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몇 년 전, 대만 선교 집회를 인도 할 때의 일이다. 구정 순회 집회라 해발 3천m가 넘는 산 속에 사는 부족에서부터 평지로 내려와 사는 부족에 이르기까지 대만 전 지역에 흩어져 사는 원주민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연일 계속 되는 이동과 집회는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음식 문제였다. 선교지에서는 당연히 선교지의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한국을 떠나기 전 준비해간 김치, 고추장, 김 등이 있어 그나마 잘 마칠 수 있었다. 늘 먹던 우리의 음식에 대한 감동이 별로 없었던 우리 일행이 이국 땅에서 먹게된 김치의 맛은 지금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특히 김치의 독특한 맛은 그들 음식의 향과 느끼함을 일순간에 걷어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김치는 또 하나의 선교 멤버 중 하나였다.
이런 김치(Kimchi)가 얼마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아마 김치 역사상 세계에 이때처럼 그 이름이 높게 평가되며 알려진 적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것이 땅에발이 묶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지만 김치만큼은 하늘을 날아 세계 곳곳으로 이민(?)을 갔다.
중국 광동성에서 시작되어 전염되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증후군)에 의해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한국만큼은 거의 안전지대나 다름없었다. 전 세계는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고 결국 한국이 사스로부터 안전한 것은 다름 아닌 김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사스로 두려워 벌벌 떨며 마스크에 의존했던 중국 사람들이 한인 식당들을 찾아와 김치를 먹는 일이 발생했다.
사실 김치는 3천년 전 중국 문헌 '시경'에 김치에 대한 글이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음식임을 짐작 할 수 있다. 물론 그 때는 김치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말로는 '지'(물에 담근다), 중국어로는 '저'(菹)라고 불리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의 의미로 '침채(沈菜)를 거처 '딤채'로 불리고 나중에는 구개음화현상으로 '짐치'(沈漬 가라앉음)가 되어 불리다가 오늘날의 '김치'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문헌으로 보아 중국인들도 김치를 먹었으나 그들은 김치를 더 발전시키지 않은 듯 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김치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 같이 고춧가루, 파, 마늘, 각종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아니다.
물론 1712년 김창업이 쓴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수출되었다는 흔적은 있으나, 사스의 공포를 타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김치가 수출된 적은 없었다. 여기에 우리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사실 김치류는 우리 한국과 함께 중국 일본에서 모두 만들어 먹는 음식인데, 사스라는 괴질 앞에 유독 한국 김치만이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는데 뿌듯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지'(장아찌 종류)라는 김치의 처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김치가 처음부터 고춧가루가 들어간 빨간 김치가 아니었는데, 조선 중엽에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고추를 음식에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늘의 김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발견된다. 비록 당시에는 이 땅에서 나는 '신토불이'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환경에 잘 적응시키고 우리의 것 화(化)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고춧가루를 우리보다 먼저 식용했던 일본은 그것을 퓨전(fusion)화 시키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음식 맛과 멋이 있지만 다양성을 하나로 만들어 활용하는 지혜는 우리 민족이 그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온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우리만이 창조할 수 있는 맛과 멋 그리고 향을 이룬 음식문화가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마늘은 어떤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늘의 원산지도 한반도가 아니다. 물론 마늘과 쑥을 먹고 여인이 된 곰이 등장하는 단군신화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일 뿐, 마늘의 원산지는 중앙 아시아와 이집트로 추정된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쌓은 노예들에게 마늘을 먹게 하였다. 계속하여 부려먹기 위한 스태미너의 증강을 위해서였다. 이런 마늘이 어떤 경유로 한반도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제 마늘을 많이 먹기로 소문난 민족이 되었고, 김치 속에 마늘이 들어가 김치를 더욱 빛내며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음식이 된 것이다.
역사학자 마귈론 투생-사마(Maguelonne Toussaint-Samat)는 「먹거리의 역사」를 쓰면서 트루몰리에르, 「일반 백과사전」, 제1권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베트남 사람은 '30년 동안의 전쟁과 식민 지배에 시달리고 난 지금, 우리가 아직도 한 민족으로 남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음식문화뿐이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벌어와서 어머니가 준비한 식사는 가족을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그런 결속을 통하여 인간을 내적으로 안정시켜주고 사회의 문명을 이룩하도록 해주는 부모의 역할을 인식하게 된다. 치즈, 포도주, 돼지고기 가공식품을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옛 역사가 정체가 확실하지도 않고 비틀거리고 하는 과학 때문에 잊혀져서는 안된다."
