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들어서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이름을 정할 때, 주로 형용사를 사용해서 교회 이름을 짓는 경향들을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성경의 이름들은 이미 다 써버리고 소진되어서 다른 이름을 찾다보니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이고 또한 요즈음에는 형용사를 많이 사용하여 사물이나 현상을 설명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혹자는 말합니다.
그 중에 많이 쓰이는 행복과 축복 - 분명히 축복(blessing)은 성경적인 개념임에 틀림이 없는데, 행복(happiness)는 성경적인 개념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행복(happiness)는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한 현상을 말하고 축복(blessing)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축복을 경험하고 느끼게 되면 축복된 삶 가운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극치를 성경은 다른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행복이라는 말을 우리는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해야 할 것이 행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 개념을 우리가 조금 깊이 있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행복은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전혀 없던 사람이 백 불이 생겼을 때에 느끼는 행복과 천불이 생겼을 때 느끼는 행복의 차이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복은 동일한 시간 동안만 유효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크기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생기는 빵 한 조각의 행복과 buffet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행복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둘 다 행복의 크기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행복은 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어떤 사건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가를 생각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왜 이렇게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게 되었나를 생각하면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행/불행은 결정됩니다. 실제로 수많은 부자들, 특히 수많은 Hollywood 스타들 중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생각하고 자살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행복이 생각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셋째: 행복은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리더들(목사들을 포함)은 알게 모르게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불행하게 합니다. 흔히 심리학에서 Superman syndrome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처음에는 강한 리더십과 책임감으로 버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사자를 소진시키고 burn-out하게 함으로 결국 지쳐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무엇이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나의 행복이 가정의 행복을 만듭니다. 나의 희생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특히 이민 가정의 부모들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희생이 자녀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밤낮없이 뛰지만, 그것이 자녀들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자녀들이 행복합니다. 희생하는 것을 행복하게 선택하면, 물론 그 희생하는 부모의 그 행복은 아이들에게 전달이 되지만 의무감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은 채 하는 희생은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부모의 희생의 목적과 의도와는 달리, 그 희생은 자녀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가 행복해야 자녀들도 행복합니다.
목사/리더가 힘들고 짜증이 나면 교회가 힘들어집니다. 이와 반대로 목사가 행복하면 성도들도 행복합니다. 목사/리더의 희생이 자신의 행복한 선택이면 그 희생으로 인해 성도들도 행복하지만, 그 희생이 마지못한 의무감이나 기쁨 없는 희생일 경우, 성도는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우리 주님의 희생은 행복한 희생이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희생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희생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희생을 중단하고 주 안에서 쉼을 얻고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면 주변의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하십시오. 그래야 내 주변에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을 만들어 갑시다. 그렇기에 진정한 행복은 축복으로 말미암습니다. 축복이 없는 행복은 일시적인 happening에 지나지 않습니다. 축복을 깊이 있게 깨달을수록 더욱 행복을 선택할 수 있고,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때문에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의 통로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행복을 선택하십시오!
올해를 행복한 한 해로 만드십시오!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뉴욕감리교회 이강 목사
그 중에 많이 쓰이는 행복과 축복 - 분명히 축복(blessing)은 성경적인 개념임에 틀림이 없는데, 행복(happiness)는 성경적인 개념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행복(happiness)는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한 현상을 말하고 축복(blessing)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축복을 경험하고 느끼게 되면 축복된 삶 가운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극치를 성경은 다른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행복이라는 말을 우리는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해야 할 것이 행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 개념을 우리가 조금 깊이 있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행복은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전혀 없던 사람이 백 불이 생겼을 때에 느끼는 행복과 천불이 생겼을 때 느끼는 행복의 차이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복은 동일한 시간 동안만 유효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크기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생기는 빵 한 조각의 행복과 buffet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행복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둘 다 행복의 크기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행복은 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어떤 사건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가를 생각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왜 이렇게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게 되었나를 생각하면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행/불행은 결정됩니다. 실제로 수많은 부자들, 특히 수많은 Hollywood 스타들 중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생각하고 자살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행복이 생각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셋째: 행복은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리더들(목사들을 포함)은 알게 모르게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불행하게 합니다. 흔히 심리학에서 Superman syndrome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처음에는 강한 리더십과 책임감으로 버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사자를 소진시키고 burn-out하게 함으로 결국 지쳐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무엇이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나의 행복이 가정의 행복을 만듭니다. 나의 희생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특히 이민 가정의 부모들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희생이 자녀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밤낮없이 뛰지만, 그것이 자녀들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자녀들이 행복합니다. 희생하는 것을 행복하게 선택하면, 물론 그 희생하는 부모의 그 행복은 아이들에게 전달이 되지만 의무감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은 채 하는 희생은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부모의 희생의 목적과 의도와는 달리, 그 희생은 자녀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가 행복해야 자녀들도 행복합니다.
목사/리더가 힘들고 짜증이 나면 교회가 힘들어집니다. 이와 반대로 목사가 행복하면 성도들도 행복합니다. 목사/리더의 희생이 자신의 행복한 선택이면 그 희생으로 인해 성도들도 행복하지만, 그 희생이 마지못한 의무감이나 기쁨 없는 희생일 경우, 성도는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우리 주님의 희생은 행복한 희생이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희생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희생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희생을 중단하고 주 안에서 쉼을 얻고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면 주변의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하십시오. 그래야 내 주변에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을 만들어 갑시다. 그렇기에 진정한 행복은 축복으로 말미암습니다. 축복이 없는 행복은 일시적인 happening에 지나지 않습니다. 축복을 깊이 있게 깨달을수록 더욱 행복을 선택할 수 있고,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때문에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의 통로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행복을 선택하십시오!
올해를 행복한 한 해로 만드십시오!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뉴욕감리교회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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