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에 한글을 깨치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예수님의 앉아계신 방 지붕을 뚫고 방안으로 내렸다는 성경 말씀을 읽고 예수님의 밥상에 흙뎅이나 지푸라기를 떨어뜨린 무례한 자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후에 성지에 갔다가 내가 어렸을 때에 상상한 것이 얼마나 틀렸는지 깨닫고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은 한국과 같이 초가집이나 기와집을 짓지 않고 돌로 집을 짓고 오늘날처럼 시멘트가 흔하여 슬라브를 만들 수 없었으므로, 나무를 얹고 무화과 나무나 야자나무 가지로 지붕을 덮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제 4호가 있는 곳은 와디 쿰란 곁인데, 쿰란 수도원과 똑같은 평지가 바로 흙이 씻겨 내려가 무려 70피트 이상 사람의 열 두 길도 더 되게 깊히 씻겨 내려간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의 비유를 실감케 하였다. 사해사본의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사람이 그곳에 올라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예수의 비유에서나 바울의 편지에서 신앙 생활을 건축에 비교하였다. 특히 바울은 성도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한다.(고전6:19). 예레미야는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민족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렘1:10). 뽑았다가 다시 심고, 파괴하였다가 다시 건설하는 농업과 건축의 은유를 쓴다. 쿰란 수도원은 사막에서 말씀의 우물을 파서 영원한 식목을 하였고, 또한 동시에 이스라엘의 견고한 집을 세웠다.

또한 성경에는 “집”이라는 말을 사람이 거처하는 개인 집만이 아니라 성전이나, 왕궁 등을 말할 때에 쓰는데, 유명한 나단의 예언과 같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Dynasty)를 세워주신다는 약속이다(삼하7:11). 물론 “네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라는 아모스의 예언은(암7:9) 여로보암 왕조를 폐하신다는 뜻이다. 집이 건축자재로 지은 건물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관(Institute)의 건설을 말할 때도 쓰였다.

쿰란의 엣센파는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 뽑았다가 다시 심는 하나님의 영원한 식목과 아울러(공동체 규범 vii. 5) 이스라엘의 견고한 집을 다시 세운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거룩의 집이요 아론을 위한 무한한 거룩의 회중이다… 그것은 시온산 성벽이요, 귀한 모통이 돌 위에 세워졌으며, 그의 기초는 움직이지 아니하고 그의 초석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론을 위하여 무한한 거룩의 처소이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완전과 진리의 집으로 영원한 계명에 따라 언약을 세울 것이다”(공동체 규정 viii. 5-10). 그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의 확고한 집을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믿고 있었다(다메섹 문서 iii. 19). 왜냐하면 확고한 반석 위에, 돌로 튼튼하게 집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하여야 하는데, 첫째는 왜 그들이 확고한 반석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 집으로 여겼느냐는 신학적 문제와, 둘째는 왜 새 집을 세웠느냐는 역사적 문제이다. 그들이 확고한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는 자의식은 집에 대한 수식어로 나타난다. (1) 새집은 “율법의 집”으로(다메섹 문서 B ii. 10, 13) 율법을 완전히 연구하고 완성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뜻을 계시하시고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2) 새집은 “이스라엘의 진리의 집이다”(공동체 규정 v. 6). 쿰란 공동체는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두움을 첨예하게 대립시켜, 모든 거짓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들에게 참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좇는 진리의 집이다. (3) 셋째 그 집은 “거룩의 집이다”(공동체 규정 ix. 6) 일반 평신도들은 학자들이 쉽게 말하지 아니하고 어렵거나 또는 잘 이해되지 않는 표현을 쓴다고 여기기 쉽다. 여기에서 “거룩의 집”은 “거룩의 집”으로 집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다. 거룩은 하나님께만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신성)이 임재하는 집이란 뜻이다. (4) 같은 인용구에서 “완전하게 행하는 그들에게서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집이다”고 말한다(공동체 규정 ix. 6). 예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말씀하신 바와 같은 그들의 온전함(perfection)과 온전한 거룩(perfect holiness)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과 일생을 다 바친 분이다.

두 번째는 왜 그들이 유다 광야에 나가서 이스라엘의 견고한 새집을 자시 짓게 되었는가? 새 언약을 세우게 된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유다의 집을 더 이상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다메섹 문서 iv. 11, 하박국 주석. ii,8).그들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불효 막심한 압살놈의 집이다(하박국 주석 v. 9). 이들에게 대한 책망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성벽을 세우고 회칠하였다(다메섹 문서 iv. 19. viii. 12,=B i.24-25)고 에스겔 13:10를 인용한다. “그들이[거짓 예언자들]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폭우가 내리면 회가 다 벗겨질 뿐 아니라 담벽 자체가 다 무너진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이들이 자기 집을 짓기 위하여 지계표를 옮긴 유다 방백과 같다(다메섹 문서 v. 20; viii. 3, B. I. 15-16). 이 말씀은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물같이 부으리라”는 호세아의 예언에서 왔다(호5:10, 참조 미7:11). 지계표는 율법의 한계이다(다메섹 문서 B ii. 25).

예수께서는 말씀을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자와 같다고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들은 솔로몬이 죽은 이후 이스라엘의 두 집이 갈라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유다 집에서 분리하여 하나님의 참된 도시에서 율법과 예언서(구약성서)의 말씀 위에 세워진 언약의 공동체의 집을 짓고 살았다(다메섹 문서 vii. 13-18). 그들은 모든 환난과 핍박이나 가난과 어려움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참된 평화와 안전의 은유로 확실한 이스라엘 집을 지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확실한 집을 세웠다. 그들은 기존 유대교 종교가 지계표(율법)를 옮기고 회칠한 담벼락 위에 세운 집이므로 하나님의 무섭고도 정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파멸할 것이므로 유다 광야에 흩어진 돌로 그들의 생활하는 수도원을 건설하고, 신앙과 경건으로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율법)의 주초 위에 진리와 거룩과 온전함을 벽돌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확실한 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