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과 기독교’ 이런 주제라면 가장 첫 번째로 조만식 선생부터 찾아야 하는데 요즘 시대가 문제라 생각해요. 조국 해방 60주년이 지났는데 나라 정세도 그렇고 한심한 것이 많아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조만식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 박재창 장로(성도교회·92)는 요즘 조만식 선생을 찾는 발걸음이 점점 줄어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워했다. 그나마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계속돼 왔던 고당의 뜻을 기리는 정기적 모임도 한 목사의 타계 이후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의 한숨은 더욱 컸다.
박재창 장로는 1962년부터 평안남도 도지사를 17년간 역임한 이후 1979년부터 조만식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직을 줄곧 맡아 오고 있다. 1930년 중학생 시절 남강 이승훈 선생 장례식에 참여했다 민족의 지도자에 대한 예우에 깊은 인상을 받고 조만식 선생이 교직을 맡고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한 이후 조만식 선생을 곁에서 지켜봐 온 몇 안되는 현존 인물이다.
“우리나라 선열들은 대개 일제하에서 투쟁을 위해 국외로 향했는데 조만식 선생은 아마 유일한 국내 사수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압박에도 외국으로 피하지 않고 국내에서 민중과 더불어서 고통을 받으며 등불 역할을 했고 해방 이후 크리스천으로서 공산주의와도 투쟁한 아마 일제와 공산치하의 시기를 지내며 지조를 지킨 유일한 인물일 겁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여운형 선생이 밀사 손치웅 씨(79)의 증언은 조만식 선생의 민중을 위한 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945년 9월 당시 경기고보 학생이었던 송 씨는 여운형 선생으로부터 평양에 가서 소련군정에 의해 연금돼 있는 조만식 선생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는데 소련군의 감시를 겨우 피해 만난 고당은 “내가 떠나면 이곳 백성을 돌볼 이가 없다”며 평양에 남아 있기를 고집했다.
조만식 선생이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위대한 업적이다. 조만식 선생은 인도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무저항주의을 펼쳐 ‘한국의 간디’로도 알려져 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 선생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박재창 장로는 강조했다.
“열국지사들이 일본에 대항해 피를 흘리면서 투쟁했다면 조만식 선생은 침묵의 투쟁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일종의 생활개선운동이고 국산품 애용운동이자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일본제품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못하지만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말 속에 일본품은 제외한다는 뜻을 품게 되는 겁니다.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면서 절제운동과 금주, 금연운동도 함께 추진했습니다”
조만식 선생이 평생 애용했던 무명 두루마기와 제주산 말총모자, 평양에서 생산한 고무신은 그가 얼마나 실천적 지도자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번은 주변 지인들이 중요한 행사를 준비하며 조만식 선생에서 ‘꼭 한번 양복을 입으라’고 권했으나 조만식 선생은 끝내 무명 두루마기를 벗지 않았던 일화는 이를 더욱 뒷받침 해준다. 물산장려운동에는 생활개선운동이기도 하다. 한복의 옷고름의 불편함을 조만식 선생은 단추로 대신했는데 이것이 개량한복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다.
“1920년 조만식 선생은 그의 스승인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는데 조만식 선생의 실천적인 삶과 인화 덕분에 물산장려운동은 삽시간에 나라 안에 번지게 됩니다. 국민들이 처참한 삶 가운데서 용기를 내게 하려고 소달구지에 ‘내 살림을 내것으로’라는 표어를 걸고 시가행진을 하는데 보통 시가행진을 하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점차 줄이 짧아져야 하는데 조만식 선생이 시가행진만 하면 줄이 점점 불어나게 되는 진귀한 현상이 벌어졌지요”
조만식 선생은 평생 ‘인화’를 교육의 덕목으로 가르쳤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를 세운 이후 조만식 선생을 교사로 초빙했고 나중에 조만식 선생은 이 오산학교의 교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일찌감치 조만식 선생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있던 일제는 1927년 학원에서 영영 조만식 선생을 추방했다. 조만식 선생의 교장 재임시기 한경직 목사가 겪은 일화는 조만식 선생의 ‘인화’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고당 선생은 당시에 전인교육을 실시 했습니다. 생활을 교육화, 교육을 생활화한 인물입니다. 한경직 목사가 한번은 밤에 공부를 하다가 기지개를 하면서 하품을 크게 했는데 그게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님이 노크를 하시더니 ‘하품은 누구나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방해될 정도로 크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을 했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그 이후 평생 기지개를 함부로 하지 않고 모든 조심스럽게 한다고 몇차례 설교에서도 말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겪은 조만식 선생에 대한 일화는 ‘고당 조만식 회상록’에도 잘 나타나있다. 한번은 학교운동회에서 청대, 홍대 두편으로 나눠 경기를 하던 도중 한 교사가 달리는 주자가 떨어뜨린 봉을 집어주어 그 팀이 승리를 하게 된다. 당시 운동장이 몹시 소란해 어떠한 교사가 와도 중재가 되지 않았는데 조만식 선생이 단상에서 ‘선생께서 봉을 집어주셨으니 상대편의 반대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오산의 전통은 이미 한번 내려진 결정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자 떠들던 학생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교장은 이만은 하여야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회상록에서 밝혔다.
