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에는 요 21장이 있다.
요 21장이 복음서의 결론이다. 이후에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연결하는 고리 같은 것이 요 21장이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
첫번째, 삶의 현장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고리가 되라.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땅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 속에서 구현하길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주께서 부활하신 직후에 바로 제자들을 땅 끝으로 내 모신 것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가라고 명령하신 곳은 갈릴리였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그들의 삶의 현장이요 삶의 터전이었다. 왜 땅끝으로 보내시기 전에 갈릴리로 보냈을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은 땅끝에서도 절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말로 갈릴리는 ‘고리’라는 말이다.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고리가 되라는 것이다. 땅끝은 절대 지구 반대편에 있지 않다. 여러분이 선 곳에서 계속 앞으로 나가게 된다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출발지인 이곳이 땅끝이 된다.
고리를 뜻하는 갈릴리에 먼저 보내셨다. 그 갈릴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복음과 교회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삼아주신 것이다.
요 21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참된 교회로 살아가는 데 고리란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볼 것이다.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 20장 19절과 26절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디베랴. 우리는 이 요 21장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임을 알고 있다. 본문 1절은 디베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코 이 호수를 디베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있어서 이 호수는 선조들의 애환을 함께 해 온 갈릴리 호수였을 뿐이다. 디베랴는 정복자들이 사용했던 말이다.
신약 성경에 이 호수는 모두 갈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디베랴는 딱 두 번 기록되어 있다. 두 번 다 요한사도에 의해서 쓰여졌다. 로마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다. 16번을 지칭해 썼는데 14번을 갈릴리라고 쓰고 2곳에서는 정복자들이 칭하는 디베랴라고 표기했다. 한 곳은 요 6장.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이 일어난 장면에서이다. 백성들은 그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저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을 원하는 대로 성취시켜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베랴. 바로 황제의 바다. 그 곁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누구나 황제를 꿈꾼다. 황제를 부러워하고 꿈꾸는 이유는 황제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디베랴 바다를 황제의 바다로 말하는 것은 욕망의 바다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요한 사도는 황제를 꿈꾸는 사람들과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시는 예수님을 모습을 극명하게대비해서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믿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이로,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두번째, 교회로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결코 수도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은 허허벌판이 아니다. 욕망의 바다 한 가운데서 교회로 살아야 한다. 복음과 사도행전의 연결고리인 요 21장을 디베랴라고 기록했다. 이 욕망의 바다 속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욕망을 따라 사다가 일 주일에 한번 말씀을 듣는 것으론 욕망의 바다를 제어할 수 없다.
세상의 논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바다 가운데서 진리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교회의 참됨은 그 크기나 훌륭한 제도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서 얼마나 진리를 쫓아 사느냐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장면이 있다. 주께서는 성을 보고 우셨다.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성전을 찾아가서 열심히 재물을 드리면서도 욕망의 물질을 쫓아 사는 그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게서 이 뉴욕 땅에 오신다면 뉴욕의 온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주님을 향해서 할렐루야를 외친다면 기뻐하실까. 눈물 지으실까.
욕망의 논리로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진리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가 많아지고 숫자가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진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바다에 침몰해가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위함인가. 이거 자체를 위함인가. 그것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구분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식되면서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버렸다. 어떻게 우리가 후회없이 매일 참된 교회로 주님의 진리를 쫓아 살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다아신다. 못박히셨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부인하고 배신했는지 다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절대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에 비하면 인간의 믿음이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은 그들을 믿어 주시기 때문이다. 사랑을 베풀어 주면 바른 제자가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항상 실수하고 살지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여전히 나를 믿어주는 하나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깨달을 때 삶이 달라진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계심을 믿고 그 믿음에 응답할 때 이 욕망의 바다에서 진리의 금자탑이 세워질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헬라어로 펠로마. 소망한다는 뜻이다. 소망은 믿음과 구별되지 않는다. 소망의 다른 이름이 믿음이다. 내가 믿는다면 소망하는 것이고. 내가 소망하는 것은 그 안에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의 믿음의 결과인 것을 알았다. 내가 저 사울을 불러 사랑을 베풀기만 한다면.. 그 주님의 믿음에 일평생 응답한 결과가 성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에 나를 부르신 것이다. 그 믿음을 안다면 그 믿음에 응답하는 삶을 산다면 욕망의 바다위에서 진리를 발하는 진리의 등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 21:2-4)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필두로 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갔는가. 3년을 주님과 함께 다녔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후 욕망의 바다를 보고 다시 거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4절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그 자체가 이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한다.
