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신학자들이 주기도문의 ‘아버지’ 사용에 대한 남녀불평등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여성 신학자들은 오는 30일 공청회를 열고 ‘아버지’ 표현을 대체한 여성신학자들의 주기도문 번역안을 공개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본지는 칼빈신학대학교 김의환 총장을 만나 주기도문의 ‘아버지’ 표현의 의미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주기도문, 사도신경 고백의 문제들을 짚어본다.

-KNCC 여성위원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여성신학자 3개 단체가 '주기도 새번역안 여성연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이종윤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는 ‘주기도문·사도신경 재번역특별위원회’가 내놓은 새 주기도문에 ‘아버지’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양성평등적 표현을 사용한 주기도문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 일고 있는 주기도문의 ‘아버지’ 표현을 둘러싼 논란들을 바라보는 김의환 총장의 의견을 말해달라.

히브리어 원서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렇게 주기도문을 시작하신다. 성경대로 번역해 ‘아버지’라 표현한 것이지 성경에 없는 것을 삽입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라 표현했으며 이것은 전혀 여성 폄하의도로 번역한 것이 아님을 여성 신학자들이 알아야 한다.

-저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서 주기도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데 대한 의미를 제시했었다. 그 대략을 설명한다면. 또한 여성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 칭호 사용이 하나님을 가부장적 이미지로 고착시킨다고 보는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아예 어머니로서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라 할 때 아버지가 보여주는 그 사랑과 능력,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유비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나님 어머니’라고 불러서 나쁠 것은 없다. 어머니도 우리를 사랑하기에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쓸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칭호가 ‘아버지’다. 하나님이 택하신 칭호를 우리가 바꿀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인간의 부모관계로 유비시키면 잘못된 해석이다. 인간적인 유비관계로 이해할 경우 여성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과 하나님은 다르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번 새 주기도문 번역과정에서 남성 신학자들만이 참여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번 주기도문 번역에 여성신학자들이 참여했으면 더 좋을 뻔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인 배정은 아니었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가운데 가장 크게 칭찬하신 분은 막달라 마리아다. 성경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것을 전하여 기억토록 하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봐서도 성경은 여성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이시대의 정신과 오늘의 상황에 맞춘 시각으로 성경을 봐서는 안 된다.

성경을 주신 목적을 이해해야지 우리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석하게 될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 될까 두렵다. 성경은 남녀를 구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 목적을 알고 읽어야지 우리가 우리의 시작대로 ‘아버지’를 가부장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될까 염려된다.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차별을 한다면 분명히 죄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간 국가마다 남녀차별이 없어졌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성경에 수많은 여성들이 나오며 또 돌아가실 때도 예수님의 제자 중엔 요한밖에 그 자리에 없었지만 어머니와 여인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울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인을 극찬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동역자’라고 칭찬했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따라서 동격이다. 여자를 남자보다 못하다고 신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죄다. 주기도문의 ‘아버지’ 표현은 예수님께서 남녀 폄하차원에서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저서에서 한국교회가 주일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깊은 뜻은 알지 못한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표현했는데.

기도란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 교제를 떠나서 지나치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 졸라대는 것과 같은 기복적 열심을 갖고 있다. 이것은 기도를 잘못 가르친 결과라고 본다.

기도란 긴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관계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의 정도가 얼마나 긴밀한가의 정도가 중요하다. 보통 열심히 기도만 하면 되는줄 아는데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바른 기도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자기 욕심을 위해 너무 떼를 쓰면 안된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이웃을 생각하게 된다. 도움이 필요로 한 이웃이 보인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 뜻이 무엇인가. 나의 봉사를 통해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직적인 기도가 바로 올려졌다면 수평적인 봉사가 반드시 뒤따라오게 돼 있다. 한국은 기도는 열심히 하고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세상이 비판하는 것도 이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서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평소 사도신경 고백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도신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정확히 나와 있다. 제일 먼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에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다. 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나오고 그 다음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주의 뜻을 성령께서 이뤄나가시는 기독교의 핵심가르침과 삼위일체의 신앙이 모두 고백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바로 알고 섬기면 이단과 불건전주의가 없어지고 한국교회가 보다 건전한 교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