“고당 선생은 민중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힘이 있었어요. 흥분을 자아내는 대중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화’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또 결국 고당 선생의 모든 가르침이 모두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부인이 어렵게 번 돈으로 마련해 준 새 명주이불을 강추위에 신음하던 걸인에게 덮어주어 나중에 명주이불의 행방이 알려지게 됐던 일화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낼 당시 고리대금업자 박 모 여인이 밀린 돈을 받으려 온갖 욕설을 퍼부었으나 오히려 감화를 받고 돌아간 일, 그리고 관동군 사령관 이다가끼 대장이 조만식 선생과 대면한 이후 고당의 고결한 인격을 알아보고 섣불리 이야기 하다 창피를 당할 것 같아 얼른 회담을 마친 일화는 고당의 훌륭한 인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위인 중 독특한 계기로 위인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는데 조만식 선생의 회심에 얽힌 일화도 매우 독특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조만식 선생은 청년시절 싸움대장이었고 술, 담배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두뇌가 명석해 장사에서도 큰 돈을 벌기도 했는데 사업이 실패한 이후 홧김에 놀음을 하다 ‘숭실학교에 입학해보라’는 권고를 받고 입학을 하게 되는데 이 일화도 매우 유명하지요”
숭실학교 입학을 아버지에게 허락받은 조만식 선생은 술동무와 화류계 동무들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숭실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이었던 배위량 선교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한다. ‘갈 지’자 걸음에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온 조만식 선생에 배 선교사는 “공부해서 무엇하려 하나”고 못마땅한 듯 말했는데 조만식 선생은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배 선교사를 감동시켰다.
“조만식 선생은 3.1운동도 함께 주도했는데 민족대표 33인에 들 수도 있었지만 자기보다 손위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생각해 양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 선생은 산정현교회 장로를 했는데 그 시대 장로는 요새 장로 이미지와는 격차가 다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위치였지요. 시민들끼리 소송하고 싸움을 할 때도 조만식 선생에게 먼저 심판을 받자하면 조만식 선생이 재판에 가기 전에 싸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농촌운동도 많이 기원을 했고 모든 삶이 ‘자행일치’ 즉, 아는대로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박재창 장로는 “조만식 선생을 아직도 다 조명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해방과 6.25 이후 조만식 선생에 대한 자료들을 일찍 찾고 민족의 스승으로 모셔야 했으나 이러한 활동이 뒤늦었다는 것이 박재창 장로의 말이다.
“아직도 제 힘이 모자라 조만식 선생을 제대로 조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민족의 스승인데 지금 우리는 대개 의병투쟁과 같이 무력적인 투쟁을 한 위인들을 조명하는 것 같아요. 물론 이런 분들도 유명해져야 하지만 이제 시대가 지나면 조만식 선생과 같은 올바른 삶과 미래를 내다보는 위인을 알아볼 때가 올것같습니다”
박재창 장로는 조만식 선생이 살아 있다면 지금의 사회를 한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도 장로지만 평신도 중에 모범을 보이는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우리 기독교인이 전체의 20%라고 하는데 이 엄청난 숫자를 갖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6.25 참전용사들이 다 적이 되고 맥아더가 통일을 못하게 했다고 동상을 없애는 그런 나라 꼴이 걱정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립묘지에 안장된 순국선열들은 모두 적이되는 겁니다. 지금 조만식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뭐라 말씀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무덤에 가서 물어 볼수도 없고... 아무튼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아닌가 생각해요”
조만식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 박재창 장로(성도교회·92)는 요즘 조만식 선생을 찾는 발걸음이 점점 줄어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워했다. 그나마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계속돼 왔던 고당의 뜻을 기리는 정기적 모임도 한 목사의 타계 이후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의 한숨은 더욱 컸다.
박재창 장로는 1962년부터 평안남도 도지사를 17년간 역임한 이후 1979년부터 조만식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직을 줄곧 맡아 오고 있다. 1930년 중학생 시절 남강 이승훈 선생 장례식에 참여했다 민족의 지도자에 대한 예우에 깊은 인상을 받고 조만식 선생이 교직을 맡고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한 이후 조만식 선생을 곁에서 지켜봐 온 몇 안되는 현존 인물이다.
