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전해오는 말 가운데 “세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俗談)이 있다.
“왜 세살부터인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여든까지 인가?”를 고민할 것 없이 단순히 생각해서 “한번 길들인 버릇은 오랫동안 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만큼 어떤 버릇과 습관을 처음부터 갖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정도의 의미부여를 하면 된다.
“이 속담은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할 만큼 꼭 들어맞는 습관 즉 버릇이 하나 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귀를 잡고 주물럭거려야만 잠을 자고 마음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애정결핍증” 이라고도 했다.
어째든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후에는 사람만 보면 누구든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잡아대기 시작했다.
형이나 누나들은 용납할리가 없었다.
손만 올라가면 바로 손바닥으로 징계를 하며 못된 버릇 고치라고 야단이었다.
어떤 때는 자를 준비했다가 칼같이 징계를 가했을 땐 정말 서러워 눈물을 흘릴정도로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저 만만한 어머니 귀만 열심히 주물러대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주물러 꼬집었는지 어머니 귀가 다 짓물러 터질 정도였다. 그래야만 하는 나도 참 딱하지만 그런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처절히 고난을 당하시고만 계신 우리 엄니도 참 딱하신 분이시다.
역시 “엄마는 엄마셨다”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또 있을까?
정말 양같이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럼 이제 나이 들어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어서는 어떨까?
사실 부끄러운 나의 버릇이지만 칼럼란에서는 벌거벗기로 작정한 만큼 자진고백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도 아내와 자녀들의 귀를 계속 만지는 버릇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하다.
그러나 어머니처럼 편안하게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러터지는 것은 고사하고 손만 갖다대도 짜증과 함께 날카로운 눈초리로 공포 분위가 금방 조성이 된다.
그때마다 애정 결핍증에 몸부림을 치며 어머니를 불러 본다. 아니 정말 어머니가 보고 싶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다반사로 사용하는 말 가운데 말 그대로 마음에도 없는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들이 있는데 가령 “언제 한번 식사 대접을 해야 할 텐데요.”라든지 “조만간 한번 찾아뵈어야 할 텐데요.” 그냥 실천 하던지 아니면 수첩을 꺼내들고 아예 약속을 하면 될 일이지 “...할텐데,”, “...할텐데,”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특히 잘못된 언어습관 가운데 말끝마다 " 이래서 죽겠다" "저래서 죽겠다" 하는 경우도 좋은 예라 하겠다.

성경에도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에서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 같습니다”는 인사는 아무래도 야곱의 인격이나 근성으로 볼 때 아부 성 인사라고 느껴지는 반면에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을 대면하였을 때 “우리들의 생명을 보존키 위해 하나님이 당신들 먼저 나를 애굽에 보내었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역시 요셉의 성품상 용서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나의 그릇된 선입견일 수도 있음을 전재하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또한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위해 접근해서 “랍비여” 인사하며 입을 맞추는 장면은 특히 구역질나는 수작의 극치라 하겠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신앙생활가운데서 잘못된 습관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지난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알 수 있었다.

교회생활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주여!" “할렐루야” “아멘” “믿습니다.” 등도 흔히 접하는 용어들이다.
또는 설교자나 인도자가 강요하다시피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를 마음의 깊은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의 전달 없이 남발하게 하는 일등도 주의해야할 일이 아닐까?
그러한 강요된 인사에 지금까지 감동받아 본 일이 전혀 없고 오히려 분위기만 썰렁할 뿐이었음을 늘 느껴왔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치레요, 겉치레가 된다면 결국 마음에도 감동도 없는 말장난, 말 유희(遊戱)에 불과하다고 어찌 아니하겠는가?
특히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면 “다 하나님의 뜻 이지요”라는 말이다.
때론 이상하게 같은 문제와 상황을 가지고 있는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하지 않은 각각 다른 결과가 어찌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지도 분명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주장정도가 아니라 거의 우기는 수준이라면 지나친 표현이 될까?
자신의 숨겨둔 의도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한 것은 아닌지?

누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교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 내리는 만큼 가장 큰 피해와 희생을 당한 "순교자"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앵무새의 반복되는 “안녕 하세요”인사를 듣는 다거나 돌고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 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정도 없이 거듭되고 반복되는 조련과 먹이에 눈이 먼 잔재주에 불과할 뿐이기에 다만 “고놈 재주가 좋구나.”할뿐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그와 같이 가벼운 잔재주 수준이어서야 되겠는가?

이제라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신경 좀 써보자.
과연 무엇이, 어떤 말이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감동이나 진심이 없이 단순히 습관과 버릇처럼 반복하는 잘못된 일상을 살아왔는지, 그것도 그릇 되었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그렇다고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버릇이나 습관을 도리어 좋은 습관과 거룩한 버릇이 되도록 바꾸는 노력과 시도가 필요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주위에서 우리교회와 사역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인사를 들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우리교인들의 땀과 수고 그리고 희생하는 아름다운 헌신의 결과입니다.” 라고

뉴욕정원교회 주효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