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이란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기대서 사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어디에 기대며 살아가는가, 어느 정도 기대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중독자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중독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나는 중독되지 않았다'고 문제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중독의 치료는 자신이 '중독자'임을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PC 중독을 예를 들면 위와 같은 완강한 부정 이외에도 문제의 축소(진짜 성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화면만 보는 건데 뭐), 문제를 다른 것에게 떠넘기기(내가 게임을 하는 건 순전히 스트레스 때문이야), 핑계 만들기(힘든 하루였어. 이제 컴퓨터를 좀 즐겨야지), 합리화(인터넷이 술이나 약물에 빠지는 것보다 낫지), 공격(우리 식구들은 내가 컴퓨터를 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과민이야) 등의 현상이 중독자에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은 왜 중독자가 될까? 쉽게 생각해보면 무언가에 기대서 살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삶이 재미없든지 힘들든지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모두 중독자가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모든 사람에게 삶은 완벽하게 재미있고 쉽고 만족스러울 수 없다. 그럼 그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기대어 살기 쉬운가?
첫째, 좌절을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다.
둘째, 무언가가 자신의 삶을 받쳐줘야 할 만큼 외로운 사람들이다.
셋째, 현실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해결해나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와같은 현상의 근본적 이유를 '신뢰로운 관계가 결여되어 나타난 나약한 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특별한 의존의 대상이 없어도 자신의 '일'과 '인간 관계', 그리고 '취미와 여가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중독자들은 이 세 가지 삶의 영역에 불만과 갈등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대체할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그 '무엇인가'가 무엇이냐에 따라 중독의 유형이 나뉘어 질 수 있다.
일 중독, 약물 중독,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식(食) 중독, 관계(섹스) 중독 그리고 최근에는 운동 중독까지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중독은 다시 게임중독, 채팅중독, 포르노중독 이 세가지로 대별된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중독자들도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교제 없이 단순히 '교회'가 제공하는 인적(人的), 물리적, 시간적, 환경적 만족감에 젖어 살고 있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교회중독자라 부르고 싶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중독과 관련된 유명한 말씀이 등장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스도인이 중독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의 충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교회 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성령에 관한 설교 말씀을 들었고, 성령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살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럼 이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종류의 중독도 나타나지 않는가?
앞에서 중독에 쉽게 빠지기 쉬운 사람들의 특징을 몇 가지 열거하였다. 좌절에 약한 사람, 외로운 사람,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그렇다면 중독에서 빠져 나오려면 좌절에 강한 사람, 외롭지 않은 사람,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중독자를 상담하는 원칙은 위의 몇 가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먼저 자신이 중독자임을 받아들이게 한 다음, 상담자는 중독자와 더불어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마련하여 일차적으로 중독자의 외로움을 해결한다.
중독 대상으로부터의 단절(단약, 단주, 단PC 등)을 시도함과 동시에 지난 날 동안 겪었던 좌절을 공감해주며 앞으로 발전적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 삶의 목표를 계획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문제해결능력을 향상시킨다. 인간 관계 맺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훈련시킨다.
자신의 진로에 방향과 자신감을 잃고 헤매던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삶의 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작전(시간 계획, 금전 계획, 자질 획득 등)을 짜고 실시하도록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중독자들이 상담자와 맺고 있던 의존 관계를 청산하도록 한다. 중독자들이 중독의 대상은 물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존해왔던 상담자와의 관계로부터도 독립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존적인 존재이다. 아니 창조되면서부터 의존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관계 안에서는 완전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관계가 깨어진 이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완전함을 누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중독의 대상에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을 완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온전히 의존하고 기대어 살 수 있어야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표현되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흔히 '성령의 열매'라 하면 기대되는 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슨 징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이상과 같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요소들로 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적 요소들로 인하여 바깥으로 표현되는 분명한 행동이 있다.
희락한 사람은 우울할 수 없고 화평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을 수 밖에 없다. 오래 참고 절제하는 사람은 중독 대상을 참고 절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내적 요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내적 요소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뢰로운 관계가 회복되어 나타나는 강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좌절할 때도, 외로울 때도,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한결같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 잇닿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스스로 조정해 나가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그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중독에서 벗어나 성령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내적 요소이다.
