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가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다. 어떤 교회에서 게이와 레즈비언들을 이해하기 위한 청소년집회가 있었다. 그 모임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사랑의 대상임이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적 경향성(sexual orientation)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를 놀라게 하였던 것은 그들의 청소년들을 향한 결론적인 메시지였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 사회가 조성하는 부당한 동성애에 관한 공포감(homophobia) 으로 인하여 자신이 동성 친구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부정하여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친구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그 자체로서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위적으로 부정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사랑이 이성보다는 동성을 향한 것이라면 당신은 선천적으로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이러한 동성애자들의 적극적인 자기방어와 대중의식화의 노력은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뚜렷이 부각되는 문화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 동성애자들은 막대한 재정적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이라는 것과 보통의 가정에 비하여 자녀교육 등에 지출되는 가계비가 적은 점, 또한 사회의 차별로부터 자신들의 생존권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절박성 등으로 인하여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그 영향력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과연 동성애는 무엇이 문제인가?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하여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왜 남의 개인적인 성적 경향성과 생활에 관심을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 우선되는 이유는 동성애는 결코 개인적인 문제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한 사회의 틀의 기본을 이루는 가정의 개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우리가 동성애의 문제를 지나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 동성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경 읽기를 통하여 볼 때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동성애에 관심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선교·목회적 관심 때문이다. 의인이 아닌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 즉 이웃을 위하여 오셨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도전을 받는다. 그러므로 20세기의 흑사병이라 불리우는 AIDS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금세기 들어 가장 뚜렷하게 사람들로부터 경계 받고 그로 인하여 소외된 집단들 중 하나가 동성애자들임을 직시할 때, 우리는 선교와 목회의 대상으로서 그들의 문제에 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의 성경 읽기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첫째는 성경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동성애에 관한 부정적 편견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그들은 이미 성경 안에도 동성애에 관한 표현들이 은연중 용납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동성애에 관한 부정적 비판들이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부인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의 근본틀에 대한 도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컨대 성경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에서 기록된 것임으로 그 시대의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사실 두 번째의 도전은 너무도 근본적인 도전이기 때문에 이후로도 신학자들의 심각한 연구와 응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지면의 한계와 여러 가지 주어진 여건들을 고려하여 주로 첫 번째의 관점에서의 도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동성애에 관한 비판적 관점들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1) 그 중에서도 창세기 19:1~11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구절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던 “야다”라고 하는 동사는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다 ‘잘 알고 지내기’를 원하자는 의미이상이 아니었다는 설이 등장함으로써 본문이 동성애에 대한 공격자료로서 이용되는 것의 적절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베일리(D.S. Bailey)에 따르면 ‘야다’라고 하는 동사가 구약성경 중 943번 등장하지만 성관계를 뜻하는 것은 오로지 12번뿐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소돔의 죄악은 에스겔 16:49의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가 아닌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한” 것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닌 불친절한 행동, 혹은 집단추행 등의 이유라는 것이다.
(2)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 이어 인용되는 성경구절은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는 명령과 레위기 20:13의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을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는 심판의 선언이다. 이 구절들은 동성애적인 성행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정죄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말씀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 구절들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위의 본문들과 같은 맥락에서 선포된 돼지고기와 새우 등의 음식물에 대한 금지가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되었듯이(사도행전 10:15)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레위기의 본문도 이제는 마땅히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성애에 대한 금지법은 도덕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으로 폐지된 일종의 의식법(ceremonial law)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한다.
(3) 이밖에도 열왕기상 14:24 등의 말씀들이 동성애에 관한 비판 구절로 인용될 수 있지만 이 본문을 신명기 23:17에서 말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맥락에서 파악하여야 한다는 해석을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적극 수용하고 있다. 예컨대 열왕기상에서 비판하고 있는 동성애는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던 이른바 성창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우상숭배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우상숭배와 관계된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4)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예수께서도 동성애에 대하여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또한 지적한다. 만약 그것이 그렇게 큰 죄악이라면 예수께서 지적하지 않으셨겠느냐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사도 바울의 동성애에 관한 견해는 권위적인 계시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만의 견해이므로(고전 7:25) 문화적으로 엄청난 격차가 있는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로마서 1장에서의 직접적인 동성애자들에 대한 정죄도 게이나 레즈비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heterosexual)들이 동성애를 동시에 탐닉함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전통적 성경 읽기에 대한 비판은 위와 같은 소극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다윗과 요나단(삼상 18~20장)이 동성애를 나누는 관계였다고 하며, 이사야는 동성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을 선포하였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사 56:3).
