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화창한 날 세 명의 아가씨가 한껏 멋을 부리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침 마주 걸어 오던 남자 한 명이 그 세 아가씨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자기는 사진 작가인데 자신이 그토록 찾던 모델을 여기서 다 만나서 너무 반갑다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로 가서 당장 촬영을 하면 소정의 모델료도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모델도 하고 돈도 받을 수 있으니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아 그 세 아가씨는 그 사진 작가의 스튜디오로 가서 촬영을 하였다.
촬영 이후 자신들의 사진이 어떤 모델로 쓰여졌는지 몹시 궁금한 세 아가씨가 하루는 사진 작가를 찾아가 물었다. 사진 작가가 마지못해 건네준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 보니 변호사 사무실과 성형 외과 사무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걸린 한 아가씨의 사진밑에는 “이렇게 나오면 소송해 드립니다.” 라고 써 있었고 성형 외과 사무실에 걸려 있는 두 번째 아가씨의 사진밑에는 “Before(수술전)” 세 번째 아가씨의 사진밑에는 “이런 얼굴도 고칠 수 있습니다.” 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내용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 많은 세월이 걸리고 심지어는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철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류 최고의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많은 부분 객관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심지어는 자신의 자녀에 대해서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하루는 내게 와 심각한 얼굴로 질문하였다. “사모님, 정말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우리 아들 얼굴이 잘 생긴 얼굴인가요?”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의 얼굴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은 나는 “잘 생겼다기보다는 귀엽게 생긴 얼굴이지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서야 그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렇죠? 귀여운 얼굴인 거죠?” 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얼굴조차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객관적인 말을 해줄 때 그 말을 잘 받아 들으면 그것은 내게 생명이 되지만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잠언 15:31-32 말씀에도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이나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라고 하였다. 지혜롭게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일수록 비판과 지적을 자기 성찰과 자기 발전의 계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남으로부터 지적이나 비판을 받으면 심한 반발과 분노로 반응하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은 더 이상의 발전의 소망이 없을뿐더러 그 다음부터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올바른 소리를 해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는 헛된 자존심이나 교만은 일찌감치 배설물(rubbish)같이 버려야 한다. 어떤 분은 미국에 온지 8년 만에 드디어 자존심을 버렸다. 그런 후에 그 분이 나에게 와서 말하였다. “자존심을 버리니까 되데요.” (8년 전에 버렸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헛된 교만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만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만의 참된 정의는 남보다 탁월하기 때문에 우월한 마음을 갖은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전혀 탁월한 면이 없는데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착각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교만했던 것이 아니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면 우리 안에 있는 헛된 자존심, 교만, 착각, 우월의식들을 배설물처럼 십자가 앞에 내버려야 할 것이다.
촬영 이후 자신들의 사진이 어떤 모델로 쓰여졌는지 몹시 궁금한 세 아가씨가 하루는 사진 작가를 찾아가 물었다. 사진 작가가 마지못해 건네준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 보니 변호사 사무실과 성형 외과 사무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걸린 한 아가씨의 사진밑에는 “이렇게 나오면 소송해 드립니다.” 라고 써 있었고 성형 외과 사무실에 걸려 있는 두 번째 아가씨의 사진밑에는 “Before(수술전)” 세 번째 아가씨의 사진밑에는 “이런 얼굴도 고칠 수 있습니다.” 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내용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 많은 세월이 걸리고 심지어는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철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류 최고의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많은 부분 객관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심지어는 자신의 자녀에 대해서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하루는 내게 와 심각한 얼굴로 질문하였다. “사모님, 정말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우리 아들 얼굴이 잘 생긴 얼굴인가요?”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의 얼굴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은 나는 “잘 생겼다기보다는 귀엽게 생긴 얼굴이지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서야 그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렇죠? 귀여운 얼굴인 거죠?” 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얼굴조차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객관적인 말을 해줄 때 그 말을 잘 받아 들으면 그것은 내게 생명이 되지만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잠언 15:31-32 말씀에도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이나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라고 하였다. 지혜롭게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일수록 비판과 지적을 자기 성찰과 자기 발전의 계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남으로부터 지적이나 비판을 받으면 심한 반발과 분노로 반응하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은 더 이상의 발전의 소망이 없을뿐더러 그 다음부터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올바른 소리를 해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는 헛된 자존심이나 교만은 일찌감치 배설물(rubbish)같이 버려야 한다. 어떤 분은 미국에 온지 8년 만에 드디어 자존심을 버렸다. 그런 후에 그 분이 나에게 와서 말하였다. “자존심을 버리니까 되데요.” (8년 전에 버렸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헛된 교만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만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만의 참된 정의는 남보다 탁월하기 때문에 우월한 마음을 갖은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전혀 탁월한 면이 없는데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착각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교만했던 것이 아니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면 우리 안에 있는 헛된 자존심, 교만, 착각, 우월의식들을 배설물처럼 십자가 앞에 내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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