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만물창고와도 같습니다. “거의 없는 것이 없다”라고 할만합니다. 특히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클릭! 한번하면 추적이 가능합니다.

자료를 찾아 거대한 인터넷 바다를 항해하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면 미리보기라는 코너를 접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맛보기식의 미리보기 코너를 만들어 궁금증을 해소하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관심을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미리보기 코너에 접근했다는 것은 이미 관심사이상의 필요를 느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래도 지난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더욱 궁금히 여기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미래를 소위 예언한다는 신통력이 있다는 사람과 장소는 늘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확하지도 않은 미래에 대처해 보겠다고 끝없이 방황합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나치면 자칫 무당 식 예수를 믿는다는 말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리도 궁금한 것이며 또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인지...

제가 여러분들의 미래를 향해 할 수 있는 분명한 예언이 있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너무 직설적이고 과격한 표현인가요. 아닙니다. 지금부터 죽음을 준비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죽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죽기위해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목적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중에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그 분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아니 자신들의 보장된 미래를 위해서라도 결단코 죽으시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나무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몸에 향유를 부음은 내 장례를 위함이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게 되리라” 라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죽기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암송하던 국민교육헌장에서와 같이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기에 사회에 공헌하고 기여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서 출세도 성공도 해야만 한다는 자기식 해석의 논리를 가지고 피튀기는 전쟁을 불사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미국 땅을 밟고 처음 부임해 섬겼던 교회 목사님의 장례예배를 다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신 목사님을 말씀과 추모사를 통해 소개하며 애석해 하셨습니다.

특히 목회자이신 아버지와 목회자 아들로서의 자신의 관계를 소개하는 추모사가 있었는데 많은 조문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저에게는 남달리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미 소천 하셨으나 목회자이셨던 아버지와 현직 목사인 저, 그리고 저의 아들들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만일 내가 고인이 되어 장례예배를 드릴 때 과연 나를 아는 여러 사람들이 무어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아들이 아빠 목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회상하여 사람들에게 소개할까? 가 더욱 궁금했습니다.

저 강당 앞에 누워계신 목사님이 바로 나라는 생각 하에 말입니다.

제 평생에 기억나는 장례는 아무래도 믿음의 선조이신 할머니의 장례예배라고 기억합니다. 제가 그때 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때인지라 어렴풋 기억이 납니다만 주위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이 어린 제가 그렇게 많이 할머니를 위해서 슬프게 울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유인 즉 어린 유아시절 저는 거의 할머니품안에서 성장하며 그 분이 평소에 흥얼거리시듯 읽어주시고 불러주셨던 성경말씀과 찬송 그리고 기도가 미친 신앙의 영향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장성하여 목사가 되기까지 가장 큰 후원자이셨던 어머님의 장례예배와 불과 몇년 전 죽음을 준비 할 새도 없이 고요히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장례예배.

평소에 늘 입버릇처럼 “나는 자식들에게 죽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도 않고 또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다”고 말씀하시더니 결국 그렇게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셨다가 떠나셨습니다.

멀리 미국에 있던 막내아들인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관속에 누워계신 아버님과 그 앞에 놓인 투박한 성경책과 아버님의 설교 원고들이 적힌 두툼하고 허름한 설교노트가 펼쳐 저 있음을 보았을 뿐입니다.

지금은 저희 가정에 신앙의 조상이신 이 세분이 모두 한 자리에 누워계십니다. 저도 언젠가 그 옆에 한 자리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신앙처럼 우리도 날마다 죽는 연습을 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의 장례예배를 위해 “미리보기”를 한번 “클릭” 해 보시면 어떨까요?

유가족의 입장도 조문객의 입장도 아닌 본인 스스로 관 속에서 도리어 자신을 위해 모인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장례예배말입니다.

뉴욕정원교회(www.nygc.us) 주효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