글/ 최은영(기윤실 기독가족상담소 상담위원)
흥미로운 것은 중독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나는 중독되지 않았다'고 문제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중독의 치료는 자신이 '중독자'임을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PC 중독을 예를 들면 위와 같은 완강한 부정 이외에도 문제의 축소(진짜 성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화면만 보는 건데 뭐), 문제를 다른 것에게 떠넘기기(내가 게임을 하는 건 순전히 스트레스 때문이야), 핑계 만들기(힘든 하루였어. 이제 컴퓨터를 좀 즐겨야지), 합리화(인터넷이 술이나 약물에 빠지는 것보다 낫지), 공격(우리 식구들은 내가 컴퓨터를 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과민이야) 등의 현상이 중독자에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은 왜 중독자가 될까? 쉽게 생각해보면 무언가에 기대서 살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삶이 재미없든지 힘들든지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모두 중독자가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모든 사람에게 삶은 완벽하게 재미있고 쉽고 만족스러울 수 없다. 그럼 그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기대어 살기 쉬운가?
첫째, 좌절을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다.
둘째, 무언가가 자신의 삶을 받쳐줘야 할 만큼 외로운 사람들이다.
셋째, 현실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해결해나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와같은 현상의 근본적 이유를 '신뢰로운 관계가 결여되어 나타난 나약한 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특별한 의존의 대상이 없어도 자신의 '일'과 '인간 관계', 그리고 '취미와 여가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중독자들은 이 세 가지 삶의 영역에 불만과 갈등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대체할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그 '무엇인가'가 무엇이냐에 따라 중독의 유형이 나뉘어 질 수 있다.
일 중독, 약물 중독,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식(食) 중독, 관계(섹스) 중독 그리고 최근에는 운동 중독까지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중독은 다시 게임중독, 채팅중독, 포르노중독 이 세가지로 대별된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중독자들도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교제 없이 단순히 '교회'가 제공하는 인적(人的), 물리적, 시간적, 환경적 만족감에 젖어 살고 있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교회중독자라 부르고 싶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중독과 관련된 유명한 말씀이 등장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스도인이 중독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의 충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교회 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성령에 관한 설교 말씀을 들었고, 성령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살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럼 이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종류의 중독도 나타나지 않는가?
앞에서 중독에 쉽게 빠지기 쉬운 사람들의 특징을 몇 가지 열거하였다. 좌절에 약한 사람, 외로운 사람,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그렇다면 중독에서 빠져 나오려면 좌절에 강한 사람, 외롭지 않은 사람,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중독자를 상담하는 원칙은 위의 몇 가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먼저 자신이 중독자임을 받아들이게 한 다음, 상담자는 중독자와 더불어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마련하여 일차적으로 중독자의 외로움을 해결한다.
중독 대상으로부터의 단절(단약, 단주, 단PC 등)을 시도함과 동시에 지난 날 동안 겪었던 좌절을 공감해주며 앞으로 발전적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 삶의 목표를 계획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문제해결능력을 향상시킨다. 인간 관계 맺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훈련시킨다.
자신의 진로에 방향과 자신감을 잃고 헤매던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삶의 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작전(시간 계획, 금전 계획, 자질 획득 등)을 짜고 실시하도록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중독자들이 상담자와 맺고 있던 의존 관계를 청산하도록 한다. 중독자들이 중독의 대상은 물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존해왔던 상담자와의 관계로부터도 독립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존적인 존재이다. 아니 창조되면서부터 의존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관계 안에서는 완전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관계가 깨어진 이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완전함을 누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중독의 대상에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을 완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온전히 의존하고 기대어 살 수 있어야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표현되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흔히 '성령의 열매'라 하면 기대되는 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슨 징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이상과 같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요소들로 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적 요소들로 인하여 바깥으로 표현되는 분명한 행동이 있다.
희락한 사람은 우울할 수 없고 화평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을 수 밖에 없다. 오래 참고 절제하는 사람은 중독 대상을 참고 절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내적 요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내적 요소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뢰로운 관계가 회복되어 나타나는 강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좌절할 때도, 외로울 때도,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한결같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 잇닿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스스로 조정해 나가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그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중독에서 벗어나 성령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내적 요소이다.
글/ 최은영(기윤실 기독가족상담소 상담위원)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