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다빈치코드’ 개봉을 앞두고 대처 방안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미 일각에서는 강력한 영화상영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법적대응도 불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처방안을 오히려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소 엉뚱한 발상인지는 모르나 필자는 영화 ‘다빈치코드’를 바라보는 시각코드가 약간은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다빈치코드’자체를 복음전도의 기회로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1. 정공법을 구사하자
이 영화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흥행의 3박자를 갖추었다. 첫째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베스트셀러를 시나리오로 택했다. 소설 ‘다빈치코드’는 전세계적으로 3,600만부, 한국에서는 100만부가 팔려나간 초대형 베스트셀러이다. 둘째로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이다. 이 영화에 1억2,300만달러가 투자되었고 배역진이 톰 행크스를 중심으로 탄탄하다. 셋째로 홍보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될 만큼 세계적인 관심사에다 영화 개봉 몇 달 전부터 뜨거운 논란이 되어 저절로 영화홍보가 되고 있다.
혹자는 영화 상영을 반대하고 ‘영화안보기운동’을 해야 하는 명분으로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포스터모던 시대로, 비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절대 가치와 표준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다종교사회를 이루는 한국에서 상식선을 넘어선 지나친 행동은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와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게 할 빌미를 줄 수 있다.
또한 성도들이 이 영화 한 편을 보고 근본적인 신앙이 흔들릴 만큼 한국교회의 성도가 유약하지는 않다고 본다. 만약 다빈치코드 하나로 신앙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라면 그것은 이 영화보다도 더 심각한 교회와 성도의 유약한 모습을 확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하여 소극적 수비보다는 적극적 공격을 선택하는 정공법을 구사해야 한다. 영화 자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보다는 영화를 보게 될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화의 허구성을 알리고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2. 복음코드를 맞추자
영화 다빈치 코드에 대처하는 전략적인 대안으로 우리는 복음의 코드로 ‘다빈치코드’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느낀다. 존 스토트가 자주 인용한 말 중 “한 손에는 성경(Bible)을, 한 손에는 신문(Newspaper)을 붙들라”는 말이 있다. 복음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에 복음의 본질은 변함이 없어야 하지만 복음 전달의 방법은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1)성경적 모델을 발견하자
복음은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된다. 하나님이셨던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Incarnation)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의 문화 속으로 침투해오신 역사적인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의 언어, 음식, 생활 방식 등 유대 문화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접촉 자체를 꺼렸고 부정한 땅이라고 하여 지나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땅을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들어가셨다(요 4장). 문화의 장벽을 넘는 타문화 선교의 첫 모델을 보여주신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동시에 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말한다(요일 2:15, 요 3:16). 이는 이 세상의 오염된 정신(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미워하되 여전히 구원의 대상되는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막 12:31). 여기서 말하는 네 이웃 속에는 내 주변의 사람도 있지만 세상 정신에 오염된 일반 사회의 사람도 있고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 같은 사람도 포함된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문화는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며 복음의 대상이다. 선교의 관점으로 이 세상 사람을 바라볼 때 ‘다빈치코드’를 바라보는 선교적 대안도 나온다.
(2)복음의 접촉점으로 활용하자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사용하신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은 창의적인 접촉점이었다. 그 여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물’이라는 공감 아이콘으로 여인의 최우선적 관심을 영적인 주제로 반전시키셨다(요 4:7). 복음 전도에 있어서 쌍방 간 커뮤니케이션과 공감적 경청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창의적인 접촉점이 필요하다. 이 접촉점은 대상 중심, 필요 중심, 관계 중심이면 더욱 효과적이다. ‘다빈치코드’라는 누구나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물”이 오늘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우리는 이를 복음 전도의 최선의 기회로 창출할 지혜가 필요하다. ‘다빈치 코드’는 복음전도의 기회로 극대화할 창의적인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다.
5월19일 밤에 묻는 질문
5월19일 밤 8시 다빈치 코드 영화를 보고 나온 젊은이들이 동시에 묻는 질문은 “그러면 예수는 누구지?”일 것이다. 부정적이든 회의적이든 비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동시적으로 대규모적으로 “예수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 때는 많지 않았다. 2천 년 전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동일한 질문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여러 제자들의 동문서답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명쾌한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동일하게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비기독교인들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 그는 당신에게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붙잡혀 심문을 받으실 때도 동일하게 종교인들과 사람들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 예수에 대한 관심과 소문은 전 예루살렘에 퍼져 갔었다(마 27장). 지금 한국 상황에서 ‘다빈치 코드’로 인해 ‘예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질문한다. “예수 그는 누구지?” 사마리아 여인이 가장 쉽게 공감하는 ‘물’을 접촉점으로 ‘생수’되신 메시야를 소개하였던 예수의 창의적인 접촉점과 접근법을 이 시점에 되새겨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전도는 모든 성도들이 누릴 특권이자 부르심의 소명이다.
