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엄마와 어린 아이가 함께 물건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게 아저씨가 그 꼬마가 하도 예뻐서 ‘얘야 사탕 한 주먹 쥐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꼬마 아이가 주저주저합니다.
엄마도 곁에서 ‘아저씨가 한 주먹 먹으라고 하잖니’거듭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자 그 가게 아저씨가 ‘아이쿠 이 녀석’ 하면서 한 움큼을 퍼 아이에게 줍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묻습니다.
'왜 아저씨랑 엄마가 먹으라고 했는데 얼른 안 집고 주저했었니?’
그러자 그 아이가 말하기를 “엄마, 아저씨 손이 내 손 보다 더 크잖아요!” 하더랍니다.
이 얼마나 지혜롭고 똑똑합니까?
선택은 자유라고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너무 서둘러서 선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의 손이 내 인생을 주장하실 수 있도록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한 번 선택을 하면 일평생 내가 책임져야 할 겁니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께 묻고 선택하는 것만이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전에 한 텔레비전 프로에서 양쪽 두 갈래 길을 놓고 먼저 오른쪽으로 선택했던 삶과 그 후에 왼쪽 삶을 선택해서 갔던 인생, 어느 쪽 인생이 더 좋았을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정확한 예지능력이 있어서 삶을 선택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양쪽 어느 쪽이든, 좀 더 나은 생을 살 수는 있지만, 결국은 그런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이 될 거라는 예측입니다.
예지 능력이 있어, 항상 좋은 것만 선택하고, 최상의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의 희망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좌절 속에서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새가 그랬다잖아요.
새끼 새들을 데리고 먹이를 찾고 있으면서 어미 새가 새끼 새들에게 주위를 줍니다.
‘얘들아, 먹이를 찾아도 내가 나무에 올라가라 하면 다 나두고 올라가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그런데 한 마리가 너무 멀리 가서 어미의 소리를 못 들었데요, 그 새끼 새는 그만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세상의 것이 좋아도 성도는 말씀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을 떠나게 되면 죽음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선 안에 있는 것이 ‘성도의 구별’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떠났는데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버림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결코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 품안에 있으면서 고난이 있고, 힘든 일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마지막 가야할 영원한 소망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나는 광야의 여정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해서 물건들을 많이 구입합니다. 그러나 그 물건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면 그 물건은 garbage로 버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싼 자동차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 차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면 차는 폐차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송케 하기 위해 지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이사야 43:21)
하나님이 선택해서 지은 사람의 존재 이유가 이처럼 분명한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싫어한다면 우리는 가치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을 알고도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에겐 하나님도 더 이상 기다리실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찬양은 축복의 약속이지만 동시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이 나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찬양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라이프 라인 미션 대표 유태웅 전도사(퀸즈중앙장로교회)
어느 엄마와 어린 아이가 함께 물건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게 아저씨가 그 꼬마가 하도 예뻐서 ‘얘야 사탕 한 주먹 쥐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꼬마 아이가 주저주저합니다.
엄마도 곁에서 ‘아저씨가 한 주먹 먹으라고 하잖니’거듭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자 그 가게 아저씨가 ‘아이쿠 이 녀석’ 하면서 한 움큼을 퍼 아이에게 줍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묻습니다.
'왜 아저씨랑 엄마가 먹으라고 했는데 얼른 안 집고 주저했었니?’
그러자 그 아이가 말하기를 “엄마, 아저씨 손이 내 손 보다 더 크잖아요!” 하더랍니다.
이 얼마나 지혜롭고 똑똑합니까?
선택은 자유라고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너무 서둘러서 선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의 손이 내 인생을 주장하실 수 있도록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한 번 선택을 하면 일평생 내가 책임져야 할 겁니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께 묻고 선택하는 것만이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전에 한 텔레비전 프로에서 양쪽 두 갈래 길을 놓고 먼저 오른쪽으로 선택했던 삶과 그 후에 왼쪽 삶을 선택해서 갔던 인생, 어느 쪽 인생이 더 좋았을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정확한 예지능력이 있어서 삶을 선택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양쪽 어느 쪽이든, 좀 더 나은 생을 살 수는 있지만, 결국은 그런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이 될 거라는 예측입니다.
예지 능력이 있어, 항상 좋은 것만 선택하고, 최상의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의 희망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좌절 속에서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새가 그랬다잖아요.
새끼 새들을 데리고 먹이를 찾고 있으면서 어미 새가 새끼 새들에게 주위를 줍니다.
‘얘들아, 먹이를 찾아도 내가 나무에 올라가라 하면 다 나두고 올라가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그런데 한 마리가 너무 멀리 가서 어미의 소리를 못 들었데요, 그 새끼 새는 그만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세상의 것이 좋아도 성도는 말씀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을 떠나게 되면 죽음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선 안에 있는 것이 ‘성도의 구별’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떠났는데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버림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결코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 품안에 있으면서 고난이 있고, 힘든 일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마지막 가야할 영원한 소망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나는 광야의 여정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해서 물건들을 많이 구입합니다. 그러나 그 물건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면 그 물건은 garbage로 버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싼 자동차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 차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면 차는 폐차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송케 하기 위해 지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이사야 43:21)
하나님이 선택해서 지은 사람의 존재 이유가 이처럼 분명한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싫어한다면 우리는 가치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을 알고도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에겐 하나님도 더 이상 기다리실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찬양은 축복의 약속이지만 동시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이 나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찬양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라이프 라인 미션 대표 유태웅 전도사(퀸즈중앙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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