한국어 성경으로 보면 ‘서셨으나’는 과거형, ‘알지 못하는지라’는 현재형으로 되어있다. 헬라어 원문에는 ‘서셨으나’는 과거형, ‘알지 못하는지라’는 과거완료형으로 되어있다. 즉 이 말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과거형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이 모습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들 안에 주님을 과거형으로만 인식하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한인사회에는 과거에 받은 은혜를 간증하는 문화가 잘 자리잡혀있다. 이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현재형으로 느끼며 사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현재형으로 내 삶의 그분에 대한 통찰력을 느끼고 사는 것이다. 주님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이로, 현재형으로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오늘 삶의 현장에서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때만이 참된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런 교회만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다.
항상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주께 능력을 간구하며 살라
세번째, 주님을 과거형으로 기억할 때 그 결과가 어떠했나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빈 손이었다.
세상에서 주님의 논리를 쫓지 않고 욕망의 법칙에 따라 살면 좀 더 큰 집, 좀 더 큰 자동차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빈손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주께서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소유했나를 묻지 아니하신다. 주께서 주신 생명을 어떻게 가꾸고 사는지 물으신다.
천하의 알렉산더도 빈 손으로 죽었다. 로마제국의 유적지를 찾아가보라 폐허밖에 없다. 디베랴 황제의 이름이 붙었던 도시도 페허밖에 없다.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제자들은 과거형으로 주님을 잊었다. 욕망의 바다에 빠져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빈손이었다. 내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산산조각이 되었을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주께서는 ‘애들아’라고 부르셨다.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부를 때 쓰는 언어다. 현재형으로 계신 주님께서 ‘아이들아’라고 부르신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일평생 어린아이의 심정을 잊지 않을 때만 현재형으로 계신 주님이 보이고 그 주님의 말씀이 담겨질 수 있다.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 사도는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후러싱 제일교회 30주년 기념인데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굉장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만한 일을 했구나. 그런데 바울은 뒤를 안 본다고 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분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면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능력만 간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기념식이 되면 안된다. 앞을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박히신 주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갈 때 더 크게 역사하실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건져올리는 인생을 살라
네번째 5절 하반절.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빈손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다. 다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처음부터 겸비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더 지혜로운 자일 것이다.
그 결과가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낮고 낮은 마음으로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 쪽배에 그 큰 물고기들이 잡혔으면 찢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찢어지지 않았을까. 이들이 건져 올린 것은 물고기.. 헬라어로 다섯글자.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다섯 단어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원자 이 단어의 앞자들로 이루어진 단어. 익피스. 물고기가 되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힐 때 물고기 표시를 하였다. 겉으로는 물고기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만 붙잡고 건져올린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 세월을 아끼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말씀은
요 21장이 복음서의 결론이다. 이후에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연결하는 고리 같은 것이 요 21장이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
첫번째, 삶의 현장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고리가 되라.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땅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 속에서 구현하길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주께서 부활하신 직후에 바로 제자들을 땅 끝으로 내 모신 것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가라고 명령하신 곳은 갈릴리였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그들의 삶의 현장이요 삶의 터전이었다. 왜 땅끝으로 보내시기 전에 갈릴리로 보냈을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은 땅끝에서도 절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말로 갈릴리는 ‘고리’라는 말이다.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고리가 되라는 것이다. 땅끝은 절대 지구 반대편에 있지 않다. 여러분이 선 곳에서 계속 앞으로 나가게 된다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출발지인 이곳이 땅끝이 된다.
고리를 뜻하는 갈릴리에 먼저 보내셨다. 그 갈릴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복음과 교회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삼아주신 것이다.
요 21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참된 교회로 살아가는 데 고리란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볼 것이다.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 20장 19절과 26절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디베랴. 우리는 이 요 21장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임을 알고 있다. 본문 1절은 디베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코 이 호수를 디베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있어서 이 호수는 선조들의 애환을 함께 해 온 갈릴리 호수였을 뿐이다. 디베랴는 정복자들이 사용했던 말이다.
신약 성경에 이 호수는 모두 갈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디베랴는 딱 두 번 기록되어 있다. 두 번 다 요한사도에 의해서 쓰여졌다. 로마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다. 16번을 지칭해 썼는데 14번을 갈릴리라고 쓰고 2곳에서는 정복자들이 칭하는 디베랴라고 표기했다. 한 곳은 요 6장.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이 일어난 장면에서이다. 백성들은 그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저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을 원하는 대로 성취시켜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베랴. 바로 황제의 바다. 그 곁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누구나 황제를 꿈꾼다. 황제를 부러워하고 꿈꾸는 이유는 황제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디베랴 바다를 황제의 바다로 말하는 것은 욕망의 바다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요한 사도는 황제를 꿈꾸는 사람들과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시는 예수님을 모습을 극명하게대비해서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믿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이로,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두번째, 교회로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결코 수도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은 허허벌판이 아니다. 욕망의 바다 한 가운데서 교회로 살아야 한다. 복음과 사도행전의 연결고리인 요 21장을 디베랴라고 기록했다. 이 욕망의 바다 속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욕망을 따라 사다가 일 주일에 한번 말씀을 듣는 것으론 욕망의 바다를 제어할 수 없다.