위기를 기회로 뒤집기
기독교 변증이 신학적으로 가장 발달한 시기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반대하는 이단이 가장 왕성하였을 때였다. 교회가 성장한 시기는 언제나 핍박과 고난, 위협이 있을 때였다. 그럴 때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고 야성을 가지며 교회는 성숙, 성장해왔다. 예수의 신성을 도전하고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다빈치코드’를 계기로 성도들은 다시 한번 기독교의 역사와 핵심교리, 성경을 공부하게 된다. 예수와 성경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비기독인들에게는 복음 전도의 유용한 기회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CCC는 말도 안 되는 ‘다빈치코드’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오히려 적극적인 복음전도의 접촉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다빈치코드 매거진’을 발행하여 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www.cyworld.com/DVCproject). ‘위기’라는 단어는 또 다른 기회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 되어있다. 뒤집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1. 정공법을 구사하자
이 영화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흥행의 3박자를 갖추었다. 첫째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베스트셀러를 시나리오로 택했다. 소설 ‘다빈치코드’는 전세계적으로 3,600만부, 한국에서는 100만부가 팔려나간 초대형 베스트셀러이다. 둘째로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이다. 이 영화에 1억2,300만달러가 투자되었고 배역진이 톰 행크스를 중심으로 탄탄하다. 셋째로 홍보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될 만큼 세계적인 관심사에다 영화 개봉 몇 달 전부터 뜨거운 논란이 되어 저절로 영화홍보가 되고 있다.
혹자는 영화 상영을 반대하고 ‘영화안보기운동’을 해야 하는 명분으로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포스터모던 시대로, 비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절대 가치와 표준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다종교사회를 이루는 한국에서 상식선을 넘어선 지나친 행동은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와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게 할 빌미를 줄 수 있다.
또한 성도들이 이 영화 한 편을 보고 근본적인 신앙이 흔들릴 만큼 한국교회의 성도가 유약하지는 않다고 본다. 만약 다빈치코드 하나로 신앙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라면 그것은 이 영화보다도 더 심각한 교회와 성도의 유약한 모습을 확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하여 소극적 수비보다는 적극적 공격을 선택하는 정공법을 구사해야 한다. 영화 자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보다는 영화를 보게 될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화의 허구성을 알리고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2. 복음코드를 맞추자
영화 다빈치 코드에 대처하는 전략적인 대안으로 우리는 복음의 코드로 ‘다빈치코드’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느낀다. 존 스토트가 자주 인용한 말 중 “한 손에는 성경(Bible)을, 한 손에는 신문(Newspaper)을 붙들라”는 말이 있다. 복음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에 복음의 본질은 변함이 없어야 하지만 복음 전달의 방법은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1)성경적 모델을 발견하자
복음은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된다. 하나님이셨던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Incarnation)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의 문화 속으로 침투해오신 역사적인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의 언어, 음식, 생활 방식 등 유대 문화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접촉 자체를 꺼렸고 부정한 땅이라고 하여 지나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땅을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들어가셨다(요 4장). 문화의 장벽을 넘는 타문화 선교의 첫 모델을 보여주신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동시에 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말한다(요일 2:15, 요 3:16). 이는 이 세상의 오염된 정신(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미워하되 여전히 구원의 대상되는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막 12:31). 여기서 말하는 네 이웃 속에는 내 주변의 사람도 있지만 세상 정신에 오염된 일반 사회의 사람도 있고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 같은 사람도 포함된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문화는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며 복음의 대상이다. 선교의 관점으로 이 세상 사람을 바라볼 때 ‘다빈치코드’를 바라보는 선교적 대안도 나온다.
(2)복음의 접촉점으로 활용하자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사용하신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은 창의적인 접촉점이었다. 그 여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물’이라는 공감 아이콘으로 여인의 최우선적 관심을 영적인 주제로 반전시키셨다(요 4:7). 복음 전도에 있어서 쌍방 간 커뮤니케이션과 공감적 경청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창의적인 접촉점이 필요하다. 이 접촉점은 대상 중심, 필요 중심, 관계 중심이면 더욱 효과적이다. ‘다빈치코드’라는 누구나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물”이 오늘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우리는 이를 복음 전도의 최선의 기회로 창출할 지혜가 필요하다. ‘다빈치 코드’는 복음전도의 기회로 극대화할 창의적인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다.
5월19일 밤에 묻는 질문
5월19일 밤 8시 다빈치 코드 영화를 보고 나온 젊은이들이 동시에 묻는 질문은 “그러면 예수는 누구지?”일 것이다. 부정적이든 회의적이든 비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동시적으로 대규모적으로 “예수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 때는 많지 않았다. 2천 년 전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동일한 질문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여러 제자들의 동문서답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명쾌한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동일하게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비기독교인들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 그는 당신에게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붙잡혀 심문을 받으실 때도 동일하게 종교인들과 사람들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 예수에 대한 관심과 소문은 전 예루살렘에 퍼져 갔었다(마 27장). 지금 한국 상황에서 ‘다빈치 코드’로 인해 ‘예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질문한다. “예수 그는 누구지?” 사마리아 여인이 가장 쉽게 공감하는 ‘물’을 접촉점으로 ‘생수’되신 메시야를 소개하였던 예수의 창의적인 접촉점과 접근법을 이 시점에 되새겨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전도는 모든 성도들이 누릴 특권이자 부르심의 소명이다.
위기를 기회로 뒤집기
기독교 변증이 신학적으로 가장 발달한 시기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반대하는 이단이 가장 왕성하였을 때였다. 교회가 성장한 시기는 언제나 핍박과 고난, 위협이 있을 때였다. 그럴 때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고 야성을 가지며 교회는 성숙, 성장해왔다. 예수의 신성을 도전하고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다빈치코드’를 계기로 성도들은 다시 한번 기독교의 역사와 핵심교리, 성경을 공부하게 된다. 예수와 성경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비기독인들에게는 복음 전도의 유용한 기회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CCC는 말도 안 되는 ‘다빈치코드’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오히려 적극적인 복음전도의 접촉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다빈치코드 매거진’을 발행하여 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www.cyworld.com/DVCproject). ‘위기’라는 단어는 또 다른 기회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 되어있다. 뒤집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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