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뒷마당 전도(전도는 양육이다)
(3) 본으로 양육(딤전 4:11~13)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열두 제자 중 택함을 받은 두 제자가 베다니와 벳바게에서 나귀새끼를 풀어다가 자기들의 겉옷을 그 나귀 위에 펴놓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그 위에 올라 타셨다. 이것을 본 백성들이 제자들을 본받아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다 펼쳤다.
초신자들의 첫 믿음 형성 단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자가 전도자이다. 초신자가 전도자의 모습을 믿음생활의 모형으로 삼아 닮아 간다면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세상의 어머니들도 태아의 건강과 정서적 안정을 위하는 일이라면 즐기는 술 담배도 끊고 음식도 가려먹는다. 이것뿐이겠는가. 마음의 생각조차 조절하여 아름다운 생각 착한 마음을 지니고자 애쓴다. 이유는 간단하다. 뱃속에 있는 태아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초신자에게 어떤 본을 보여야 하겠는가?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이것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1~13)고 했다. 아름다운 본을 보이는 전도자가 되라는 뜻이다.
① 말과 감사의 본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와 말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말이 변하면 생각이 변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한다.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한다. 습관이 변하면 그 사람의 운명이 변한다. 이 말의 뜻에 공감을 표하는 독자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예수를 영접한 새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언어생활이 변해야 한다. 언어생활의 변화란 옛 사람의 더러운 말을 버리고 새 사람의 선한 말을 사용함을 뜻하는데 그 본을 전도자와 이미 믿은 성도들이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집단이기에 말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좋은 말, 은혜로운 말만 전하고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좋지 않은 말, 듣는 자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이 많아 연약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교회 일에 열심인 권사님이 있었다. 기도생활 봉사생활 심방 등으로 교회 일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권사님에게는 악의는 없지만 말을 함부로 하는 습관이 있었다. 말이란 쏟아 내면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과하고 걸러서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초신자 가정에 경사가 있어 목사님을 위시해서 전도사, 권사, 구역장이 초청되어 심방을 하게 되었다. 첫 아기의 돌잔치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자리였다. 목사님께서 첫돌 감사예배를 인도해 주시고 축복 기도로 예배를 마쳤다.
한복을 곱게 입힌 천사 같은 아기를 아버지의 무릎에 올려놓고는 아기에게 상 위에 있는 물건을 잡으라고 한다. 아기 앞에는 쌀, 연필, 돈, 실뭉치가 있었다. 아기가 무엇을 쥐더라도 덕담으로 아기 부모에게 기쁨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때 아기가 실뭉치를 쥐고는 빙그레 웃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 “그래, 무병장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젊은 부모도 무척이나 흐뭇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마른하늘에 천둥치는 소리인가. 잠잠히 듣고만 있던 권사님의 입에서 젊은 부부의 가슴에 못 박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목사님, 실을 잡았다고 해도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권사님께서 한 말의 참뜻은 “그럴수록 아이를 더욱 정성 들여 키우라”는 부탁의 말이겠으나 초신자가 그 말을 듣고 소화하기에는 받은 상처가 매우 컸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새신자에게 가장 먼저 본을 보여야 할 부분은 덕을 세우는 “말”이다. 내가 한 말이 듣는 사람에게 덕을 세웠는지 못 세웠는지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말끝에 “감사”라는 단어를 연결해 보기 바란다. “감사”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 이 말은 본을 보인 말로 누구에게나 위로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말이 된다.
② 사랑의 본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후의 일이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정확하게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랑을 실천하게 하려고 본을 보여 주셨다. 이 사랑이 제자됨의 증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전도자는 이 사랑의 모습을 우리 생활 가운데 옮겨 새신자들에게 보여야 한다.
③ 전도의 본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에 가까이 갈 때 빛 속에서 들려오는 한 소리가 있었다. “주여, 뉘시오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완전히 변하여 예수의 증인 사도 바울로 변해 유대인의 각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어떻게 변했나.
가. 자신(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죽은 예수를 봤다.
나. 그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사도로 부르심)를 맺었다.
다. 자신을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 밑에 놓았다.
라. 예수의 인격을 소유하고 삶 속에서 실천했다.
마. 또 한 사람의 전도자로 복음을 위해 고난 당할 각오로 나의 유대, 우리의 사마리아 그리고 모두의 세계를 향해 전도의 본을 보이고 실천하며 살았다.
