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는 인류문명이 새롭게 털갈이 하듯이, 20세기부터 시작된 문명의 세계관적 변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중대한 전환기이다.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에서 흘러나온 많은 신학들이 다원화의 물결 속에 자리잡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과 기독인들은 21세기에는 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또한 새로운 어떤 신학이 나올 것인가라는 것에 궁금해하며 주목하고 있다.
본지는 '20세기와 21세기의 접점에서 보는 신학'이란 기획을 마련,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들을 인터뷰하여 20세기의 신학을 정리하고 21세기 신학의 방향성을 모색, 전망하려 한다. 첫번째 주자였던 전 한신대 김경재 교수를 이어 감신대 이정배 교수를 만나봤다.
-한 세기가 종료되고, 또 다른 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하지만 지난 20세기의 신학을 되돌아본다면.
지난 20세기 인류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심각한 죄악성을 발견하는 동시에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전적인 부정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20세기를 여는 출발점이었다. 이런 신학을 대변했던 신학자가 바로 칼바르트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196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전후에 인간의 자기 성찰의 시대가 끝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겪으면서 세속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사람들은 초월적인 종교보다는 세속적인 삶의 이해에 더 관심을 가졌다. 세속화 시대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관점에서 종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속화된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터닝 포인트가 1970년대 이후 생겨나게 됐다.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부정, 초월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삶에서 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 안에서의 신의 이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신앙보다는 인간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세속화 시대이다.
1970~1980년대를 넘어가면서 또 다른 흐름이 일어난다. 종교 다원주의란 신학 흐름이 생겨난다. 과거에는 다른 문화를 알고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 등 현대시대의 빠른 정보 교환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와 종교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어떠한 문화나 종교를 다 받아들여 미국만의 어떠한 것을 만들어 냈던 도가니의 비유가 아니라 모자이크의 비유이다.
다양한 것들이 녹아져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멋이 살아나 전체의 멋을 이룬다. 획일적인 가치가 보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주의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과거에는 서양, 기독교, 남자 등의 동일성의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에 모자라면 늘려야 하고, 남으면 짤라야 했다. 지금은 동일성의 철학이 아니라 차이의 철학이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문화 속에 현재 기독교의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다원주의 속에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이 보수주의라면 열어주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또한 여성, 생태신학이 20세기 말에 확장되고 있다. 이와 환경생태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위기, 곧 영구하다고 믿었던 자연생태계의 위기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호소하고 있다.
"46억만년 된 지구 역사를 단 100년으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공룡이 출현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이고 크로마뇽인으로 불리는 현생인류의 출현은 불과 14일 전이며,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물질문명을 선사한 과학의 발전(산업혁명)은 불과 5분전의 일이다. 그러나 5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의 반대 급부로 인해 100년된 지구가 사실적 종말의 위기에 처하고 있는 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초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1초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위기가 양적 차원을 넘어 질적인 차원에까지 이르러 인간 및 자연의 안정성 자체를 구체적으로 긴박하게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은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이다. 성서의 진리와 과학이 분리되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만나서 공존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이런 차원이 21세기를 넘어가는 주요한 흐름이다.
-현대신학은 현대 사상의 도전에 직면하여 기독교 생존 전략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며, 현대에 대한 적응문제가 그 중심과제였다.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고심했고 그에 따른 많은 신학들이 전개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러한 고민들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말해준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대답이고 구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대답이라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가 구원이라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출발적 인식이 필요하다. 20세기에 직면했던 문제와 21세기의 문제가 다르듯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생겨나는 문제, 물음들에 대해 신학은 답해야 한다.
모든 신학적인 진리는 항상 역사성을 갖는다. 어떤 진리도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AD 3세기의 신학적인 답변을 21세기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신학적인 대답이 아닐 수 있다. AD 3세기 때에 나온 진리는 그 시대에 상황, 물음과 고민 속에서 나온 진리였다.
본인은 신학적 진리를 'It is…', 'It is not…'으로 표현하곤 한다. 신학은 'It is…'과 'It is not…'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에 적합한 'It is…'가 나오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It is not…'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신학은 또 다른 'It is…'를 만들어내야 한다. 21세기는 21세기에 적합한 'It is…'를 만들고 구성해야 한다. 신학적 행위라는 것이 이러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It is…'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It is…'를 창조하기 위한 중요한 보기가 된다.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으면 적합한 신학이 되지 못한다. 또한 신학이 세계, 지구라는 땅덩어리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교회만을 위한 것이 되면 축소된다. 하나님의 활동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만을 위한 신학이 신학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제한시켜 놓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신학은 이 시대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지 않으면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서에 '여자는 잠잠하라' 등과 같은 여성 폄하문제, 종에 대한 문제는 지금의 상황에 있는 현대인은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다. 21세기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신학을 해야 한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21세기의 사회와 이와 함께 신학의 모습을 그려준다면.
