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둥근 지구를 만드셨어요, 울퉁 불퉁한 산과, 기다란 강물과, ..."라고 말하며 능숙한 손동작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떠올리라면 보통 20대 중초반의 여자 선생님을 떠올릴 것이다.
뉴욕 그리스도교회를 10여년째 섬기고 있는 정춘석목사는 이러한 기자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린 목사이다. 지금은 이미 50이 넘었지만 여전한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로 어린이 사역 '종이비행기(www.paperair.co.kr)'와 그 외에도 여러가지 사역을 인터넷을 통해 꿈꾸고 있는 정춘석 목사를 만나 보았다.
아이들이 나를 부르다 – “왜 니네만 예배보노..”
고등학교 때부터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다. 한센병환자(나환자) 자녀를 위한 사역이었는데, 한센병은 전염성이 있고, 한 번 걸리면 나을 수 없기 때문에 자녀들을 부모와 격리 시켜 일종의 고아원 같은 곳에서 키운다.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보기 위해서 밤에 뭔가를 뒤집어 쓰고 오는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고아원 같은 곳에 크리스마스 선물도 많이 보내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선물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나를 더 간절히 기다렸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이 사랑을 전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교회는 4살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집 근처 교회에서 종을 치면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엄마 교회 보내줘, 교회 보내줘’라고 졸랐다. 성장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을 가길 원했는데, 믿지 않는 부모님은 내가 신학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래서 신학대에 붙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리스도 신학대(서울 화곡동 소재)에서 이듬해 3월에 신입생 지원을 받았고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대를 한 학기 다니다 보니 내가 믿는 하나님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 달라서 신앙에 혼란이 왔다. 신학대를 그만 둘 생각을 했었는데 김진건 장로님(그 당시 그리스도신학대 교수, 후에 총장까지 역임)께서 사진기를 줄 테니 전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라고 하셨다. 어느 날 전남 안자면 자라리의 섬교회를 갔더니 서울에서 전도사님이 왔다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아이들이 창문에 돌맹이를 던지며 “왜 니네만 예배보노..”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어린이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린이 사역 시작
어린이 사역을 하려고 하는데 그 당시 마땅한 교안이 없었다. 그래서 신학자, 교육학 박사들과 함께 교안을만들기 시작했다. 신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주일 공과를 겁도 없이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리방으로 써서 등사기로 인쇄해서 품질도 안 좋지만 억지로 만들어 전국에 프린트해서 보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처음 반응이 ‘뭐 이런 교재가 다 있나’ 이랬다. 그러다가 교사 강습이 필요해서 72년 신학교 2학년부터 내가 다니던 신학교 내에 교회학교 연구소 만들어서 전국 교사들을 불러놓고 강습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도 아는 게 없었다. 신학생이긴 했지만 정식으로 기독교 교육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모든 게 다 내 안에 있는 감각으로만 했다. 인형극도 혼자 만들어서 하고 여하튼 열심히 했다. 다행히 교사들의 반응은 좋았다. 나도 그렇게 강습회를 이끌다가 스스로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강습회란 강습회는 다 쫓아다니면서 배웠다. 그러면서 노트필기 한 것이 약 6-7권 되었다.
군에 가서도 계속된 어린이 사역
신학대 3학년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나는 ‘교단에 공과가 없으니 여기에서도 공과를 써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보초를 대신 서 주면서까지 공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고참한테 들켜서 쓰던 공과를 뺏겨서 찢긴적도 많았다. 어떤 고참은 그 종이에다 코를 풀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썼다. 사실 공과를 쓰려면 적어도 네 가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어린이를 잘 알아야 하고(아동학), 교수법을 잘 알아야 하고(교육학), 심리를 잘 알아야 한다(심리학). 그런데 나는 그런 것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쉬지 않고 썼다. 그러다가 내가 그 동안 정리한 노트를 보면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린이 설교법, 동화법, 등등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모아 그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일했던 잡지사 ‘참빛사’에 매월 투고를 하기 시작했다. 빠지지 않고 하다 보니 제대후에는 30개가 넘는 투고를 하게 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군종을 맡아 울진부터 강릉까지 걸어다니면서 분초(각 초소)마다 예배를 드리고 다녔다. 지나가다가 동네 교회가 보이면 거기서 예배 드리고 아이들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치면서 다녔다.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신나게 다녔던 것 같다.
