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기 저기서 춤 치료(Dance Therapy, 춤 테라피)가 유행인 모양이다. 며칠 전 우리 연구소에 어느 분이 상담을 요청해 왔다. 자기 교회의 중직자 한 사람이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 하는 부부영성세미나를 다녀 온 뒤부터 교회 모임에서 자꾸 춤테라피를 하자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담당 목사님이 조금 끼리는 듯 한 표정을 짓자 목회자들이 너무 무식해서 그런다는 투로 비난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집사는 부부 영성세미나에 가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대중가요도 하고 춤도 막 추고, 심지어는 욕도 막하고 그랬는데 아주 신나고 시원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교회에서 많이 번져가야 되는데 목회자들이 너무 무지해서 그렇게 좋은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집사의 말이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해서 상담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춤 테라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즘 세상 풍조가 남들이 안하는 것, 좀 튀는 행동이나 뭔가를 보여주면 인기를 끌다보니 그러한 모습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파고드는 듯 싶다. 그런 것이 마치 최신의 기법인양, 또 앞서 나가는 첨단의 방법인양 생각하면서 막 들여 온다는 것이다. 어느 유명한 상담학자이면서도 목사인 어느 분은 자신이 한국에 처음으로 욕 치료를 도입했노라고 말하면서 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좋은 것을 왜 안 쓰는지 모르겠다고 공개적인 강의에서 밝힌 바 있다. 욕설을 퍼 부어댐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치유 방법일까? 성경적으로도 전혀 논의할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치유법을 교회 안에서, 그것도 지도적 인사가 앞장서서 주창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또 춤 테라피가 그렇게 유행이라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을 안해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역자라고 치부할만큼 여기저기서 앞장서서 도입한다. 그런데 춤 테라피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춤 테라피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쯤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방법을 교회 안에 들여 오는 것이 좋은지 문제가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춤이 이렇게 각광을 받는 사회적인 배경으로 중세의 신 중심에서, 근대의 이성 중심, 탈 현대에 이르러 몸 중심으로 변해가는 정신적 변천 과정과 맞닿아 있다. 곧 그동안 몸을 억누르고 무시하고 관리해야 했다면 21세기는 몸이 본래적으로 갖는 욕망이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울여대 춤 테라피 전문가인 류분순 교수는 “춤을 통한 치료는 인류의 시작부터 제례나 의식, 종교와 함께 있어 왔는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공포, 경외, 숭배들을 춤으로 표현했고, 집단적인 공유를 함께 했다”고 말한다. 즉, “치료로서 유용한 종교적 춤의 형태는 춤추는 행위자가 일으키는 엑스타시로서, 춤에 의해 유도된 상태에서 뭉쳐지고 억눌린 감정을 격렬하게 발산시켜 정화 체험을 갖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축제나 신병치료를 위해 샤먼들이 춤을 출 때, 단순한 리듬의 반복이 사람을 황홀상태로 이끌고 가고, 우리나라 무당들의 움직임 역시 단순한 리듬의 반복에서 격렬한 춤사위로 들어가서 점점 몰입하여 신과 접신하여 참여자들의 소망과 염원에 따른 동시적 적극적 상호작용으로 치유가 일어나는데, 인간의 뇌는 대체로 리듬에 약하여 반복적인 신체 리듬을 통해 황홀경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반복적인 신체운동은 인간을 도취하게 하고 절정에 이르게 하며, 정신의 정화작용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결국 춤 테라피라는 것은 “마음의 능력은 현실을 창조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살기 원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 운동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소위 춤 테라피로 뜨고 있는 ‘흰바람 박선영’이라는 사람의 글을 보아도 그러한 경향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봉산 탈춤 등의 탈놀이 전공자요, 전통 굿(경기도 당굿 등)을 공부하며 집단 치유에 관심을 갖게 된 박씨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가는 전원 살림마을이나 성공회대학 등에서 춤 테라피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춤 테라피는 자유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진정한 움직임을 찾아가는 것으로 춤을 통한 영적 치유”라고 밝히고 있다. 즉, “춤을 통해 내면의 진실한 자기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무의식과 의식이 통합된 자기를 만나면(접촉하면)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을 배우게 되고 과거에 바탕을 둔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가 없는 영성, 전통적인 기독교 테두리 밖에서 영적 경험을 찾으려는 뉴에이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도 성경 구절(창세기 2:7)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인 숨을 잘 느끼며 숨을 씩씩하게 내 뱉으며 산다”고 말한다.
어찌 그 뿐이랴! 유명한 상담학자 가운데도 이미 이러한 춤 테라피를 욕치료나 웃음 치료 등과 함께 쓰는 사람도 있고, 요즘에는 가정사역자들 가운데도 이러한 기법을 막 도입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 모 목사는 이렇게 말을 한다. “상담에서는 철저하게 종교성을 배제해야 한다”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너무 쉽게 교회적인 해석을 갖다 붙이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임재는 나중이고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 조차 문제가 된다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생각에서부터 비롯된다 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그 과정이나 방법도 바르게 해야 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치유사역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 영, 그리고 인간관계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온전한 건강을 되찾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정의할 수 있다. 당연히 드러난 어떤 문제들만 표피적 감각으로 사라지게 했다하여 치유가 다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더불어 아무리 치유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 매일 매일의 삶에서 치유를 경험해야만 건강한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는 곧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깊은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혼적, 육체적, 관계적 측면에서 고루 성장하지 못하는 치유 방법이라면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헬라어의 치유라는 뜻의 sozo라는 단어는 ‘구원한다’는 뜻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불어 영어의 건강(health), 온전함(wholeness), 구원(salvation)은 같은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곧 우리의 구원이란 영이나 혼의 구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의 모든 상한 부분이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춤 테라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듣고 나는 하루종일 우울했다. 우리가 꼭 이래야만 하나?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방법은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인본주의적이고 뉴에이지적 마인드를 담은 그러한 치유사역을 교회 안에 들여 와야만 하는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

글/ 추부길(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