세상의 논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바다 가운데서 진리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교회의 참됨은 그 크기나 훌륭한 제도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서 얼마나 진리를 쫓아 사느냐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장면이 있다. 주께서는 성을 보고 우셨다.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성전을 찾아가서 열심히 재물을 드리면서도 욕망의 물질을 쫓아 사는 그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게서 이 뉴욕 땅에 오신다면 뉴욕의 온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주님을 향해서 할렐루야를 외친다면 기뻐하실까. 눈물 지으실까.
욕망의 논리로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진리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가 많아지고 숫자가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진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바다에 침몰해가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위함인가. 이거 자체를 위함인가. 그것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구분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식되면서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버렸다. 어떻게 우리가 후회없이 매일 참된 교회로 주님의 진리를 쫓아 살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다아신다. 못박히셨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부인하고 배신했는지 다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절대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에 비하면 인간의 믿음이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은 그들을 믿어 주시기 때문이다. 사랑을 베풀어 주면 바른 제자가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항상 실수하고 살지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여전히 나를 믿어주는 하나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깨달을 때 삶이 달라진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계심을 믿고 그 믿음에 응답할 때 이 욕망의 바다에서 진리의 금자탑이 세워질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헬라어로 펠로마. 소망한다는 뜻이다. 소망은 믿음과 구별되지 않는다. 소망의 다른 이름이 믿음이다. 내가 믿는다면 소망하는 것이고. 내가 소망하는 것은 그 안에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의 믿음의 결과인 것을 알았다. 내가 저 사울을 불러 사랑을 베풀기만 한다면.. 그 주님의 믿음에 일평생 응답한 결과가 성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에 나를 부르신 것이다. 그 믿음을 안다면 그 믿음에 응답하는 삶을 산다면 욕망의 바다위에서 진리를 발하는 진리의 등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 21:2-4)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필두로 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갔는가. 3년을 주님과 함께 다녔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후 욕망의 바다를 보고 다시 거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4절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그 자체가 이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한다.
한국어 성경으로 보면 ‘서셨으나’는 과거형, ‘알지 못하는지라’는 현재형으로 되어있다. 헬라어 원문에는 ‘서셨으나’는 과거형, ‘알지 못하는지라’는 과거완료형으로 되어있다. 즉 이 말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과거형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이 모습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들 안에 주님을 과거형으로만 인식하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한인사회에는 과거에 받은 은혜를 간증하는 문화가 잘 자리잡혀있다. 이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현재형으로 느끼며 사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현재형으로 내 삶의 그분에 대한 통찰력을 느끼고 사는 것이다. 주님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이로, 현재형으로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오늘 삶의 현장에서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때만이 참된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런 교회만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다.
항상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주께 능력을 간구하며 살라
세번째, 주님을 과거형으로 기억할 때 그 결과가 어떠했나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빈 손이었다.
세상에서 주님의 논리를 쫓지 않고 욕망의 법칙에 따라 살면 좀 더 큰 집, 좀 더 큰 자동차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빈손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주께서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소유했나를 묻지 아니하신다. 주께서 주신 생명을 어떻게 가꾸고 사는지 물으신다.
천하의 알렉산더도 빈 손으로 죽었다. 로마제국의 유적지를 찾아가보라 폐허밖에 없다. 디베랴 황제의 이름이 붙었던 도시도 페허밖에 없다.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제자들은 과거형으로 주님을 잊었다. 욕망의 바다에 빠져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빈손이었다. 내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산산조각이 되었을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주께서는 ‘애들아’라고 부르셨다.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부를 때 쓰는 언어다. 현재형으로 계신 주님께서 ‘아이들아’라고 부르신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일평생 어린아이의 심정을 잊지 않을 때만 현재형으로 계신 주님이 보이고 그 주님의 말씀이 담겨질 수 있다.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 사도는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후러싱 제일교회 30주년 기념인데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굉장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만한 일을 했구나. 그런데 바울은 뒤를 안 본다고 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분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면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능력만 간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기념식이 되면 안된다. 앞을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박히신 주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갈 때 더 크게 역사하실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건져올리는 인생을 살라
네번째 5절 하반절.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빈손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다. 다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처음부터 겸비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더 지혜로운 자일 것이다.
그 결과가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낮고 낮은 마음으로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 쪽배에 그 큰 물고기들이 잡혔으면 찢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찢어지지 않았을까. 이들이 건져 올린 것은 물고기.. 헬라어로 다섯글자.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다섯 단어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원자 이 단어의 앞자들로 이루어진 단어. 익피스. 물고기가 되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힐 때 물고기 표시를 하였다. 겉으로는 물고기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만 붙잡고 건져올린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 세월을 아끼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말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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