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 원로 강원용 목사가 17일 소천했다. 그는 일생을 ‘사회통합’에 바친 인물이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운동을 통해 사회의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의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던 고인의 삶은 “중간, 그것을 넘어서 살고자 했던 나는 항상 양극 사이에서 좁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역사의 언덕에서, 한길사)는 고인의 회고에 축약돼 있다.

강원용 목사는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농사꾼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1931년 복음을 받아들이고, 집에서 쫓겨나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신앙을 지켰다.

강원용 목사는 간동 용정 은진중학교 시절 학생회장직과 종교부장직을 겸할 당시, 주위 다섯개 마을에 중학생이 주축이 되는 지역사회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등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 학창시절 항일 민족시인인 윤동주와는 동급생이었는데 강원용 목사는 훗날 “윤동주는 내가 못 쓰는 시를 잘 썼지만, 나는 말을 잘 해서 웅변대회를 휩쓸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강원용 목사가 대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해방 이후 좌우로 나뉘어 극심하게 격돌하는 한국상황을 개탄하면서 양극을 뛰어넘을 방안을 모색하면서부터다. 강원용 목사는 당시 ‘좌우합작운동’을 모색했던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을 보좌하며 일했으나 양극화의 소용돌이는 갈수록 거세졌다.

이에 양극을 극복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 크게 실망하고 뜻있는 젊은이들을 조직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게 된 강원용 목사는 양극화 극복을 원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선린형제단’을 창립하게 된다. 1945년 10월에 창립한 선린형제단은 지금의 경동교회의 시초가 됐다.

강원용 목사는 대화운동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통해 전개하고자 했다. 아카데미 운동이 정식으로 출범한 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는 6대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종교간 대화 모임을 가졌는데 당시 이 모임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종교간의 대화라는 점에서 큰 관심과 함께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 같은 관심과 비난 속에 크리스챤아카데미는,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 위에서 계급과 계층적 단절, 도시와 농촌의 격차 등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에 대한 초보적 논의를 진행시켜 왔으며 더욱이 30여 년 이라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통해 다수의 사회문화계의 인사들을 배출해 왔다.

동시에 각종 연구위원회와 노동아카데미, 농민아카데미, 여성아카데미를 통해 사회교육적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내왔다. 특히 저항운동이 불가능했던 유신시기에는 한국사회와 교계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했다.

이러한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이후에 분출되는 민주화운동, 민중운동의 비약적 발전에 걸맞는 자기 변화를 이루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사회교육의 실시는 한국 역사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강원용 목사는 2000년 5월 7일 아카데미 35주년을 맞아 지난 41년간 심혈을 기울여왔던 아카데미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20세기의 인물이 21세기에도 자리를 지켜서는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강원용 목사는 평화포럼을 창립, 마지막 여생을 한반도에서 평화운동을 싹트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빈들에서’의 맺는 말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적었다.

“죽음이라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래왔듯 나날이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과거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사람이고자 했다. 나는 한국의 빈 들에서 악의 영과 싸우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는 몰라도 나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죽음은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