그렇다. 우리 민족에 깊이 뿌리내린 음식문화를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먹는 먹거리만큼은 그 민족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의 김치가 바로 그렇다. 우리의 식성과 식탁에서 아무리 빼앗고 뽑아 버리려고 해도 뽑아지지 않는 것이 김치다. 해외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늙어서는 김치를 다시 찾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6세 이전에 먹었던 음식 맛을 평생 기억한다고 한다. 잠시 다른 나라 음식을 찾아 먹고 살았다해도 결국에는 태어나면서 부모를 통해 먹었던 음식을 찾게 된다고 한다. 김치가 그렇고 고추장이 그렇고 고약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진동하는 청국장이 그렇다. '귀소본능'(歸巢本能)처럼, '귀식본능'(歸食本能)이라고나 할까.
이런 김치를 보면서 김치같은 삶을 동경해 본다. 너무나 각박하고, 자기만 아는 시대라 그런지 햄버거 집에서 감자 튀김을 토마토 캐찹에 찍어 먹는 모습의 삶이 왠지 메마른 삶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정감이 없고 인간미가 튀지 않는다. 뭘 먹어도 옷에 튈 것 없는 패스트푸드의 일상은 너무 건조해 보인다.
고춧가루 더덕더덕 붙어 붉디붉은 김치를 두 손으로 죽죽 찢어가며 먹다보면 어느새 턱 밑 옷깃에 튀어서는 푹 배어 꽃무늬를 이룬 김치 국물들을 서로 바라보면서 까르르 웃어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정겹고 행복한가. 이렇게 김치는 모든 식탁에 항상 오른다. 가정 집 식탁이나 각종 식당 식탁이나 호텔 뷔페 등 어느 식탁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 김치는 누구나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환영하는 꼭 있어야 하는 음식이다.
그런가 하면 가난하던 시절과 힘겨운 시절에도 김치만은 늘 함께 했다. 그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가난한 사람의 배를 채우고, 지친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런 김치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함께 했다. 모든 야채가 사라진 자리에 김치만이 유일한 야채로 남아 부족해질 수 있는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를 채워주는 훌륭한 식품이었다.
이런 김치같은 사람이 그립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며 함께 하겠느냐는 결혼 서약처럼, 김치는 언제나 함께 하며 그 약속을 지켰다. 오늘날 저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선택하는 시대에 진정 필요한 소금같은 사람은 말 그대로 김치맨이다. 김치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항상 함께 하며 위로와 겪려가 되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는 사람, 언제나 만나고 싶고 환영하고 싶은 사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며 즐거워하는 사람,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아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 김치같은 사람. 예수님은 김치같은 분이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곁에 항상 계셨으며, 모든 사람들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환영하시며 사랑하셨다. 모두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시며 자신을 먹으라고 다 내어 주셨다. 가난하고 지친 사람들, 삶이 고단하여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동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 그분은 진정한 김치맨이셨다.
김치는 입맛을 돋우는데도 일품이다. 각종 양념으로 버무려 푹 익은 김치는 다른 반찬 없어도 밥 한 그릇 거뜬히 해치우게 한다. 그리고도 입안에서 혀 속으로 파고드는 감칠맛이 진하게 남는다. 여운되어 남아 기억되게 하는 맛이란 여간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살 맛 나는 삶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다. 나의 것을 줌으로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고, 다시 살수 있다는 용기를 되찾는다면, 이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축복된 일이 아닌가. '당신 때문에 살맛이 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나눔을 가진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또 만나고 싶어 늘 기억되는 사람, 감칠맛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향기 진동하는 아름다운 삶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오래 기억되면서 멀리 있어도 늘 그리우며 그 마음에 여운으로 남는 사람, 비록 남들처럼 세상의 금은보화 부귀영화 얻지 못하였어도 작은 것일지라도 함께 나누며 살아온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김치처럼 늘 있으면서도 있는지 없는지, 티내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늘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 때론 왜 사람이 이래하며 사나운 젓가락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불평 한 마디 없는 사람, 타인의 삶에 존재함으로 그 보람을 느끼며 노래하는 사람, 효모, 세균, 곰팡이 등에 의해 온 몸이 분해되며 으스러져도 자신을 통해 건강한 삶, 유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 골고다 언덕에서 온 몸이 십자가에 달린 채, 채찍과 가시관으로 으스러지면서도 기뻐했던 사람 예수님, 그는 그랬다. 자신의 온 몸을 내어 줌으로 세상 사람이 생명을 얻으며 참된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했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누군가를 위해 불사르는 사람이 없는 오늘에 가장 그리운 사람, 김치같은 김치맨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 5장 13)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태복음 26:2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모처럼 카메라 앞에선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웃으라며 '김치이∼'하라고 한다. 모두 '김치이∼'하며 흰 이를 활짝 드러낸 김치맨이 된다. 그래, 김치하면 웃는 얼굴이 된다. 그 얼굴들이 모여 웃는 세상을 만들고 거기엔 언제나 김치맨이 있다. '김치이∼'.