이제 우리는 성경을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읽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교회와 성경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자신들의 성향과 행위를 정당화하려 할 때와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하는 것에는 신학적·목회적 차원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와 성경의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이들도 우리의 선교와 목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목회의 일차적인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다. 우리가 이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울타리 밖의 양들을 인도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선교와 목회적 차원에서, 동시에 우리의 2세들을 위한 예방교육적 차원에서 다시 한번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새로운 성경읽기를 ‘책임적인 성경읽기’라 이름하여 보았다.
책임적인 관점에서의 동성애에 관한 성경 읽기
우리는 먼저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성경해석을 차례로 분석·비판한 후에 결론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여 볼 것이다.
(1) 창세기 19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동사 ‘야다’는 문맥상 성적인 관계를 뜻함이 분명하다. 베일리의 지적과 같이 구약 성경 전체에서 그 동사가 항상 성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었음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의 전후 맥락에서의 ‘야다’의 의미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 롯이 소돔사람들에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을’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하였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의도가 성적인 것에 있었음을 반증하여 주고 있다. 또한 에스겔서를 인용하여 소돔의 죄가 일종의 이기심 때문이었다고만 하는 주장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이 인용하는 본문인 16:49에 이어 나오는 50절을 보면 레위기 18:22에서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때 등장하는 “가증한(toebah)”이라는 낱말이 등장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소돔의 죄가 결코 이기적인 행위나 여행자에게 불친절했던 것에 관한 문제들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극도의 이기주의와 동성애를 포함한 도덕적인 방종으로 대표되는 총체적으로 타락된 삶이 소돔 멸망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좀더 포괄적인 본문이해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레위기 18장의 말씀은 결코 시대적 제약을 받는 의식법적인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위기 안에서도 돼지고기와 새우 등을 먹은 것에 대하여서는 수일간의 격리가 선고되지만 동성애에 관하여서는 사형(18:29)이 선포되고 있음은 왜일까? 또한 신약성경이 의식법에 대하여 대단히 혁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막 7:18, 행 10:12), 동성애에 관하여서는 일관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유다 1:7).
(3) 또한 성경이 비판하는 동성애가 오로지 성전안에서의 매음과 관련된 우상숭배 행위와 연관된 것이라는 말도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다. 사실 신명기 23:17을 동성애와 관련된 본문으로 보는 것 자체가 원문상으로 보면 무리한 해석이다. 더욱이 동성애에 관하여 뚜렷하게 정죄를 선포하는 레위기 18장과 로마서 1장의 맥락은 결코 동성애와 우상숭배행위를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지 않다. 우상숭배가 성적인 타락으로 인도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롬 1:22~27) 분명히 그 둘은 다른 죄이다. 그 둘이 십계명의 서로 다른 돌판에 새겨져 있음을 기억함이 도움이 될 것이다(출 20:3~4, 20:14~17).
