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은 어떤 사물이 이용하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이 가면 인도요, 차가 다니면 차도, 기차가 달리면 철로 그리고 비행기가 날면 항로라 한다.
비행 스케줄에 따라 뉴욕을 들리시면 꼭 저희 교회를 방문하셔서 교제를 나누시는 모 항공사의 기장님이 계신다.
한번은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을 드린 일이 있다.
“기장님! 일기가 나쁘면 하늘높이 상공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기장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 네, 목사님! 그때는 기도합니다.”
잠깐 동안 제가 당황스러웠고 무안했었다.
저는 영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시느냐고 여쭤본 게 아니고 육적으로 어떤 비행기술을 통해 특별한 조취를 취하시느냐고 여쭈어 보았기 때문이다.
저는 “아 그렇군요. 기장님, 믿음이 참 좋으십니다.”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으나 분명 나의 질문의 의도가 그것은 아니었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여쭈어 보았다. “기장님, 비행술에 대해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기장님도 그제야 눈치를 채시고 어린아이처럼 쑥스러워 하시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아! 네, 그땐 그냥 공중에서 선회를 하며 착륙할 기회를 찾습니다. 물론 다 기계가 합니다.”
저도 비행 조종실에 들어가 구경할 기회가 있었으나 온갖 기계들로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다.
생각보다 공간이 너무 좁다고 느껴졌고 창문 또한 답답할 만큼 크지 않았으며 또한 거울을 본 기억이 없다.
즉 비행을 위한 조정은 창문의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거울을 또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장님이 비행 중에 기도하신 다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반면에 우리가 자주 이용하여 현대인에게는 “발”이라고 여겨지는 자동차안에는 여러 개의 거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에 Back Mirror(후 시경) 와 Side Mirror가 있다. 그러나 그 거울들의 역할과 기능은 옆으로 가거나 뒤로 후진을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안전하게 앞으로 전진하기위한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잠시 잠깐 힐끗 힐끗 적당히 보면서 운전해야지 계속 오랫동안 고정하고 바라보았다가는 오히려 큰 사고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2006년 이라는 한 해를 “길”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뒤를 잠시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도 내다 봐야 하는 귀하고 복된 갈림 길에 서 있다.
지난 일년을 뒤 돌아보는 것은 다가오는 새해를 설계하고 준비하는데 필요한 유익하고 좋은 일이지만 과거에 집착하고 붙잡혀 오래 동안 계속해서 뒤 돌아 본다면 도리어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광야라는 인생길에서 과거 망상에 사로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승승장구하는 한 해였다고 자부한다면 감사함으로 더욱 겸손히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새해를 준비해야 할 것이요.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다면 이 시간 이 경점에서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다만 거울로 교훈을 삼아 새해를 준비해야 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실수하고 범죄 한 잘못 된 일들은 철저히 회개하고 나아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고칠 것은 새롭게 고치는 결단의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또 “내 모습 이대로 좋사오니” 하고 그릇된 행실을 가지고 물레방아 도는 인생처럼 새해를 맞이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아침에 신을 신고 나간 그대로 벗어 놓을 수 있는가?”라는 말이 있다.
"밤새 안녕" 이란 인사 말과 같이 “예측 불허”의 캄캄한 인생길이란 말이다.
어제 밤에 현관에 벗어 놓은 신을 신고 다음 날 자신 있게 일터에 나갈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은혜와 감사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 일게다.
길을 걷거나 운전을 하다보면 복잡한 교차로를 만나 당황하게도 되고 때로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 되 돌아 나가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한다. 그런가하면 양방향 도로도 있고 일방통행을 해야만 하는 도로도 있는데 거꾸로 역주행을 했다가는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아무리 급하고 답답해도 빨간 적 신호등앞에서는 반드시 정차해야 만하고 버스나 기차는 중간 중간 내리는 정류(거)장도 있으며 마지막 종착역도 있는데 자기가 내려야할 곳을 정확히 알아서 승차하고 하차해야 한다.
차도에 사람이 뛰어들어서도 안되고 인도에 차량이 달려들어서도 안됨은 물론이다.
방어운전이란 말이 있듯이 나만 잘 한다고 될일도 아니니 더욱 난감할 뿐이다.
이렇듯 인생길은 험난을 예고하고 있기에 “오늘도 또 신을 신네요, 오늘이란 하루 길을 잘 보내고 지내었습니다.”를 하루, 하루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요 축복이리라.
구원받은 백성들이 가는 길은 영광의 “천성 길”이므로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하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이다.
성경은 큰 문(길)이 있고 좁은 문(길)이 있다고 소개한다.
큰 문(길)은 쉬우나 멸망의 길이요 좁은 문(길)은 어려우나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고 소개하셨다. 그리고 그 길은 곧 진리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방편이 되신다고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루가 가듯 그렇게 빨리 흘러가 버린 저무는 한 해 끝자락인 종착 점에 다가 왔으며 새해를 시작하는 시발 점 앞에 서 있다.
불행했던 과거는 주님이 걸으셨던 골고다 십자가 길에 다 묻어버리고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도전하는 거룩한 결단이 있어야 하겠다.
“믿음 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길의 기능은 또한 어떤 목적지로 안내하는 통로라고도 하겠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의 통로가 되셨듯이 우리도 교회에는 부흥의 통로요 이웃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뉴욕 정원교회 주효식 목사
사람이 가면 인도요, 차가 다니면 차도, 기차가 달리면 철로 그리고 비행기가 날면 항로라 한다.
