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8-20)

구약성서 창세기3장에 보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땅위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두 아들은 피를 나눈 형제로 형 가인과 동생 아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고 가인의 불신앙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형 가인은 시기하여 아우 아벨을 들판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희랍에도 오이디프스 신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투기심에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취한 자가 인류의 조상이라는 신화이니다. 부친을 살해한 자라는 말로 인해서 오늘날도 성적(性的)인 컴플렉스를 일컬어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고 말합니다. 신화가 정녕 사실은 아니지만 인간의 욕망을 투사 (透寫)한 것이니 모든 인간의 본성에는 죄성이 깃들여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누구라고 부인(否認)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역사속에 처참한 골육상쟁은 옛날부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짐승들도 같은 종(種)은 보전합니다. 사자가 사자를, 고양이가 고양이를 잡아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분별이 없습니다. 서로 물고 뜯고 물리며 먹고 먹힙니다. 이라크전쟁을 비롯해 강대국의 논리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로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듯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에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살던 가나안 땅에도 이권 때문에 씨족공동체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라라고해야 고작 자그마한 촌락공동체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세력을 더 확장하려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본문의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그돌라오멜도 가나안 지역의 맹주로서 거들먹거렸지만 자그마한 고을 단위의 소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역의 맹주로 군림하여 행세했던 것입니다. 南部 가나안의 다섯 왕들이 12년간 조공을 바치며 섬겨오던 봉신(封臣(vassal)-신하의 나라)들이었는데 칼을 빼들고 나섰습니다.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것은 새우들 뿐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죽어나는 것은 백성인데 그 때 소돔 성에 거주하던 롯도 큰 환란을 당했습니다.

롯도 패잔병(敗殘兵)의 무리중에 뒤섞여 무작정 끌려갔습니다. 희망도 내일도 모두 묻어둔채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 속에 끌려간 것입니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롯처럼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런 환란이 갑자기 닥치곤 합니다. 불안속에 희망을 가질 권리조차 몽땅 박탈 당한 그 곳은 생지옥이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광야에 내 팽개쳐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롯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각인(刻印)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브람입니다. 그는 욕심많고 무례한 조카였지만 외면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길리운 가신(家臣) 318명을 데리고 출정했습니다. 고민하며 구사한 작전대로 밤중에 기습하여 적들을 섬멸했습니다. 목숨을 내건 싸움이었습니다. 조카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버르장머리 없는 조카였기에 자업자득이라고 입장을 정리하고 철저하게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를 실로 사랑했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명걸고 나선 것입니다. 그 날에 아브라함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익숙하게 훈련된 318명의 사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인 의미를 줍니다. 바로 신앙인의 선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탈취물 중에서 십일조를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오실자 예수님의 표상인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주변에는 노예되어 신음하는 인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돈과 정욕에 노예되고, 자식에게 노예되어 신음하는 영혼들이 널려 있습니다. 갈길을 몰라 방황하는 무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소탐대실 (小貪大失)이라고 작은 것에 집착하여 영원한 것을 망각한채 지옥으로 향하는 불쌍한 인생들이 줄을 섰습니다. 자그마한 이권에 얽매여 믿음도 인간의 도리도 팽개쳐 버린 필연 썩을 인생들, 육신의 정욕을 위해 방황하는 인생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노아시대에 어리석은 인생들은 홍수가 내려 땅위의 모든 생명들을 삼켜 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사망의 그늘이 눈 앞에 덮쳐오는 것을 보면서도,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정욕의 노예되어 헤매다가 결국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마치 노아시대와 같습니다. 선지자 노아는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듣는 이 없어 그냥 메아리되어 되돌아와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천상의 멧세지를 농담으로 받아 넘겼던 완악한 자들이었지만 노아는 쉬지 않고 외쳤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양심 불감증에 걸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안일주의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물속에 떠내려가는 자를 보면서도 철저하게 외면한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하시겠습니까?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아브라함같이 단순히 포로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전술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하면서도 적극적인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죄악의 포로된 인생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뛰어 들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형제를 구원하라"고, 그럴 때에 주님은 멜기세덱으로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다가가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를 만나주시고 축복하여 주실줄 믿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받은 환영을 보면서 주의 나라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 봅시다.
첫째로 그곳에는 위로함이 있습니다. 전쟁을 치룬 아브람은 몹시 피곤하고 지쳤을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갖고 환영을 했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전쟁의 고달픈 과정을 겪은 아브람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선한 싸움을 다 마치고 그의 나라에 가면 주님은 양팔을 벌리고 “사랑하는 자녀야 고생이 많았다”라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그 곳에는 안식이 있습니다. 아브람과 318명의 군사들은 멜기세덱이 가져온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안식하였습니다. 고생과 수고가 지나가고 선한 싸움이 끝나 그 나라에 가면 우리에게도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눈물 흘릴 일도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안식 만이 있습니다.

세째로 그 곳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아브람을 향한 멜기세덱의 축복을 보십시요. 본문 19절에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 수고를 다하고 그 나라에 가면 주님은 우리가 받을 상을 하나님께 대신 요청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면류관을 쒸워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람이 취한 행동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아브람은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즉 멜기세덱이 그를 맞이하러 왔을 때에 소돔 왕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사를 부끄럼없이 받았고 노획물의 십일조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아브람이 여호와의 신앙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즉 자신의 信仰을 드러내야 할 경우에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에게 좋은 敎訓이 됩니다. 믿지 않는 친구 앞에서 그리스도를 告白하는 행위를 어려워 한 적은 없는지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