(4) 예수님께서 동성애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동성애를 옹호하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예수님께서 일일이 우리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으셨어야 했을까? 급변하는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현상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증빙하려는 시도에도 문제가 있다. 어떠한 특정한 행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으로 괜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성경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겠다는 실증주의에 사로잡힌 매우 인본주의적인 주장들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판단하는 잣대 (canon)로서 성경을 주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권위로서의 말씀과 그 말씀을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 바르게 해석하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윤리적 판단기준을 유추하는 ‘거듭난 이성’을 동시에 주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로마서 1:18~32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이방세계의 현실과 그로 인한 복음의 필요성을 논하는 맥락 안에 자리함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방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섬김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 멀어짐은 결국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지게” 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내어 버려짐의 특징 중 하나는 성적인 영역에서의 타락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경고를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부터의 타락, 즉 왜곡된 삶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은 자못 분명하다. 물론 본문에서 주로 지적하는 것은 향락의 극치를 즐기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지는 동성애의 탐닉을 주로 뜻하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종적 차원이 아닌, 선천적으로 동성애자로 태어났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로마서의 경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본문에서 결코 동성간의 성적인 관계가 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암시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본문은 타락한 인간 세상의 대표적 양태로서의 동성애를 증거하고 있다고 봄이 더욱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또한 바울의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이 그가 남성들에게 긴 머리를 하지 말라고 한 것 등과 같은 수준에서의 시대적 제한성을 지닌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는 주장은 창세기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의 동성애에 대한 시종여일한 부정적 견해를 전제할 때 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 한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자였다는 식의 발언들은 본문자체에 대한 자의적 주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도 상반되는 억지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의 말씀(사 56:3)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천국의 입장예약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한 기대이다. ‘고자’와 동성애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성경적인 동성애 대하기
지금까지 우리는 동성애가 결코 성경에서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멸시 속에서도 나름대로는 성경을 연구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을 접하면서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물론 자신의 현재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증빙자료로 활용하려는 의도는 신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몸부림을 통하여 그 삶들의 곤고함을 통찰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적인 성경 읽기는 우리들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정죄와 경멸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한 그들의 실존을 함께 아파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러한 함께 아파함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과 왜곡됨을 감싸고 치유하는 사역에 참여토록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하늘로부터의 지혜가 절실히 요청되는 사역이다. 특별히 우리의 2세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더욱 공격적이 되어 가는 동성애자들의 생존전략은 인본주의적인 세속문화라는 기본틀 속에서 약자들에 대한 시민권보호운동,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이들(정치·경제적 피억압자들, 여성 등) 간의 연대의 차원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 글의 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전략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는 그 도를 더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예방적 차원에서의 교육 사역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라나는 세대들, 특별히 동성에 대한 관심이 큰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인간의 죄된 삶의 한 양태로서의 동성애와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아름다운 동성간의 우애를 적극적으로 구분하여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계명으로서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한 기억은 동성애자들을 품어 안아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함이 오늘날의 선교·목회적 사역의 간과될 수 없는 한 부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임성빈(장신대 신학학과장)
필자가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다. 어떤 교회에서 게이와 레즈비언들을 이해하기 위한 청소년집회가 있었다. 그 모임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사랑의 대상임이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적 경향성(sexual orientation)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를 놀라게 하였던 것은 그들의 청소년들을 향한 결론적인 메시지였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 사회가 조성하는 부당한 동성애에 관한 공포감(homophobia) 으로 인하여 자신이 동성 친구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부정하여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친구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그 자체로서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위적으로 부정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사랑이 이성보다는 동성을 향한 것이라면 당신은 선천적으로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이러한 동성애자들의 적극적인 자기방어와 대중의식화의 노력은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뚜렷이 부각되는 문화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 동성애자들은 막대한 재정적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이라는 것과 보통의 가정에 비하여 자녀교육 등에 지출되는 가계비가 적은 점, 또한 사회의 차별로부터 자신들의 생존권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절박성 등으로 인하여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그 영향력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과연 동성애는 무엇이 문제인가?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하여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왜 남의 개인적인 성적 경향성과 생활에 관심을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 우선되는 이유는 동성애는 결코 개인적인 문제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한 사회의 틀의 기본을 이루는 가정의 개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우리가 동성애의 문제를 지나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 동성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경 읽기를 통하여 볼 때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동성애에 관심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선교·목회적 관심 때문이다. 의인이 아닌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 즉 이웃을 위하여 오셨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도전을 받는다. 그러므로 20세기의 흑사병이라 불리우는 AIDS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금세기 들어 가장 뚜렷하게 사람들로부터 경계 받고 그로 인하여 소외된 집단들 중 하나가 동성애자들임을 직시할 때, 우리는 선교와 목회의 대상으로서 그들의 문제에 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의 성경 읽기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첫째는 성경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동성애에 관한 부정적 편견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그들은 이미 성경 안에도 동성애에 관한 표현들이 은연중 용납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동성애에 관한 부정적 비판들이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부인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의 근본틀에 대한 도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컨대 성경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에서 기록된 것임으로 그 시대의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사실 두 번째의 도전은 너무도 근본적인 도전이기 때문에 이후로도 신학자들의 심각한 연구와 응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지면의 한계와 여러 가지 주어진 여건들을 고려하여 주로 첫 번째의 관점에서의 도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동성애에 관한 비판적 관점들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1) 그 중에서도 창세기 19:1~11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구절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던 “야다”라고 하는 동사는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다 ‘잘 알고 지내기’를 원하자는 의미이상이 아니었다는 설이 등장함으로써 본문이 동성애에 대한 공격자료로서 이용되는 것의 적절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베일리(D.S. Bailey)에 따르면 ‘야다’라고 하는 동사가 구약성경 중 943번 등장하지만 성관계를 뜻하는 것은 오로지 12번뿐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소돔의 죄악은 에스겔 16:49의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가 아닌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한” 것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닌 불친절한 행동, 혹은 집단추행 등의 이유라는 것이다.
