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여기 남들이 정말로 부러워하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급 관료입니다. 어머니는 최고의 대학을 나온 수재였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부모는 아이를 공부도, 스포츠도 모두 잘하고 거기에다가 예의도 바른 그런 아이, 한마디로 훌륭한 우등생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이 아이는 정말로 부모가 바라는대로 착한 아이였고 모범생이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도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아이이며 정말 보기 드물게 착한 학생”이라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학교 가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더니 불량스런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성적은 당연히 엉망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당황하여 상담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상담자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댁의 아이는 지금까지 자신을 꾹 억누르고 부모가 말한 대로만 살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반항적인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발 댁의 아이가 하는 행동을 인내심을 가지고 관대하게 그냥 지켜 봐 주십시오. 그러다가 좋아 질 것입니다.”

상담자의 말을 들은 부모는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데 지금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당연히 우수해야만 한다”는 이 부모의 가치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그 뒤로 부모는 오로지 초등학교 시절의 그 착했던 아이로 되돌릴려고만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반항은 점점 도를 더해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들이 집으로 찾아 와 아이를 체포해 갔습니다. 아이가 그동안 환각제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부모는 그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점차 냉정을 되찾은 아버지는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아이를 만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아버지가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너를 지켜 줄테니까 염려하지 말라.”

나중에 이 아이는 편지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했던 한 마디의 말이 나에게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마음 속 깊이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말로 다시 일어서겠노라는 마음으로 맹세했습니다.”

‘스즈끼 히데오’라는 사람이 쓴 “고맙구나, 네가 내 아이라서”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동안 이 부모는 아이를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행위만을 강조하면서 그 행위 때문에 아이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 운동 모두 잘하는 예의 바른 멋진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환각제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고 나서 아버지는 그 아이의 존재 자체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향해서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너를 지켜 주겠다는 말을 한 것은 “너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행위’보다는 ‘존재’ 자체로 내가 소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이 그 아이를 새롭게 깨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부모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살아 왔습니다. 아이의 인생은 대학이든 회사든 모두 일류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 윗세대 역시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아무런 의심없이 그런 생각을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반항을 하고 결국 경찰에 체포되는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우리는 체면치례식의 인생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아이 덕분에 정말 소중한 것에 눈을 뜰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철학이나 기독교 사상을 공부하게 되면 반드시 존재냐 행위냐 라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Being’이냐 ‘Doing’이냐 하는 점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내 아이라서 고맙다”
“네가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네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존재, 즉 ‘Being’의 개념입니다. 그 반대로

“네가 공부를 잘하니까 예쁘다.”
“네가 일류대학 들어갔기 때문에 고맙다.”
“네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 주어 고맙구나”
“지위나 명예를 얻어서 기쁘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행위, 즉 ‘Doing’의 측면에서 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행위, 즉 ‘Doing’의 측면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도움을 주고 편안하게 살게 하지만 언젠가는 쓸모없는 때가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임종을 앞두고 있는 사람한테 ‘Doing’의 의미들이 중요할까요?

에리히 프롬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소유나 존재냐”라는 책에서 ‘Being’과 ‘Doing’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노래나, 종교나 모두 사랑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소유욕으로 인해 사랑과 정을 목말라 합니다.