오늘날 많이 사용되는 조직신학(Systematische Theologie)이라는 말이 '교회교의학'을 대신하여 등장했다. 이 말은 신학자 폴 틸리히의 용어로서, 신학은 자기 고백적인 교회의 경험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제기되는 이성적 질문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도처에서 제기되는 진리 물음에 대해 신학이 이성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 이성이 제기한 질문이 복잡하고 다양하며 비판적인 현실임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신학의 대답 역시 체계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직신학이라는 말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제3세계 기독교인의 자의식이 중시되면서 틸리히적인 이성이 지나치게 서구적 범주의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서구적인 것이 무조건 보편적인 것으로 통용되어 온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성적인' 것이라는 틀 아래서 아시아적인 것은 언제나 평가절하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서구와는 다른 신학적 문제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많은 소유격의 신학, 즉 'ㅡ의 신학'이 생겨나게 된다. 여성신학, 생태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를 총칭하여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이라 부른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 경험 그리고 세계관에 근거하여 상상력을 계발하고 그 토대 하에서 신학을 재구성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성신학도 문제가 있다. 소유격의 신학이 세계 전체에 대한 조망은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신학이 과거와 같은 보편주의로 되돌아 갈 수는 없으나 보편에 대한 전망 자체가 상실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과 함께 세계는 여전히 신자유주의란 흐름에 따라 '부익부빈익빈'이란 정서가 대세이다. 교회는 대형교회만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에는 또한 신자유주의 틀 속에서 대형화되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보수적인 교회가 성행할 것이다. 이와 대립되어 탈자본주의, 탈식민주의 물결또한 더 거세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변수가 있다면 최근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복제가 실현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닥쳐 올 것이다. 이에대한 큰 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학자들은 21세기 초반을 이끌어 갈 신학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을 뽑고 있다.
21세기에는 이 두 신학의 사조가 함께 갈 것이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전체를 아우르는 틀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파편의 신학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성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보편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다른 학문이 보편을 부정한다 해도 신학은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복음주의 신학은 교회의 내적인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교회 안에만 갇힐 염려가 있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영향을 주지도 않는 자신만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교회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이와함께 21세기를 시작하는 한국 신학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
한국의 1920, 1930년대에 활동했던 이용도, 함석헌, 김교신 등이 지적했던 그 문제들을 한국신학이 다시 짚어봐야 한다. 선배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한국의 교회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
교회 내에 신학은 없고 경영학이 담론의 중심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선배 신학자들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토착신학이고 한국 신학이다. 깨침의 종교, 자기 성찰이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 가야 한다.
본지는 '20세기와 21세기의 접점에서 보는 신학'이란 기획을 마련,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들을 인터뷰하여 20세기의 신학을 정리하고 21세기 신학의 방향성을 모색, 전망하려 한다. 첫번째 주자였던 전 한신대 김경재 교수를 이어 감신대 이정배 교수를 만나봤다.
-한 세기가 종료되고, 또 다른 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하지만 지난 20세기의 신학을 되돌아본다면.
지난 20세기 인류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심각한 죄악성을 발견하는 동시에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전적인 부정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20세기를 여는 출발점이었다. 이런 신학을 대변했던 신학자가 바로 칼바르트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196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전후에 인간의 자기 성찰의 시대가 끝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겪으면서 세속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사람들은 초월적인 종교보다는 세속적인 삶의 이해에 더 관심을 가졌다. 세속화 시대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관점에서 종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속화된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터닝 포인트가 1970년대 이후 생겨나게 됐다.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부정, 초월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삶에서 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 안에서의 신의 이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신앙보다는 인간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세속화 시대이다.
1970~1980년대를 넘어가면서 또 다른 흐름이 일어난다. 종교 다원주의란 신학 흐름이 생겨난다. 과거에는 다른 문화를 알고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 등 현대시대의 빠른 정보 교환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와 종교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어떠한 문화나 종교를 다 받아들여 미국만의 어떠한 것을 만들어 냈던 도가니의 비유가 아니라 모자이크의 비유이다.
다양한 것들이 녹아져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멋이 살아나 전체의 멋을 이룬다. 획일적인 가치가 보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주의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과거에는 서양, 기독교, 남자 등의 동일성의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에 모자라면 늘려야 하고, 남으면 짤라야 했다. 지금은 동일성의 철학이 아니라 차이의 철학이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문화 속에 현재 기독교의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다원주의 속에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이 보수주의라면 열어주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또한 여성, 생태신학이 20세기 말에 확장되고 있다. 이와 환경생태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위기, 곧 영구하다고 믿었던 자연생태계의 위기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호소하고 있다.