글/ 계인철(안산 초원침례교회 담임목사 E-mail:kye0191@hanmail.net)
그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음식 문제였다. 선교지에서는 당연히 선교지의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한국을 떠나기 전 준비해간 김치, 고추장, 김 등이 있어 그나마 잘 마칠 수 있었다. 늘 먹던 우리의 음식에 대한 감동이 별로 없었던 우리 일행이 이국 땅에서 먹게된 김치의 맛은 지금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특히 김치의 독특한 맛은 그들 음식의 향과 느끼함을 일순간에 걷어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김치는 또 하나의 선교 멤버 중 하나였다.
이런 김치(Kimchi)가 얼마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아마 김치 역사상 세계에 이때처럼 그 이름이 높게 평가되며 알려진 적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것이 땅에발이 묶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지만 김치만큼은 하늘을 날아 세계 곳곳으로 이민(?)을 갔다.
중국 광동성에서 시작되어 전염되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증후군)에 의해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한국만큼은 거의 안전지대나 다름없었다. 전 세계는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고 결국 한국이 사스로부터 안전한 것은 다름 아닌 김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사스로 두려워 벌벌 떨며 마스크에 의존했던 중국 사람들이 한인 식당들을 찾아와 김치를 먹는 일이 발생했다.
사실 김치는 3천년 전 중국 문헌 '시경'에 김치에 대한 글이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음식임을 짐작 할 수 있다. 물론 그 때는 김치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말로는 '지'(물에 담근다), 중국어로는 '저'(菹)라고 불리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의 의미로 '침채(沈菜)를 거처 '딤채'로 불리고 나중에는 구개음화현상으로 '짐치'(沈漬 가라앉음)가 되어 불리다가 오늘날의 '김치'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문헌으로 보아 중국인들도 김치를 먹었으나 그들은 김치를 더 발전시키지 않은 듯 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김치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 같이 고춧가루, 파, 마늘, 각종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아니다.
물론 1712년 김창업이 쓴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수출되었다는 흔적은 있으나, 사스의 공포를 타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김치가 수출된 적은 없었다. 여기에 우리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사실 김치류는 우리 한국과 함께 중국 일본에서 모두 만들어 먹는 음식인데, 사스라는 괴질 앞에 유독 한국 김치만이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는데 뿌듯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지'(장아찌 종류)라는 김치의 처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김치가 처음부터 고춧가루가 들어간 빨간 김치가 아니었는데, 조선 중엽에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고추를 음식에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늘의 김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발견된다. 비록 당시에는 이 땅에서 나는 '신토불이'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환경에 잘 적응시키고 우리의 것 화(化)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고춧가루를 우리보다 먼저 식용했던 일본은 그것을 퓨전(fusion)화 시키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음식 맛과 멋이 있지만 다양성을 하나로 만들어 활용하는 지혜는 우리 민족이 그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온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우리만이 창조할 수 있는 맛과 멋 그리고 향을 이룬 음식문화가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마늘은 어떤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늘의 원산지도 한반도가 아니다. 물론 마늘과 쑥을 먹고 여인이 된 곰이 등장하는 단군신화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일 뿐, 마늘의 원산지는 중앙 아시아와 이집트로 추정된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쌓은 노예들에게 마늘을 먹게 하였다. 계속하여 부려먹기 위한 스태미너의 증강을 위해서였다. 이런 마늘이 어떤 경유로 한반도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제 마늘을 많이 먹기로 소문난 민족이 되었고, 김치 속에 마늘이 들어가 김치를 더욱 빛내며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음식이 된 것이다.
역사학자 마귈론 투생-사마(Maguelonne Toussaint-Samat)는 「먹거리의 역사」를 쓰면서 트루몰리에르, 「일반 백과사전」, 제1권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베트남 사람은 '30년 동안의 전쟁과 식민 지배에 시달리고 난 지금, 우리가 아직도 한 민족으로 남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음식문화뿐이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벌어와서 어머니가 준비한 식사는 가족을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그런 결속을 통하여 인간을 내적으로 안정시켜주고 사회의 문명을 이룩하도록 해주는 부모의 역할을 인식하게 된다. 치즈, 포도주, 돼지고기 가공식품을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옛 역사가 정체가 확실하지도 않고 비틀거리고 하는 과학 때문에 잊혀져서는 안된다."
