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는 자아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금세기의 가장 중대한 심리학적 발견"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느끼는 나의 모습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누구나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손거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 주변을 보는 게 아니라 이 거울에 반사된 모습만 볼 수 있다고 해봅시다. 이 손거울에 나를 계속 비추다 보면 내 모습이 오래 비우어졌던 거울은 그 안에 담겨졌던 모습을 반영하는 특징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거울에는 점점이 검은 얼굴이 묻어 있어서, 하얀 구름을 비춰 보아도 거뭇한 얼룩을 띤 비구름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의 손거울은 요철(凹凸)이 있어서, 거기 비춰보면 무엇이든지 울퉁불퉁 찌그러져 보입니다.

우울감과 불면 등의 문제를 가지고, 지친 모습으로 어렵게 병원을 찾아 온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십대 후반의 자매는 참 예뻤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그녀가 화를 내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니는 회사에서도 힘든 일은 다 그 자매 차지였습니다. 당연히 그녀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좀 이상한 것은, 사귀어 보려고 접근하는 형제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고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한 형제가 오랜 기도 끝에 자기 속마음을 조심스레 열어 보였지만, 돌아온 것은 "날 좋게 봐줘서 정말 고맙지만, 미안해. 난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돼."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자매의 가족은 부모님과 오빠 하나, 이렇게 네 명이었습니다. 오빠는 어려서부터 심한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평상시엔 다정한 분이었지만, 문제는 그 평상시가 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어머니가 술취하지 않은 채 맑은 정신으로 계신 걸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어느 날, 퇴근해서 들어오신 어버지는 곤드레로 취해 잠든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쉬며 혼자 저녁을 드셨습니다. 아직 어렸던 자매는 설거지를 한다는 것이 실수로 접시를 떨어뜨려 박살을 내고 말았습니다. "도둑이야! 누가 날 죽이려고 한다!" 자다가 깨어나 소리 지르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달래어 겨우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덜덜 떨고 있는 자매를 노려보면 차갑게 내뱉었습니다. "너도 네 에미 닮아서 쓰레기, 엉터리야." 눈물을 참으면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통수를 쥐어박습니다. 오빠였습니다. "못난아, 왜 거기서 훌쩍거리냐? 재수 없게."

다행히 자매가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술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너무도 어려워 애를 먹다가, 결국에는 병원과 교회의 힘을 빌어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지금의 자매는 남부러울 것없는 직장에 다니며, 눈길을 잡아 끄는 아름다운 외모의, 소위 "빠질 게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매도 자신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요? 그녀의 눈에 자신은 쓰레기이고 엉터리이자 못난이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를 쏙 빼닮은 딸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보이는 친절한 모습은, 알코올 중독이라는 문제를 가진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보이는 양 극단의 모습(극도로 유순하고 순응적이거나/ 정반대로 반사회적인 공격성을 띠거나) 중 한 쪽 입니다. 나까지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기에 최대한 분위기에 맞추고자 탁월한 적응 능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에게 호감을 표현해오는 형제들은, 자매에게는 자신의 연약함을 비웃는 듯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는 영 탐탁치 않은 자기를 좋게 보다니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매의 하나님. 자매는 어려서부터 옆집 친구를 따라 주일 학교에 다녔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자매는 아버지의 차갑고 냉정한 눈매를 떠올렸습니다. 어린 자기가 일을 완벽하게 마쳐놓지 않으면 신경질 부리며 술을 찾는 어머니도 생각났습니다.

자매에게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흑백의 세계에 사는 이에게 파랑새의 섬세한 깃털 빛깔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매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아버지께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합니다.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주일 학교 교사와 청년부 조장, 성가대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야기하는 신앙은 기쁨이 무엇인지 자매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와 똑같이 자매는 스스로 짐을 짊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을 다 내려놓으라고 얘기하시는데도, "그럴게요." 얌전히 대답한 뒤 다른 사람의 짐까지 다 짊어집니다. '예수님을 무겁게 해드리면 나를 벌하실 지도 몰라. 혹 내 짐을 드렸다가 내쳐버리시면 더 힘들 거야. 처음부터 그냥 내가 감당하는 게 더 편해.' 저도 모르게 스쳐 지나간 생각입니다.

평상시의 바쁜 일상에서 자매는 어린 시절의 기억 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아상이 현재의 자기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자기 힘만으로 버거울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자매가 사랑하는 하나님도 왜 이렇듯 거리감이 느껴지는지 가슴이 무너집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손거울을 떠올려봅니다. 자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일그러진 손거울에 비춰진 모습으로 자기 자신도, 주변의 사람들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느끼고 받아들었던 것입니다. 기억으로 떠올려지지 않을 정도의 옛날로부터 울려오는 메이리("너는 바보야".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말로 표현되지 않았던 싸늘한 눈초리와 경멸하는 표정,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의 형상-나의 형상"이라는 책에서 죠쉬 맥도웰은 "훌륭한 자아상을 지니기 위해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관념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좋은 자아상을 가지기 위해 신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신앙이 자아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내 느낌대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심지어 내가 그분을 내 자신의 틀 안에서 상상하고 해석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자아상과 그를 통한 나의 모든 삶(실수를 포함하여)까지도 그분은 나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설계자가 그 작품을 가장 잘 아는 것처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큼 우리에게 자아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 분이 나를 바라보시는 방식을 아는 것, 이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자아상의 시작입니다. 내 손거울에 비춰 보는 모습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언젠가 우리는 들고 있던 손거울을 내려놓고 그 분을 직접 뵐 것입니다. 그날이 되기까지, 내가 가진 거울을 잘 닦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앞에 소개했던 자매가 치료를 받으면서 어떻게 되었을지는 여러분의 생각에 맡겨 두겠습니다. 동화의 맨 마지막 장에서처럼 "그 후로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아상이라는 것은 한 번의 깨달음만으로 쉽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십여년 이상 오래 누적되어 온 내 모습을 당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긍휼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짧은 글을 맺습니다.

/ 문지현(정신과 전문의, 동화신경정신과의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