비행 스케줄에 따라 뉴욕을 들리시면 꼭 저희 교회를 방문하셔서 교제를 나누시는 모 항공사의 기장님이 계신다.
한번은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을 드린 일이 있다.
“기장님! 일기가 나쁘면 하늘높이 상공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기장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 네, 목사님! 그때는 기도합니다.”
잠깐 동안 제가 당황스러웠고 무안했었다.
저는 영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시느냐고 여쭤본 게 아니고 육적으로 어떤 비행기술을 통해 특별한 조취를 취하시느냐고 여쭈어 보았기 때문이다.
저는 “아 그렇군요. 기장님, 믿음이 참 좋으십니다.”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으나 분명 나의 질문의 의도가 그것은 아니었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여쭈어 보았다. “기장님, 비행술에 대해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기장님도 그제야 눈치를 채시고 어린아이처럼 쑥스러워 하시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아! 네, 그땐 그냥 공중에서 선회를 하며 착륙할 기회를 찾습니다. 물론 다 기계가 합니다.”
저도 비행 조종실에 들어가 구경할 기회가 있었으나 온갖 기계들로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다.
생각보다 공간이 너무 좁다고 느껴졌고 창문 또한 답답할 만큼 크지 않았으며 또한 거울을 본 기억이 없다.
즉 비행을 위한 조정은 창문의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거울을 또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장님이 비행 중에 기도하신 다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반면에 우리가 자주 이용하여 현대인에게는 “발”이라고 여겨지는 자동차안에는 여러 개의 거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에 Back Mirror(후 시경) 와 Side Mirror가 있다. 그러나 그 거울들의 역할과 기능은 옆으로 가거나 뒤로 후진을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안전하게 앞으로 전진하기위한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잠시 잠깐 힐끗 힐끗 적당히 보면서 운전해야지 계속 오랫동안 고정하고 바라보았다가는 오히려 큰 사고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2006년 이라는 한 해를 “길”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뒤를 잠시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도 내다 봐야 하는 귀하고 복된 갈림 길에 서 있다.
지난 일년을 뒤 돌아보는 것은 다가오는 새해를 설계하고 준비하는데 필요한 유익하고 좋은 일이지만 과거에 집착하고 붙잡혀 오래 동안 계속해서 뒤 돌아 본다면 도리어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광야라는 인생길에서 과거 망상에 사로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승승장구하는 한 해였다고 자부한다면 감사함으로 더욱 겸손히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새해를 준비해야 할 것이요.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다면 이 시간 이 경점에서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다만 거울로 교훈을 삼아 새해를 준비해야 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실수하고 범죄 한 잘못 된 일들은 철저히 회개하고 나아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고칠 것은 새롭게 고치는 결단의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또 “내 모습 이대로 좋사오니” 하고 그릇된 행실을 가지고 물레방아 도는 인생처럼 새해를 맞이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아침에 신을 신고 나간 그대로 벗어 놓을 수 있는가?”라는 말이 있다.
"밤새 안녕" 이란 인사 말과 같이 “예측 불허”의 캄캄한 인생길이란 말이다.
어제 밤에 현관에 벗어 놓은 신을 신고 다음 날 자신 있게 일터에 나갈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은혜와 감사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 일게다.
길을 걷거나 운전을 하다보면 복잡한 교차로를 만나 당황하게도 되고 때로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 되 돌아 나가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한다. 그런가하면 양방향 도로도 있고 일방통행을 해야만 하는 도로도 있는데 거꾸로 역주행을 했다가는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아무리 급하고 답답해도 빨간 적 신호등앞에서는 반드시 정차해야 만하고 버스나 기차는 중간 중간 내리는 정류(거)장도 있으며 마지막 종착역도 있는데 자기가 내려야할 곳을 정확히 알아서 승차하고 하차해야 한다.
차도에 사람이 뛰어들어서도 안되고 인도에 차량이 달려들어서도 안됨은 물론이다.
방어운전이란 말이 있듯이 나만 잘 한다고 될일도 아니니 더욱 난감할 뿐이다.
이렇듯 인생길은 험난을 예고하고 있기에 “오늘도 또 신을 신네요, 오늘이란 하루 길을 잘 보내고 지내었습니다.”를 하루, 하루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요 축복이리라.
구원받은 백성들이 가는 길은 영광의 “천성 길”이므로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하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이다.
성경은 큰 문(길)이 있고 좁은 문(길)이 있다고 소개한다.
큰 문(길)은 쉬우나 멸망의 길이요 좁은 문(길)은 어려우나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고 소개하셨다. 그리고 그 길은 곧 진리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방편이 되신다고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루가 가듯 그렇게 빨리 흘러가 버린 저무는 한 해 끝자락인 종착 점에 다가 왔으며 새해를 시작하는 시발 점 앞에 서 있다.
불행했던 과거는 주님이 걸으셨던 골고다 십자가 길에 다 묻어버리고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도전하는 거룩한 결단이 있어야 하겠다.
“믿음 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길의 기능은 또한 어떤 목적지로 안내하는 통로라고도 하겠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의 통로가 되셨듯이 우리도 교회에는 부흥의 통로요 이웃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뉴욕 정원교회 주효식 목사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