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되새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것 같은 생각이 우리를 자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을 돌아보며 사랑의 마음을 전하려고 애를 쓴다. 멀리 아프리카나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시작해서 북한 동포를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비하면서 그러한 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시각을 좀 더 가까운 곳으로 돌려 바라본다면 지금 등잔불 밑이 너무 어둡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도리인데 문제는 가장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멀리 있는 이웃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느 아내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그이는 요, 교회 집사들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면 그저 헌신적으로 가서 도와주고, 부부싸움 났다하면 밤 12시에도 찾아가서 화해시키고 그러면서요, 정작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저보고 다 알아서 하라고 그래요. 아내인 저는 안중에도 없어요. 우리 부부 약속을 제대로 한번 지켜본 적도 없어요. 내가 아프다고 해도 약 한번 사다준 적도 없어요. 아니, 아내인 저한테는 그렇게 하면서 이웃 사람들한테 잘해주는 그 심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조건들이 몇가지가 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불어 가장 가까운 이웃부터 사랑하려는 흔적들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자신의 배우자부터 사랑의 자취를 남겨야 그 사랑이 사랑으로서 빛이 난다. 부부끼리는 화해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한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심각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건 분명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관심이라는 댓가를 바라는 병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자기 이웃의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질타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까운 이웃부터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바로 눈에 보이는 이웃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자. 먼저 가장 가까운 이웃부터 살펴 보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혹시 없는지, 쓴뿌리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은 없는지, 음행하거나 한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혹시 없는지 돌아보라는 것이다(히 12:15). 이렇게 이웃을 먼저 돌아보고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추부길 목사(한국가정사역연구소장, 안양대 신대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