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년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이 거듭남을 말할 때 한번 거듭나면 모든 하나님의 세계를 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제 거듭났으니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세계가 다인줄 알고 사는 것을 본다. 그렇게 되면 남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하고 자기의 경험만을 주장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다른 약속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야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거듭남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오늘 나의 글의 제목을 계속 거듭나야 할 것으로 정한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거듭남의 단회성을 모르고 하는 말인가? 라는 의문을 던질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거듭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거듭나는 삶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남은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후에도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도 적용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는 수많은 다른 약속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이 세상에도 수많은 세계가 있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는 같은 세상이지만 남자의 세계가 있고 여자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동물들의 세계가 있다. 또한 취미를 통해서도 여러 세계로 나눌 수 있다. 등산의 세계가 있고 골프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자기가 취미로 하지 않으면 그것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나는 등산을 별로 좋아 하는 편이 아니다. 누가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높은 데를 올라가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뉴스에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것을 대단해 하는 것과 그 산을 정복하려다가 죽은 사람들을 용감하고도 영웅적인 사람들로 대하는 것을 볼 때 이해할 수 없다. 내 눈에는 그것은 완전히 헛짓하다가 객사를 한 것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은 꽤 큰 것이니까 인간을 혹하게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서 조그마한 박물관을 들어갔을 때 참으로 이상한 기록들과 함께 붙어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곳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큰통을 타고 떨어져서 살아남는 모험을 한 것을 기념하는 곳이었다. 그 곳의 기록으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폭포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도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나는 그 기록들을 보며 내가 이해 못하는 그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 내가 그들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세계로 나를 소개할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이 세상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들어가 보지 못한 세계가 너무나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세계에도 우리가 믿는 자로서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세계가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의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도 아직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모르고 다른 일에 분주할 수가 있다. 그리고 새벽을 깨우며 기도 하는 사람들을 미치광이로 볼 수가 있다. 또한 토해 내듯하는 기도를 못해 본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 급해지고 어려워지면 그 사람도 그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나는 너무나도 전통적인 장로교 집안에서 자란 여집사님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기도는 항상 조용히 하고 크게 하는 것을 경박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사님의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거의 비명에 가까운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내가 아는 기도의 사람들은 인생의 폭풍을 만났을 때 드디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을 나는 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용서의 세계도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얼마나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세계를 경험했을까? 나는 그것을 예수 믿고 얼마 안 되어서 체험하게 되었었다. 내가 브라질에서 은혜를 받고 청년회에서 열심을 내어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때였다. 어느 교회에든지 터줏대감이 있듯이 그 교회에도 그런 청년이 있었다. 그는 내가 세상에서 빈둥빈둥 놀다가 예수를 믿는데 자기보다 열심을 내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참견을 하며 나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면 “야! 너는 그 목소리가 왜 그러냐?”고 하고, 무엇을 몰라 물어 보면 너는 그런 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었다. 거기다가 내가 성가대원이 되어서 노래를 할 때는 항상 내 옆에 서서 내가 틀릴 때마다 내 다리를 치고 꼬집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는 짓을 보면서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때는 내가 너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때라 화는 나지만 화를 내지 아니했다. 그저 예수님의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끝까지 참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6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 그가 어느 날 하루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늦은 밤 청년회실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 내 손을 잡고 “종식아! 그동안 나 때문에 괴로왔지? 미안하다. 그동안 사실 니가 너무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것을 보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너를 깎아 내리려고 한 것이야! 그런데 너는 그런 나를 웃음으로 받아 주었어. 그러니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나를 용서해라. 그리고 우리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라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 후 우리는 매우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 날밤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와 용서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용서의 약속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수 많은 약속의 세계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안의 세계, 감사의 세계, 기쁨의 세계, 찬양의 세계등 너무나 많은 우리가 들어가 보아야 할 세계가 많은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런 세계로 들어 갈 때마다 거듭나는 것이다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약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듯 예수만 믿으면 금방 모든 것을 다 체험하여 온전한 신자가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 그런 게 아닌 것이다.

첫 번의 거듭남은 우리를 단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지 믿음의 세계 모든 곳에 우리를 인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믿음의 세계를 들어가기 위하여 순간순간 거듭남을 체험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은 죽은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지만, 그 살아난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있는 많은 약속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서 계속적인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한 번의 거듭남으로 모든 것을 다 경험한 것처럼 생각하며 교만에 빠져 사는 청년들은 이런 하나님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계속 새로 태어날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될 줄로 믿는다.

베이사이드 장로교회 이종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