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사역을 하다보면 자기 의를 보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삶들은 어떨 때는 일을 열심히 하나 금방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자기의 연약함을 보며 쉽게 좌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자들에게 우리의 주님 앞에서 하는 일은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쉬지 않고 열심히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실감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의심하는 신앙생활 속에서 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이 믿어질 때에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은혜로만이 내가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의 대한 경험을 몇 년 전에 철저히 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당뇨병이 있어서 매일 약을 먹는데 그 날은 약을 먹어 놓고서 먹은 것을 잊어버리고 또 다른 한 알을 먹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날 밤에 제자훈련을 시키는 도중에 당이 떨어지는 증세를 보여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었다. 그런데도 조금 있다가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코카콜라 한병을 마셨다. 그러나 여전히 당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정상인의 당 치수는 120이 기준인데 단 것을 마셔도 90…80…70…으로 치수가 마구 떨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정도가 심해지자 따꾹질 현상까지 일으키면서 손과 몸을 떨며 매우 어지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와중에 나에게 두려움이 몰려왔는데 오늘 내가 잘못하면 주님 앞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주님 앞에 서게 될 줄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그동안 최선을 다해 산다고 살았지만 가증스럽고 거룩으로 위장된 나의 모습은 주님 앞에 도저히 떳떳이 설 수는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다. 그래서 당이 떨어져 아픈 상황에다 두려움까지 겹쳐서 숨이 차오기까지 하였다. 그 때는 시간이 매우 촉박한지라 주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만한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자훈련시에 외우는 성경구절 하나가 생각이 났다. 에베소서 2장 8,9절의 말씀이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나는 이 말씀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말씀이 너무나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나의 마음에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나는 곧 마음에 평강을 찾으며 “그래 은혜로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내 의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야… "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그러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지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리고 마음에 큰 평강을 갖게 되었다. 상황은 똑 같았으나 나의 입에서는 벌써 찬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날 내 자신의 초라함에 너무나 놀라게 되었다. 17살에 은혜 받고 한 번도 다른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한 목표만을 바라보며 걸어 온 나였고, 목사의 직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산 나였지만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그 사실 앞에서는 너무나 나 자신이 초라하게 되고 두렵게만 느껴진 것이다. 나는 그때 왜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그렇게도 가슴 절이게도 감사한 말씀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 우편에 달린 강도의 이야기에서 더욱 발견하게 되었다. 맥스 루카도는 그의 책에서 예수님 우편에 달린 강도가 주님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합당하지 않게 보인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강도는 살아생전 한 번도 좋은 일이라고는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을 해치며 가정을 파괴시킨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뻔뻔스럽게도 주님께 영생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놀라게 되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런 자의 요청을 한마디 다른 말씀도 없이 받아 들이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 악한 자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 요청을 들어 주셨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강도는 이 전까지는 그런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 유용하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물론 성경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서 전의 삶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한 사람들이 많다. 수가성의 여인이라든지 삭개오 같은 사람은 전도하며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자와 나누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 우편에 달린 강도는 지금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 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를 왜 구원시켜 주셨을까? 맥스 루카도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도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하였고 앞으로도 무궁한 사랑과 긍휼을 우리에게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구원이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이쁘게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잘 하려고 노력할 것이 없다. 구원은 은혜로만 우리의 손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입은 자가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의 이치라는 것이다. 너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눈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성도에게서는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강도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배울만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강도는 평생 한 일이 죄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구했을 때에 그의 기도는 응답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구함의 근거도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얼마나 잘못 알아 기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어떤 신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강도의 이야기가 그것이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그것이다.

바리새인은 평소에 세리보다는 윤리적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차이 또한 엄청나게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고 오히려 강도 면허증을 가졌다는 평을 들었던 세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기도를 했고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 두가지 위험이 있는데 그 첫째는 나는 너무나 큰 죄인이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는 그래도 오늘 잘 살았으니까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늘 하루를 잘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죄중에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잘 산 것 보다는 죄를 더 많이 졌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죄가 많을수록 은혜가 더욱 넘치게 있다는 말씀으로 우리인생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엎드릴 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넘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나 잘 했다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하고 엎드릴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선한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엎드리어 은혜를 구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감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은 찬양을 불러 본다. “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산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 곳 은혜로 들어가네. 주님의 그 은혜. 범죄한 우리가 어찌 서리요. 어린양의 보혈이 깨끗게 하시네. 주님의 그 은혜. 주님의 그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