종이비행기를 날리기 시작
강원도 지역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난생 처음 받는 편지로 복음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지를 쓰다 보니까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많이 써서 여러명의 아이들에게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답장이 금방 금방 왔다. 이것을 뭐라고 이름붙일까 생각하다가 종이비행기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종이비행기’ 하면 기독교적 냄새가 강하게 나지 않으면서도 어린이가 생각나고 아이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이름인 것 같다. ‘이 편지를 읽고 다른 아이들에게 날려라. 그래서 이 비행기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아이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종이비행기를 쓰게 되었다.
본격적인 어린이 사역 시작-50여권이 넘는 어린이 교육책 저술과 강연
제대를 하고 나서 책을 만들어 50권을 생명의 말씀사에 가져다 놓았다. 일주일 후에 다 팔렸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책을 더 써보라는 권유에 ‘교회 학교 교수법’, ‘손유희 교본’, ‘어린이 교실’, ‘성경에서 따온 레크리에이션 교본’ 등등 약 50여권의 책을 쓰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 교육선교회라는 단체를 시작하면서 강사로 많은 교사들을 가르쳤다. 군 제대후에 참빛사 주관을 맡았었는데 언론 통폐합 때문에 잡지가 폐간되었다. 그 후 과학원 어린이 교회를 개척했고, 6년 후에는 공항그리스도 교회에서 목회했다. 동시에 하루에 교사 강습회를 2-3번하면서, 신학대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정말 바쁘게 살았다. 80-90년대는 어린이 선교, 어린이 교육이 정말 활발했던 때이다. 한 번 강의할 때 7000명씩 모이고 여름 성경학교 때는 전철 타면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예수님이 좋아요
예수님이 좋아요 운동은 1987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귀신 '강시'의 캐릭터가 어린이 사회에 만연한 것을 보고 '주님, 저 강시 물리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중 '예수님이 좋아요'라는 로고를 림종수 목사를 통하여 만들게 되었다. 당시는 교회에 로고 개념이 없었던 때였는데, 이 로고가 만들어지고 난 이후에 티셔츠, 가방, 목걸이, 반지등에 이 로고를 다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운동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당시 특허를 내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누군가가 특허를 낼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난 1999년에 당시 뉴욕 교협 회장이었던 한세원 목사가 이 로고가 새겨진 티를 입고 이북 평양의 거리를 다녔던 일이 있다. 북한에서 벗으라고 했지만 그 티를 벗지 않아 남들보다 하루 늦게 오게 된 일화도 있다.
주님께서 미국으로 부르시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교회대로 안정이 되어 가고 어린이 사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영적으로 내가 너무 메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 개척을 생각하던 도중 김진건 장로님(뉴욕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께서 이곳으로 나를 부르셨고 트레일러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교회 건물도 짓게 되었고 처음에는 20명도 안 되던 곳이 지금은 약 150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동네가(코로나, 뉴욕) 꽤 유명한 우범지대이다. 한국사람 중 아무도 이 지역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교회는 가난한데 있어야 한다.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면서 이사가지 않고 여기다 성전을 건축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동안 모였던 교인이 70명이 나갔다. 그래도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결국 2년 만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1년 전 갈 곳 없었던 한인 경로회에 무료로 장소를 빌려주어 한인 커뮤니티도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한인 경로회는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쓰고 있고 수요일마다 수요예배를 어르신들과 함께 드린다.
