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주 친한 친구 목사 한 분이 예배를 드린 다음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뇌사 상태에 빠져 버렸다. 나보고 그렇게도 건강 조심하라고 권면하시더니 본인이 먼저 건강에 이상이 생겨 버린 것이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 분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불러도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그 목사님. 그저 숨만 쉬는 것으로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그 목사님. 눈물밖에 나오질 않았다. 한참 일할 나이인데... 교회를 개척해 가지고 열심히 사역하고 있고 교회 성장도 막 이루어져 가고 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날 하루 내내 사도 바울의 말씀이 내 가슴을 쳤다. ‘내가 매일 죽노라.’ 그렇다. 우리는 매일 죽는다. 내일 아침 다시 살아나리라는 보장없이 결국은 죽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숨을 쉬게 되면 감사한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일도 후회가 없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미움도, 슬픔도 남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내일 당연히 눈을 뜰 것이고,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와는 상관없는 듯 살아간다. 엄청난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없다. 오늘 못한 일을 내일로 미루고야 만다. 사랑도 상처를 남긴 채 그냥 방치해 버린다. 그러다가 큰 일을 당하게 되면 당한 사람이나 남는 사람 모두에게 회한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지금 중환자실의 그 목사님도 금주에는 나를 만나 이런 일, 저런 일을 의논하고 또 식사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이룰 수 없는 약속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분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목사님, 약속 지키셔야죠! 일어나세요. 내가 지금 여기 있잖아요.” 그러나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음을 어이할까?
우리는 인생을 덧없다고 말한다. 덧없기는 하지만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만 한다면 또 엄청나게 보람되고 의미있는 인생이기도 하다. 결국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 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낭비된 시간은 생존한 것이고, 이용한 것은 삶을 산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저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삶을 장악하고 있는가? 그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생존과 사는 것의 차이,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생존이 계속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삶은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하나님께서도 선지자 모세를 통해 주셨던 도전도 ‘삶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존재하지만 말고 역경을 극복하고 번영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개척자로서,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잊지 말라! 후회할 때는 이미 때가 늦는다. 그러기 전에 충만을 선택하라.
/추부길(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그날 하루 내내 사도 바울의 말씀이 내 가슴을 쳤다. ‘내가 매일 죽노라.’ 그렇다. 우리는 매일 죽는다. 내일 아침 다시 살아나리라는 보장없이 결국은 죽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숨을 쉬게 되면 감사한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일도 후회가 없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미움도, 슬픔도 남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내일 당연히 눈을 뜰 것이고,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와는 상관없는 듯 살아간다. 엄청난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없다. 오늘 못한 일을 내일로 미루고야 만다. 사랑도 상처를 남긴 채 그냥 방치해 버린다. 그러다가 큰 일을 당하게 되면 당한 사람이나 남는 사람 모두에게 회한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지금 중환자실의 그 목사님도 금주에는 나를 만나 이런 일, 저런 일을 의논하고 또 식사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이룰 수 없는 약속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분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목사님, 약속 지키셔야죠! 일어나세요. 내가 지금 여기 있잖아요.” 그러나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음을 어이할까?
우리는 인생을 덧없다고 말한다. 덧없기는 하지만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만 한다면 또 엄청나게 보람되고 의미있는 인생이기도 하다. 결국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 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낭비된 시간은 생존한 것이고, 이용한 것은 삶을 산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저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삶을 장악하고 있는가? 그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생존과 사는 것의 차이,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생존이 계속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삶은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하나님께서도 선지자 모세를 통해 주셨던 도전도 ‘삶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존재하지만 말고 역경을 극복하고 번영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개척자로서,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잊지 말라! 후회할 때는 이미 때가 늦는다. 그러기 전에 충만을 선택하라.
/추부길(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