(2)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 이어 인용되는 성경구절은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는 명령과 레위기 20:13의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을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는 심판의 선언이다. 이 구절들은 동성애적인 성행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정죄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말씀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 구절들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위의 본문들과 같은 맥락에서 선포된 돼지고기와 새우 등의 음식물에 대한 금지가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되었듯이(사도행전 10:15)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레위기의 본문도 이제는 마땅히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성애에 대한 금지법은 도덕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으로 폐지된 일종의 의식법(ceremonial law)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한다.
(3) 이밖에도 열왕기상 14:24 등의 말씀들이 동성애에 관한 비판 구절로 인용될 수 있지만 이 본문을 신명기 23:17에서 말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맥락에서 파악하여야 한다는 해석을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적극 수용하고 있다. 예컨대 열왕기상에서 비판하고 있는 동성애는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던 이른바 성창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우상숭배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우상숭배와 관계된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4)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예수께서도 동성애에 대하여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또한 지적한다. 만약 그것이 그렇게 큰 죄악이라면 예수께서 지적하지 않으셨겠느냐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사도 바울의 동성애에 관한 견해는 권위적인 계시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만의 견해이므로(고전 7:25) 문화적으로 엄청난 격차가 있는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로마서 1장에서의 직접적인 동성애자들에 대한 정죄도 게이나 레즈비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heterosexual)들이 동성애를 동시에 탐닉함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전통적 성경 읽기에 대한 비판은 위와 같은 소극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다윗과 요나단(삼상 18~20장)이 동성애를 나누는 관계였다고 하며, 이사야는 동성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을 선포하였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사 56:3).
이제 우리는 성경을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읽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교회와 성경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자신들의 성향과 행위를 정당화하려 할 때와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하는 것에는 신학적·목회적 차원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와 성경의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이들도 우리의 선교와 목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목회의 일차적인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다. 우리가 이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울타리 밖의 양들을 인도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선교와 목회적 차원에서, 동시에 우리의 2세들을 위한 예방교육적 차원에서 다시 한번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새로운 성경읽기를 ‘책임적인 성경읽기’라 이름하여 보았다.
책임적인 관점에서의 동성애에 관한 성경 읽기
우리는 먼저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성경해석을 차례로 분석·비판한 후에 결론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여 볼 것이다.
(1) 창세기 19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동사 ‘야다’는 문맥상 성적인 관계를 뜻함이 분명하다. 베일리의 지적과 같이 구약 성경 전체에서 그 동사가 항상 성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었음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의 전후 맥락에서의 ‘야다’의 의미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 롯이 소돔사람들에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을’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하였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의도가 성적인 것에 있었음을 반증하여 주고 있다. 또한 에스겔서를 인용하여 소돔의 죄가 일종의 이기심 때문이었다고만 하는 주장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이 인용하는 본문인 16:49에 이어 나오는 50절을 보면 레위기 18:22에서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때 등장하는 “가증한(toebah)”이라는 낱말이 등장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소돔의 죄가 결코 이기적인 행위나 여행자에게 불친절했던 것에 관한 문제들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극도의 이기주의와 동성애를 포함한 도덕적인 방종으로 대표되는 총체적으로 타락된 삶이 소돔 멸망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좀더 포괄적인 본문이해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레위기 18장의 말씀은 결코 시대적 제약을 받는 의식법적인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위기 안에서도 돼지고기와 새우 등을 먹은 것에 대하여서는 수일간의 격리가 선고되지만 동성애에 관하여서는 사형(18:29)이 선포되고 있음은 왜일까? 또한 신약성경이 의식법에 대하여 대단히 혁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막 7:18, 행 10:12), 동성애에 관하여서는 일관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유다 1:7).