그렇다. 우리 민족에 깊이 뿌리내린 음식문화를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먹는 먹거리만큼은 그 민족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의 김치가 바로 그렇다. 우리의 식성과 식탁에서 아무리 빼앗고 뽑아 버리려고 해도 뽑아지지 않는 것이 김치다. 해외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늙어서는 김치를 다시 찾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6세 이전에 먹었던 음식 맛을 평생 기억한다고 한다. 잠시 다른 나라 음식을 찾아 먹고 살았다해도 결국에는 태어나면서 부모를 통해 먹었던 음식을 찾게 된다고 한다. 김치가 그렇고 고추장이 그렇고 고약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진동하는 청국장이 그렇다. '귀소본능'(歸巢本能)처럼, '귀식본능'(歸食本能)이라고나 할까.
이런 김치를 보면서 김치같은 삶을 동경해 본다. 너무나 각박하고, 자기만 아는 시대라 그런지 햄버거 집에서 감자 튀김을 토마토 캐찹에 찍어 먹는 모습의 삶이 왠지 메마른 삶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정감이 없고 인간미가 튀지 않는다. 뭘 먹어도 옷에 튈 것 없는 패스트푸드의 일상은 너무 건조해 보인다.
고춧가루 더덕더덕 붙어 붉디붉은 김치를 두 손으로 죽죽 찢어가며 먹다보면 어느새 턱 밑 옷깃에 튀어서는 푹 배어 꽃무늬를 이룬 김치 국물들을 서로 바라보면서 까르르 웃어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정겹고 행복한가. 이렇게 김치는 모든 식탁에 항상 오른다. 가정 집 식탁이나 각종 식당 식탁이나 호텔 뷔페 등 어느 식탁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 김치는 누구나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환영하는 꼭 있어야 하는 음식이다.
그런가 하면 가난하던 시절과 힘겨운 시절에도 김치만은 늘 함께 했다. 그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가난한 사람의 배를 채우고, 지친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런 김치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함께 했다. 모든 야채가 사라진 자리에 김치만이 유일한 야채로 남아 부족해질 수 있는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를 채워주는 훌륭한 식품이었다.
이런 김치같은 사람이 그립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며 함께 하겠느냐는 결혼 서약처럼, 김치는 언제나 함께 하며 그 약속을 지켰다. 오늘날 저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선택하는 시대에 진정 필요한 소금같은 사람은 말 그대로 김치맨이다. 김치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항상 함께 하며 위로와 겪려가 되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는 사람, 언제나 만나고 싶고 환영하고 싶은 사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며 즐거워하는 사람,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아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 김치같은 사람. 예수님은 김치같은 분이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곁에 항상 계셨으며, 모든 사람들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환영하시며 사랑하셨다. 모두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시며 자신을 먹으라고 다 내어 주셨다. 가난하고 지친 사람들, 삶이 고단하여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동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 그분은 진정한 김치맨이셨다.
김치는 입맛을 돋우는데도 일품이다. 각종 양념으로 버무려 푹 익은 김치는 다른 반찬 없어도 밥 한 그릇 거뜬히 해치우게 한다. 그리고도 입안에서 혀 속으로 파고드는 감칠맛이 진하게 남는다. 여운되어 남아 기억되게 하는 맛이란 여간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살 맛 나는 삶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다. 나의 것을 줌으로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고, 다시 살수 있다는 용기를 되찾는다면, 이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축복된 일이 아닌가. '당신 때문에 살맛이 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나눔을 가진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또 만나고 싶어 늘 기억되는 사람, 감칠맛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향기 진동하는 아름다운 삶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오래 기억되면서 멀리 있어도 늘 그리우며 그 마음에 여운으로 남는 사람, 비록 남들처럼 세상의 금은보화 부귀영화 얻지 못하였어도 작은 것일지라도 함께 나누며 살아온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김치처럼 늘 있으면서도 있는지 없는지, 티내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늘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 때론 왜 사람이 이래하며 사나운 젓가락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불평 한 마디 없는 사람, 타인의 삶에 존재함으로 그 보람을 느끼며 노래하는 사람, 효모, 세균, 곰팡이 등에 의해 온 몸이 분해되며 으스러져도 자신을 통해 건강한 삶, 유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 골고다 언덕에서 온 몸이 십자가에 달린 채, 채찍과 가시관으로 으스러지면서도 기뻐했던 사람 예수님, 그는 그랬다. 자신의 온 몸을 내어 줌으로 세상 사람이 생명을 얻으며 참된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했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누군가를 위해 불사르는 사람이 없는 오늘에 가장 그리운 사람, 김치같은 김치맨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 5장 13)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태복음 26:2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모처럼 카메라 앞에선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웃으라며 '김치이∼'하라고 한다. 모두 '김치이∼'하며 흰 이를 활짝 드러낸 김치맨이 된다. 그래, 김치하면 웃는 얼굴이 된다. 그 얼굴들이 모여 웃는 세상을 만들고 거기엔 언제나 김치맨이 있다. '김치이∼'.
글/ 계인철(안산 초원침례교회 담임목사 E-mail:kye0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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