"46억만년 된 지구 역사를 단 100년으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공룡이 출현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이고 크로마뇽인으로 불리는 현생인류의 출현은 불과 14일 전이며,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물질문명을 선사한 과학의 발전(산업혁명)은 불과 5분전의 일이다. 그러나 5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의 반대 급부로 인해 100년된 지구가 사실적 종말의 위기에 처하고 있는 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초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1초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위기가 양적 차원을 넘어 질적인 차원에까지 이르러 인간 및 자연의 안정성 자체를 구체적으로 긴박하게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은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이다. 성서의 진리와 과학이 분리되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만나서 공존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이런 차원이 21세기를 넘어가는 주요한 흐름이다.
-현대신학은 현대 사상의 도전에 직면하여 기독교 생존 전략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며, 현대에 대한 적응문제가 그 중심과제였다.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고심했고 그에 따른 많은 신학들이 전개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러한 고민들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말해준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대답이고 구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대답이라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가 구원이라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출발적 인식이 필요하다. 20세기에 직면했던 문제와 21세기의 문제가 다르듯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생겨나는 문제, 물음들에 대해 신학은 답해야 한다.
모든 신학적인 진리는 항상 역사성을 갖는다. 어떤 진리도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AD 3세기의 신학적인 답변을 21세기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신학적인 대답이 아닐 수 있다. AD 3세기 때에 나온 진리는 그 시대에 상황, 물음과 고민 속에서 나온 진리였다.
본인은 신학적 진리를 'It is…', 'It is not…'으로 표현하곤 한다. 신학은 'It is…'과 'It is not…'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에 적합한 'It is…'가 나오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It is not…'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신학은 또 다른 'It is…'를 만들어내야 한다. 21세기는 21세기에 적합한 'It is…'를 만들고 구성해야 한다. 신학적 행위라는 것이 이러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It is…'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It is…'를 창조하기 위한 중요한 보기가 된다.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으면 적합한 신학이 되지 못한다. 또한 신학이 세계, 지구라는 땅덩어리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교회만을 위한 것이 되면 축소된다. 하나님의 활동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만을 위한 신학이 신학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제한시켜 놓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신학은 이 시대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지 않으면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서에 '여자는 잠잠하라' 등과 같은 여성 폄하문제, 종에 대한 문제는 지금의 상황에 있는 현대인은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다. 21세기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신학을 해야 한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21세기의 사회와 이와 함께 신학의 모습을 그려준다면.
오늘날 많이 사용되는 조직신학(Systematische Theologie)이라는 말이 '교회교의학'을 대신하여 등장했다. 이 말은 신학자 폴 틸리히의 용어로서, 신학은 자기 고백적인 교회의 경험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제기되는 이성적 질문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도처에서 제기되는 진리 물음에 대해 신학이 이성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 이성이 제기한 질문이 복잡하고 다양하며 비판적인 현실임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신학의 대답 역시 체계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직신학이라는 말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제3세계 기독교인의 자의식이 중시되면서 틸리히적인 이성이 지나치게 서구적 범주의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서구적인 것이 무조건 보편적인 것으로 통용되어 온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성적인' 것이라는 틀 아래서 아시아적인 것은 언제나 평가절하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서구와는 다른 신학적 문제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많은 소유격의 신학, 즉 'ㅡ의 신학'이 생겨나게 된다. 여성신학, 생태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를 총칭하여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이라 부른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 경험 그리고 세계관에 근거하여 상상력을 계발하고 그 토대 하에서 신학을 재구성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성신학도 문제가 있다. 소유격의 신학이 세계 전체에 대한 조망은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신학이 과거와 같은 보편주의로 되돌아 갈 수는 없으나 보편에 대한 전망 자체가 상실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과 함께 세계는 여전히 신자유주의란 흐름에 따라 '부익부빈익빈'이란 정서가 대세이다. 교회는 대형교회만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에는 또한 신자유주의 틀 속에서 대형화되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보수적인 교회가 성행할 것이다. 이와 대립되어 탈자본주의, 탈식민주의 물결또한 더 거세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변수가 있다면 최근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복제가 실현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닥쳐 올 것이다. 이에대한 큰 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학자들은 21세기 초반을 이끌어 갈 신학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을 뽑고 있다.
21세기에는 이 두 신학의 사조가 함께 갈 것이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전체를 아우르는 틀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파편의 신학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성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보편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다른 학문이 보편을 부정한다 해도 신학은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복음주의 신학은 교회의 내적인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교회 안에만 갇힐 염려가 있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영향을 주지도 않는 자신만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교회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이와함께 21세기를 시작하는 한국 신학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
한국의 1920, 1930년대에 활동했던 이용도, 함석헌, 김교신 등이 지적했던 그 문제들을 한국신학이 다시 짚어봐야 한다. 선배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한국의 교회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
교회 내에 신학은 없고 경영학이 담론의 중심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선배 신학자들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토착신학이고 한국 신학이다. 깨침의 종교, 자기 성찰이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 가야 한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