여전히 계속하게 된 어린이 사역
그러다가 2년 전에 다시 종이비행기 사역을 미국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인터넷 시대라 종이는 아이들에게 어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터넷 종이비행기 사이트를 만들게 되었고 한달 전에는 완전 사이트 개편을 했다. 어린이 사역은 평생 해야 할 사역인데 이 사역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5형제중 한 명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지금 네 명의 형제가 함께 이 사역을 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딱 두가지
지금 목회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아이들이 '종이비행기'와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이 두가지만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내 이름을 내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아이들이 이것을 통해서 쉽고 재밌게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좋겠다.
종이비행기 웹사이트(www.paperair.net) 바로가기
뉴욕그리스도의 교회 바로가기
뉴욕 그리스도교회를 10여년째 섬기고 있는 정춘석목사는 이러한 기자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린 목사이다. 지금은 이미 50이 넘었지만 여전한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로 어린이 사역 '종이비행기(www.paperair.co.kr)'와 그 외에도 여러가지 사역을 인터넷을 통해 꿈꾸고 있는 정춘석 목사를 만나 보았다.
아이들이 나를 부르다 – “왜 니네만 예배보노..”
고등학교 때부터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다. 한센병환자(나환자) 자녀를 위한 사역이었는데, 한센병은 전염성이 있고, 한 번 걸리면 나을 수 없기 때문에 자녀들을 부모와 격리 시켜 일종의 고아원 같은 곳에서 키운다.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보기 위해서 밤에 뭔가를 뒤집어 쓰고 오는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고아원 같은 곳에 크리스마스 선물도 많이 보내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선물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나를 더 간절히 기다렸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이 사랑을 전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교회는 4살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집 근처 교회에서 종을 치면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엄마 교회 보내줘, 교회 보내줘’라고 졸랐다. 성장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을 가길 원했는데, 믿지 않는 부모님은 내가 신학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래서 신학대에 붙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리스도 신학대(서울 화곡동 소재)에서 이듬해 3월에 신입생 지원을 받았고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대를 한 학기 다니다 보니 내가 믿는 하나님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 달라서 신앙에 혼란이 왔다. 신학대를 그만 둘 생각을 했었는데 김진건 장로님(그 당시 그리스도신학대 교수, 후에 총장까지 역임)께서 사진기를 줄 테니 전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라고 하셨다. 어느 날 전남 안자면 자라리의 섬교회를 갔더니 서울에서 전도사님이 왔다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아이들이 창문에 돌맹이를 던지며 “왜 니네만 예배보노..”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어린이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린이 사역 시작
어린이 사역을 하려고 하는데 그 당시 마땅한 교안이 없었다. 그래서 신학자, 교육학 박사들과 함께 교안을만들기 시작했다. 신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주일 공과를 겁도 없이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리방으로 써서 등사기로 인쇄해서 품질도 안 좋지만 억지로 만들어 전국에 프린트해서 보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처음 반응이 ‘뭐 이런 교재가 다 있나’ 이랬다. 그러다가 교사 강습이 필요해서 72년 신학교 2학년부터 내가 다니던 신학교 내에 교회학교 연구소 만들어서 전국 교사들을 불러놓고 강습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도 아는 게 없었다. 신학생이긴 했지만 정식으로 기독교 교육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모든 게 다 내 안에 있는 감각으로만 했다. 인형극도 혼자 만들어서 하고 여하튼 열심히 했다. 다행히 교사들의 반응은 좋았다. 나도 그렇게 강습회를 이끌다가 스스로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강습회란 강습회는 다 쫓아다니면서 배웠다. 그러면서 노트필기 한 것이 약 6-7권 되었다.