글/ 엄호섭 원장(모유전도법 저자, 서울 광성교회 시무장로)
(3) 본으로 양육(딤전 4:11~13)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열두 제자 중 택함을 받은 두 제자가 베다니와 벳바게에서 나귀새끼를 풀어다가 자기들의 겉옷을 그 나귀 위에 펴놓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그 위에 올라 타셨다. 이것을 본 백성들이 제자들을 본받아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다 펼쳤다.
초신자들의 첫 믿음 형성 단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자가 전도자이다. 초신자가 전도자의 모습을 믿음생활의 모형으로 삼아 닮아 간다면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세상의 어머니들도 태아의 건강과 정서적 안정을 위하는 일이라면 즐기는 술 담배도 끊고 음식도 가려먹는다. 이것뿐이겠는가. 마음의 생각조차 조절하여 아름다운 생각 착한 마음을 지니고자 애쓴다. 이유는 간단하다. 뱃속에 있는 태아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초신자에게 어떤 본을 보여야 하겠는가?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이것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1~13)고 했다. 아름다운 본을 보이는 전도자가 되라는 뜻이다.
① 말과 감사의 본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와 말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말이 변하면 생각이 변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한다.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한다. 습관이 변하면 그 사람의 운명이 변한다. 이 말의 뜻에 공감을 표하는 독자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예수를 영접한 새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언어생활이 변해야 한다. 언어생활의 변화란 옛 사람의 더러운 말을 버리고 새 사람의 선한 말을 사용함을 뜻하는데 그 본을 전도자와 이미 믿은 성도들이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집단이기에 말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좋은 말, 은혜로운 말만 전하고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좋지 않은 말, 듣는 자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이 많아 연약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교회 일에 열심인 권사님이 있었다. 기도생활 봉사생활 심방 등으로 교회 일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권사님에게는 악의는 없지만 말을 함부로 하는 습관이 있었다. 말이란 쏟아 내면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과하고 걸러서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초신자 가정에 경사가 있어 목사님을 위시해서 전도사, 권사, 구역장이 초청되어 심방을 하게 되었다. 첫 아기의 돌잔치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자리였다. 목사님께서 첫돌 감사예배를 인도해 주시고 축복 기도로 예배를 마쳤다.
한복을 곱게 입힌 천사 같은 아기를 아버지의 무릎에 올려놓고는 아기에게 상 위에 있는 물건을 잡으라고 한다. 아기 앞에는 쌀, 연필, 돈, 실뭉치가 있었다. 아기가 무엇을 쥐더라도 덕담으로 아기 부모에게 기쁨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때 아기가 실뭉치를 쥐고는 빙그레 웃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 “그래, 무병장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젊은 부모도 무척이나 흐뭇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마른하늘에 천둥치는 소리인가. 잠잠히 듣고만 있던 권사님의 입에서 젊은 부부의 가슴에 못 박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목사님, 실을 잡았다고 해도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권사님께서 한 말의 참뜻은 “그럴수록 아이를 더욱 정성 들여 키우라”는 부탁의 말이겠으나 초신자가 그 말을 듣고 소화하기에는 받은 상처가 매우 컸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새신자에게 가장 먼저 본을 보여야 할 부분은 덕을 세우는 “말”이다. 내가 한 말이 듣는 사람에게 덕을 세웠는지 못 세웠는지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말끝에 “감사”라는 단어를 연결해 보기 바란다. “감사”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 이 말은 본을 보인 말로 누구에게나 위로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말이 된다.
② 사랑의 본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후의 일이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정확하게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랑을 실천하게 하려고 본을 보여 주셨다. 이 사랑이 제자됨의 증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전도자는 이 사랑의 모습을 우리 생활 가운데 옮겨 새신자들에게 보여야 한다.
③ 전도의 본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에 가까이 갈 때 빛 속에서 들려오는 한 소리가 있었다. “주여, 뉘시오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완전히 변하여 예수의 증인 사도 바울로 변해 유대인의 각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어떻게 변했나.
가. 자신(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죽은 예수를 봤다.
나. 그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사도로 부르심)를 맺었다.
다. 자신을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 밑에 놓았다.
라. 예수의 인격을 소유하고 삶 속에서 실천했다.
마. 또 한 사람의 전도자로 복음을 위해 고난 당할 각오로 나의 유대, 우리의 사마리아 그리고 모두의 세계를 향해 전도의 본을 보이고 실천하며 살았다.
글/ 엄호섭 원장(모유전도법 저자, 서울 광성교회 시무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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