(3) 또한 성경이 비판하는 동성애가 오로지 성전안에서의 매음과 관련된 우상숭배 행위와 연관된 것이라는 말도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다. 사실 신명기 23:17을 동성애와 관련된 본문으로 보는 것 자체가 원문상으로 보면 무리한 해석이다. 더욱이 동성애에 관하여 뚜렷하게 정죄를 선포하는 레위기 18장과 로마서 1장의 맥락은 결코 동성애와 우상숭배행위를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지 않다. 우상숭배가 성적인 타락으로 인도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롬 1:22~27) 분명히 그 둘은 다른 죄이다. 그 둘이 십계명의 서로 다른 돌판에 새겨져 있음을 기억함이 도움이 될 것이다(출 20:3~4, 20:14~17).
(4) 예수님께서 동성애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동성애를 옹호하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예수님께서 일일이 우리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으셨어야 했을까? 급변하는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현상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증빙하려는 시도에도 문제가 있다. 어떠한 특정한 행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으로 괜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성경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겠다는 실증주의에 사로잡힌 매우 인본주의적인 주장들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판단하는 잣대 (canon)로서 성경을 주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권위로서의 말씀과 그 말씀을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 바르게 해석하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윤리적 판단기준을 유추하는 ‘거듭난 이성’을 동시에 주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로마서 1:18~32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이방세계의 현실과 그로 인한 복음의 필요성을 논하는 맥락 안에 자리함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방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섬김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 멀어짐은 결국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지게” 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내어 버려짐의 특징 중 하나는 성적인 영역에서의 타락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경고를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부터의 타락, 즉 왜곡된 삶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은 자못 분명하다. 물론 본문에서 주로 지적하는 것은 향락의 극치를 즐기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지는 동성애의 탐닉을 주로 뜻하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종적 차원이 아닌, 선천적으로 동성애자로 태어났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로마서의 경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본문에서 결코 동성간의 성적인 관계가 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암시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본문은 타락한 인간 세상의 대표적 양태로서의 동성애를 증거하고 있다고 봄이 더욱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또한 바울의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이 그가 남성들에게 긴 머리를 하지 말라고 한 것 등과 같은 수준에서의 시대적 제한성을 지닌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는 주장은 창세기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의 동성애에 대한 시종여일한 부정적 견해를 전제할 때 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 한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자였다는 식의 발언들은 본문자체에 대한 자의적 주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도 상반되는 억지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의 말씀(사 56:3)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천국의 입장예약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한 기대이다. ‘고자’와 동성애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성경적인 동성애 대하기
지금까지 우리는 동성애가 결코 성경에서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멸시 속에서도 나름대로는 성경을 연구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을 접하면서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물론 자신의 현재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증빙자료로 활용하려는 의도는 신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몸부림을 통하여 그 삶들의 곤고함을 통찰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적인 성경 읽기는 우리들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정죄와 경멸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한 그들의 실존을 함께 아파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러한 함께 아파함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과 왜곡됨을 감싸고 치유하는 사역에 참여토록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하늘로부터의 지혜가 절실히 요청되는 사역이다. 특별히 우리의 2세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더욱 공격적이 되어 가는 동성애자들의 생존전략은 인본주의적인 세속문화라는 기본틀 속에서 약자들에 대한 시민권보호운동,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이들(정치·경제적 피억압자들, 여성 등) 간의 연대의 차원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 글의 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전략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는 그 도를 더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예방적 차원에서의 교육 사역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라나는 세대들, 특별히 동성에 대한 관심이 큰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인간의 죄된 삶의 한 양태로서의 동성애와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아름다운 동성간의 우애를 적극적으로 구분하여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계명으로서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한 기억은 동성애자들을 품어 안아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함이 오늘날의 선교·목회적 사역의 간과될 수 없는 한 부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임성빈(장신대 신학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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