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도왔던 것은 로마법이었다.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교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울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유대주의의 독선에 제동을 건 것이 로마법이다. 로마법에 의하면 바울을 징계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말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루터의 보호막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독일민족주의였다. 천주교는 루터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으로 규정했고, 이제 이단으로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주교는 루터를 교황청으로 소환해서 교황청에서 재판을 하고자 하였다. 만일 루터가 교황청에 소환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 제동을 건 것이 독일민족주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헌법에 의하면 모든 독일인은 독일 밖에서 심문을 받을 수 없으며, 모든 독일인은 본인의 증언을 들어 보지 않고 공민권을 박탈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 헌법에 의하면 루터는 교황청에서가 아니라 독일에서,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변명의 기회를 갖고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를 도운 것은 이런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독일 대중들은 루터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켜 세우고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루터야 말로 탐욕스럽고 부패한 교황청의 횡포에서 독일을 구원할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독일인의 10분의 9은 루터를 지지하고, 나머지 10분의 1은 "교황을 죽여라"고 소리쳤다.
결국 루터는 교황청에 소환되지 않고, 대신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열리고 있던 보름스(Worms)에 소환되었다. 이 의회의 사회자는 황제였고, 트리에르의 대주교 에크가 교황청을 대표하여 루터를 심문했다. 그는 루터가 쓴 첵을 가리키면서 "이 책들이 다 당신이 쓴 책입니까?"라고 물었다. 루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에크가 다시 물었다. "이 책의 주장이 다 옳다고 주장합니까? 아니면 일부는 취소할 수도 있습니까?" 이것은 교황청의 유혹이었다. 루터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하루의 여유를 주었다. 다음 날 루터는 자신의 책은 세 종류로 나눌수 있다고 보았다. 첫 번째 종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관한 것으로 천주교학자들도 옳다고 인정하는 바이며, 두 번째 종류는 교황청의 잘못된 교리와 제도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많은 독일 제후들도 인정하는 것이며, 세 번째 종류는 "몇몇 개인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있는데 지나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에 대해서 에크 대주교는 노발대발했다. 도대체 그의 주장을 들으면 천년의 역사를 가진 교황청의 주장은 다 틀리고, 이제 애숭이 수도사인 루터의 말만 옳다는 것이냐고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책들과 거기에 담긴 잘못을 포기하겠소, 포기하지 않겠소?"
루터가 여기에 대해서 대답하였다.
"황제 폐하, 귀족제후 각하들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요구하고 계시군요. 여기 숨김없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들과 교회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양자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 오고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서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옳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에 분명히 서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루터는 더 이상 교황청과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루터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입각해서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와 제도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 뿐이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부설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말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루터의 보호막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독일민족주의였다. 천주교는 루터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으로 규정했고, 이제 이단으로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주교는 루터를 교황청으로 소환해서 교황청에서 재판을 하고자 하였다. 만일 루터가 교황청에 소환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 제동을 건 것이 독일민족주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헌법에 의하면 모든 독일인은 독일 밖에서 심문을 받을 수 없으며, 모든 독일인은 본인의 증언을 들어 보지 않고 공민권을 박탈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 헌법에 의하면 루터는 교황청에서가 아니라 독일에서,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변명의 기회를 갖고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를 도운 것은 이런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독일 대중들은 루터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켜 세우고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루터야 말로 탐욕스럽고 부패한 교황청의 횡포에서 독일을 구원할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독일인의 10분의 9은 루터를 지지하고, 나머지 10분의 1은 "교황을 죽여라"고 소리쳤다.
결국 루터는 교황청에 소환되지 않고, 대신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열리고 있던 보름스(Worms)에 소환되었다. 이 의회의 사회자는 황제였고, 트리에르의 대주교 에크가 교황청을 대표하여 루터를 심문했다. 그는 루터가 쓴 첵을 가리키면서 "이 책들이 다 당신이 쓴 책입니까?"라고 물었다. 루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에크가 다시 물었다. "이 책의 주장이 다 옳다고 주장합니까? 아니면 일부는 취소할 수도 있습니까?" 이것은 교황청의 유혹이었다. 루터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하루의 여유를 주었다. 다음 날 루터는 자신의 책은 세 종류로 나눌수 있다고 보았다. 첫 번째 종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관한 것으로 천주교학자들도 옳다고 인정하는 바이며, 두 번째 종류는 교황청의 잘못된 교리와 제도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많은 독일 제후들도 인정하는 것이며, 세 번째 종류는 "몇몇 개인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있는데 지나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에 대해서 에크 대주교는 노발대발했다. 도대체 그의 주장을 들으면 천년의 역사를 가진 교황청의 주장은 다 틀리고, 이제 애숭이 수도사인 루터의 말만 옳다는 것이냐고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책들과 거기에 담긴 잘못을 포기하겠소, 포기하지 않겠소?"
루터가 여기에 대해서 대답하였다.
"황제 폐하, 귀족제후 각하들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요구하고 계시군요. 여기 숨김없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들과 교회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양자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 오고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서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옳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에 분명히 서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루터는 더 이상 교황청과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루터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입각해서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와 제도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 뿐이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부설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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