우리들의 소유욕은 끝이 없습니다. 이제 그 소유욕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속성이 되어 버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더 이상 나누어 줄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는 서먹서먹해지고 고립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고립감과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또 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양식을 ‘소유양식’이라고 말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소유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까지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소유해야만 한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유양식’에 반대되는 것으로 ‘존재양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존재양식’은 어떤 사람이나 물질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순수한 삶의 기쁨을 알고 주는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소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의 인생 목표가 소유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도 우리가 소유나 존재냐 둘 중의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소유입니까? 존재입니까? 우리가 행위, 곧 Doing 자체에 중점을 둔다면 그것은 소유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에 삶의 무게를 둔다면 그 사람은 존재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무슨 일을 했기 때문에, 무엇을 잘했기 때문에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착한 일을 해서, 네가 신앙 생활을 잘 해서, 네가 기도를 잘 해서, 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에…그런 이유로 나를 보고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그가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 하신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냥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내 자녀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냥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보면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갓난 아기를 쳐다 보고 있노라면 그 아기가 지금 내 아이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그저 행복해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43장에서도 존재 자체의 소중함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설하고 계십니다.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 하나님이 4절에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온 천하와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뭐가 잘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의롭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장 27절에도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시는 것이지 무슨 의로운 행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내 아이라서’ 그냥 기쁘고 좋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사랑받고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존재 자체에 대해 인정을 받을 때 마음의 문이 열리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존재, 곧 Being 그 자체로 감사하고 고맙다면, 다시 말해서 그저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사랑스럽다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행위, 곧 Doing은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그저 고맙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던 간에 그것보다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그렇게 기쁘고 감격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을 믿을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혹시 배우자를 바라보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 보다는 행위로 인한 평가가 내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의 자녀를 바라보면서도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보다는 그 아이가 했던 성적이나 결과물로만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았냐는 말씀입니다.

혹시 ‘이렇게 해 주었으면…’,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행위에 관심을 늘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가는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은 부모들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고정관념을 깨줌으로 인해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 주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자식의 은혜를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식이 지금 내 자식이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부모 말을 좀 안들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저 감사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착각하지 마십시오. 가정은 부모의 뜻에 맞는 좋은 아이를 제조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름대로의 인생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가장 합당한 달란트를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뜻대로 기르려 할 것이 아니라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자식을 바라보면 결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바라 봐야 그때서야 존재 자체로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실제 제 아내에게 실습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집안일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꼭 그래서 좋은 것이 아니고 나는 그저 당신이 내 아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저 고맙고 감사해! 나같은 사람하고 같이 살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그랬더니 제 아내가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아! 이 감격!”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돈이 많아야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니고, 집 평수가 넓어야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존재 자체로 감사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감사와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고맙구나, 네가 내 아이라서”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뇌종양에 걸린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불치병에 걸려 날마다 누워있다면 그 가정의 분위기가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실은 가장 큰 축복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저도 똑같이 느낀 생각이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고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겨우 열일곱살에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이.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한을 남긴다고 했습니다만 이 아이는 죽으면서 부모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을 남겼습니다.

뇌종양에 안면 마비까지 와서 완전히 지쳐버린 아들. ‘어떻게 하든 낫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이 있었지만 결국 그 아들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 아들이 손으로 사력을 다해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엄마. 결국 효도도 못하고, 정말 미안해요.”

엄마는 이 아들이 쓴 ‘결국’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아, 이 아이가 이제 가망이 없구나. 애미인 나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엄마가 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해 줍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글로 써 가면서 사랑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바로 네가 내 아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정말로 행복했단다. 이렇게 멋진 아들을 주셨잖니? 엄마는 누구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란다. 천국에 먼저가면 엄마랑 우리 가족에 대해 하나님께 잘 말해 주렴. 그리고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아들은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습니다. 안면이 마비되면서 눈물이 안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아들은 엄마가 쓰고 말해 준 그 사랑의 말을 보고는 고개를 깊게 끄덕이면서 가슴을 헉헉거리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나오지는 않아도 흐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 생각을 원망도 분노도 아닌 ‘고맙습니다’라는 감사를 실어 전달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죽어가면서 진정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엄마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슬픔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준 것입니다.

이 아들은 호스피스에 들어간지 5개월 반만에 어머니의 간병을 받으며 그 품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으로 완결된 그의 인생을 어머니는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고 그러하시듯이 그저 기뻐하시고 그저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 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불어 내 옆에 있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부모,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 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고, 이런 말을 했고, 과거가 어떠하고 현재가 어떠해서… 이런 등등의 조건들을 다 버리시고, 그저 그 사람이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 네가 내 아들이라서 고맙구나.”
“그래. 당신이 내 아내라는 것 자체로 나는 감사해.”
“그래. 저 분이 나의 부모님이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그저 감사해!”

지금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 마음을 주십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기뻐하시듯이 우리들도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을 바라 보면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사랑을 거듭 회복하면서 감격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추부길 목사(웰빙교회 담임목사,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