 뿌리를 내려서 나의 인격이 변화되어 가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신앙을 머리로 이해하는 의식화 작업이 신앙행위의 모방까지는 비교적 쉽게 우리를 이끌어 갈지는 몰라도 신앙의 생활화를 통한 나 자신의 인격의 변화는 오랜 세월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내적 변화는 없이 외적인 행위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5)

본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십자가에 구원의 능력이, 부활에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성령의 역사에 중생과 성화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랑에 참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능력이 체험을 통한 변화를 초래하듯이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경건의 능력”도 신앙의 생활화를 통한 인격변화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변화도 없는 신앙생활은 세월이 지날수록 의욕과 의미를 상실하고 말게 된다.

신앙인격의 형성과 성장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부딪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 욕구와 부딪치고, 현실요구와 부딪치고, 불의와 부딪치고, 사회악과 부딪치고, 다수와 부딪치고, 고독과 부딪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부딪침에는 깨어짐의 아픔과 눈물이 따른다. 그러나 깨어짐의 아픔은 새로운 창조의 전주곡이며 땀과 눈물은 성장의 비료가 된다. 부딪침이 두려워서 쉽게 주변과 타협하고 강자와 다수의 편에 서기를 즐겨하며, 경건의 외형적 모양만을 가지고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속여 가며 삶의 안일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점점 신앙의 능력과 의미,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는 과정은 끊임없는 나 자신과 세상과의 부딪침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부딪침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인내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그 능력으로 인해 변화되며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뉴저지 필그림교회 양춘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