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부흥은 한국교회를 놀랍도록 각성시키는 부흥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죄성의 참된 비전과 하나님의 거룩성”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부흥의 열기는 2-3년을 넘기면서 점차 식어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부흥의 계절이 이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적인 능력의 결핍”을 깨달은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부흥의 계절이 계속되기를 염원하면서 일주일간 기도모임을 갖게 되었다.

1909년 7월 12일에 시작된 이 기도모임은 갬블(Gamble), 리드(Reid), 스톡스(Stokes) 등이 주축이 되었으며, 오직 하나님만의 영광을 구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이 기도모임은 갑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을 쭉 펴서 한국을 축복하는 환상 체험’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내한하여 전국 순회집회를 가졌던 데이비스(George Davis)는 이렇게 증언한다:

“성령의 부으심이 갑자기 그들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더 이상 기도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손을 활짝 펴시고 한국을 축복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 일로 그들은 주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들은 더욱 깊이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다른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에게도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다. 그러자 한국인 10명과 선교사 2명이 자원하여 그들의 계획에 동참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달리 아무 도리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감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스톡스 선교사는 이런 일련의 기도운동을 통해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운행하심을 목격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맡은 선교구역에서만 ‘5만의 영혼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지방전도여행에 나섰다.

이 소식은 다른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 주었다. 이에 남감리교 선교부는 1909년 9월에 열린 연례모임에서 선교부 차원에서 이 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목표를 확대하여 “2O만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이후 이것은 1909년 10월 초에 열린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에서 “기도와 심사숙고 끝에” 연합공의회의 공식 전도운동으로 채택되었으며, 목표는 “백만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1,000,000 Souls for Christ)라는 표어로 수정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와 관련된 사람의 수효를 약 2O만 명으로 치더라도 실로 놀라운 계획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보기에 이는 단지 헛된 공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확신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이미 그 가능성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당시 동양지역을 순방 중이던 일단의 유명한 해외부흥사들이 입국했다. 채프만(Wi1bur Chapman), 알렉산더(Charles Alexander), 학니스(Robert Harkness), 데이비스(George Davis)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백만명 구령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당시 세계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던 피어선(Arthur Pierson) 박사, 감리교의 저명한 성결부흥사로 “대단한 능력의 설교자”인 모리슨(H. C. Morrison) 박사 등 다수의 세계적인 인사들이 내한하여 구령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들의 내한과 사역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한국교회의 비전을 견고히 해 주었으며, 구령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한 계기가 되었다.

연합공의회의 결정 이후 ‘백만명 구령운동’은 전국교회와 각 선교회에 의해 활발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전도대가 각 지역별로 조직되었으며, 이는 다시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중전도집회로 확산되었다. 즉 이는 교파의 벽을 넘어 손에 손을 마주잡은 초교파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영혼구령이라는 합창을 위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빚어냈다. 이와 관련해 조지 데이비스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선교사들은 이 운동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하고 가이드를 제시했으며, 반면 한국인들은 여러 날을 연보로 드리고, 무한한 열심과 열정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복음서를 구입했다. ‘금년 백만인’의 외침은 번갯불처럼 한국 전역을 휩쓸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영혼구령자로 더할 나위 없는 열정을 보여 주었으며, 수백 명이 천국백성이 되었다(KMF, 1910. 3).

이런 영적 분위기는 “백만인을 예수에게로, 주여, 우리 심령의 소원 허락하소서! 백만인을 예수에게로, 주여, 복음의 불을 확산하소서!”라는 후렴이 반복되는 이 운동의 주제가인 “백만명을 예수에게로”를 통해 급속히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특히 이 주제가는 3절에서 한국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노래함으로써, 민족 주권이 말살 되어가던 암울한 현실 속에 있던 많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백만인을 예수에게로, 슬로건을 진실되게 외치라. 백만인을 예수에게로, 이루어드려야 하나님의 사역. 한국의 울부짖음을 대단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훨씬 더 놀라웁도다. 악한 세력들이 그의 목적을 해치 못하리.”

비록 이 총동원전도운동은 일본정부의 박해 등에 의해 가시적인 목표가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끼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신자들은 이 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훈련하게 되었다. 수많은 신자들이 이 전도운동에 시간과 물질을 바치며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 와중에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공동체의식을 보다 견고히 갖게 되었다. 또한 이 운동은 각 교파간의 연합운동으로 전개됨으로써 신자들에게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일체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다.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