군에 가서도 계속된 어린이 사역
신학대 3학년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나는 ‘교단에 공과가 없으니 여기에서도 공과를 써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보초를 대신 서 주면서까지 공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고참한테 들켜서 쓰던 공과를 뺏겨서 찢긴적도 많았다. 어떤 고참은 그 종이에다 코를 풀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썼다. 사실 공과를 쓰려면 적어도 네 가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어린이를 잘 알아야 하고(아동학), 교수법을 잘 알아야 하고(교육학), 심리를 잘 알아야 한다(심리학). 그런데 나는 그런 것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쉬지 않고 썼다. 그러다가 내가 그 동안 정리한 노트를 보면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린이 설교법, 동화법, 등등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모아 그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일했던 잡지사 ‘참빛사’에 매월 투고를 하기 시작했다. 빠지지 않고 하다 보니 제대후에는 30개가 넘는 투고를 하게 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군종을 맡아 울진부터 강릉까지 걸어다니면서 분초(각 초소)마다 예배를 드리고 다녔다. 지나가다가 동네 교회가 보이면 거기서 예배 드리고 아이들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치면서 다녔다.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신나게 다녔던 것 같다.
종이비행기를 날리기 시작
강원도 지역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난생 처음 받는 편지로 복음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지를 쓰다 보니까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많이 써서 여러명의 아이들에게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답장이 금방 금방 왔다. 이것을 뭐라고 이름붙일까 생각하다가 종이비행기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종이비행기’ 하면 기독교적 냄새가 강하게 나지 않으면서도 어린이가 생각나고 아이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이름인 것 같다. ‘이 편지를 읽고 다른 아이들에게 날려라. 그래서 이 비행기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아이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종이비행기를 쓰게 되었다.
본격적인 어린이 사역 시작-50여권이 넘는 어린이 교육책 저술과 강연
제대를 하고 나서 책을 만들어 50권을 생명의 말씀사에 가져다 놓았다. 일주일 후에 다 팔렸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책을 더 써보라는 권유에 ‘교회 학교 교수법’, ‘손유희 교본’, ‘어린이 교실’, ‘성경에서 따온 레크리에이션 교본’ 등등 약 50여권의 책을 쓰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 교육선교회라는 단체를 시작하면서 강사로 많은 교사들을 가르쳤다. 군 제대후에 참빛사 주관을 맡았었는데 언론 통폐합 때문에 잡지가 폐간되었다. 그 후 과학원 어린이 교회를 개척했고, 6년 후에는 공항그리스도 교회에서 목회했다. 동시에 하루에 교사 강습회를 2-3번하면서, 신학대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정말 바쁘게 살았다. 80-90년대는 어린이 선교, 어린이 교육이 정말 활발했던 때이다. 한 번 강의할 때 7000명씩 모이고 여름 성경학교 때는 전철 타면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예수님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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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에 만들어진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로고 | |
주님께서 미국으로 부르시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교회대로 안정이 되어 가고 어린이 사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영적으로 내가 너무 메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 개척을 생각하던 도중 김진건 장로님(뉴욕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께서 이곳으로 나를 부르셨고 트레일러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교회 건물도 짓게 되었고 처음에는 20명도 안 되던 곳이 지금은 약 150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동네가(코로나, 뉴욕) 꽤 유명한 우범지대이다. 한국사람 중 아무도 이 지역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교회는 가난한데 있어야 한다.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면서 이사가지 않고 여기다 성전을 건축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동안 모였던 교인이 70명이 나갔다. 그래도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결국 2년 만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1년 전 갈 곳 없었던 한인 경로회에 무료로 장소를 빌려주어 한인 커뮤니티도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한인 경로회는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쓰고 있고 수요일마다 수요예배를 어르신들과 함께 드린다.
여전히 계속하게 된 어린이 사역
그러다가 2년 전에 다시 종이비행기 사역을 미국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인터넷 시대라 종이는 아이들에게 어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터넷 종이비행기 사이트를 만들게 되었고 한달 전에는 완전 사이트 개편을 했다. 어린이 사역은 평생 해야 할 사역인데 이 사역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5형제중 한 명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지금 네 명의 형제가 함께 이 사역을 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딱 두가지
지금 목회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아이들이 '종이비행기'와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이 두가지만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내 이름을 내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아이들이 이것을 통해서 쉽고 재밌게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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