“우리나라 선열들은 대개 일제하에서 투쟁을 위해 국외로 향했는데 조만식 선생은 아마 유일한 국내 사수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압박에도 외국으로 피하지 않고 국내에서 민중과 더불어서 고통을 받으며 등불 역할을 했고 해방 이후 크리스천으로서 공산주의와도 투쟁한 아마 일제와 공산치하의 시기를 지내며 지조를 지킨 유일한 인물일 겁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여운형 선생이 밀사 손치웅 씨(79)의 증언은 조만식 선생의 민중을 위한 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945년 9월 당시 경기고보 학생이었던 송 씨는 여운형 선생으로부터 평양에 가서 소련군정에 의해 연금돼 있는 조만식 선생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는데 소련군의 감시를 겨우 피해 만난 고당은 “내가 떠나면 이곳 백성을 돌볼 이가 없다”며 평양에 남아 있기를 고집했다.
조만식 선생이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위대한 업적이다. 조만식 선생은 인도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무저항주의을 펼쳐 ‘한국의 간디’로도 알려져 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 선생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박재창 장로는 강조했다.
“열국지사들이 일본에 대항해 피를 흘리면서 투쟁했다면 조만식 선생은 침묵의 투쟁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일종의 생활개선운동이고 국산품 애용운동이자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일본제품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못하지만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말 속에 일본품은 제외한다는 뜻을 품게 되는 겁니다.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면서 절제운동과 금주, 금연운동도 함께 추진했습니다”
![]() | |
| ▲고당 조만식 선생의 초상화 ⓒ조만식기념사업회 | |
“1920년 조만식 선생은 그의 스승인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는데 조만식 선생의 실천적인 삶과 인화 덕분에 물산장려운동은 삽시간에 나라 안에 번지게 됩니다. 국민들이 처참한 삶 가운데서 용기를 내게 하려고 소달구지에 ‘내 살림을 내것으로’라는 표어를 걸고 시가행진을 하는데 보통 시가행진을 하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점차 줄이 짧아져야 하는데 조만식 선생이 시가행진만 하면 줄이 점점 불어나게 되는 진귀한 현상이 벌어졌지요”
조만식 선생은 평생 ‘인화’를 교육의 덕목으로 가르쳤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를 세운 이후 조만식 선생을 교사로 초빙했고 나중에 조만식 선생은 이 오산학교의 교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일찌감치 조만식 선생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있던 일제는 1927년 학원에서 영영 조만식 선생을 추방했다. 조만식 선생의 교장 재임시기 한경직 목사가 겪은 일화는 조만식 선생의 ‘인화’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고당 선생은 당시에 전인교육을 실시 했습니다. 생활을 교육화, 교육을 생활화한 인물입니다. 한경직 목사가 한번은 밤에 공부를 하다가 기지개를 하면서 하품을 크게 했는데 그게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님이 노크를 하시더니 ‘하품은 누구나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방해될 정도로 크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을 했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그 이후 평생 기지개를 함부로 하지 않고 모든 조심스럽게 한다고 몇차례 설교에서도 말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겪은 조만식 선생에 대한 일화는 ‘고당 조만식 회상록’에도 잘 나타나있다. 한번은 학교운동회에서 청대, 홍대 두편으로 나눠 경기를 하던 도중 한 교사가 달리는 주자가 떨어뜨린 봉을 집어주어 그 팀이 승리를 하게 된다. 당시 운동장이 몹시 소란해 어떠한 교사가 와도 중재가 되지 않았는데 조만식 선생이 단상에서 ‘선생께서 봉을 집어주셨으니 상대편의 반대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오산의 전통은 이미 한번 내려진 결정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자 떠들던 학생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교장은 이만은 하여야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회상록에서 밝혔다.
“고당 선생은 민중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힘이 있었어요. 흥분을 자아내는 대중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화’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또 결국 고당 선생의 모든 가르침이 모두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부인이 어렵게 번 돈으로 마련해 준 새 명주이불을 강추위에 신음하던 걸인에게 덮어주어 나중에 명주이불의 행방이 알려지게 됐던 일화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낼 당시 고리대금업자 박 모 여인이 밀린 돈을 받으려 온갖 욕설을 퍼부었으나 오히려 감화를 받고 돌아간 일, 그리고 관동군 사령관 이다가끼 대장이 조만식 선생과 대면한 이후 고당의 고결한 인격을 알아보고 섣불리 이야기 하다 창피를 당할 것 같아 얼른 회담을 마친 일화는 고당의 훌륭한 인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 | |
| ▲조만식 선생의 생전 모습을 설명하는 박재창 장로 ⓒ 송경호 기자 | |
숭실학교 입학을 아버지에게 허락받은 조만식 선생은 술동무와 화류계 동무들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숭실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이었던 배위량 선교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한다. ‘갈 지’자 걸음에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온 조만식 선생에 배 선교사는 “공부해서 무엇하려 하나”고 못마땅한 듯 말했는데 조만식 선생은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배 선교사를 감동시켰다.
“조만식 선생은 3.1운동도 함께 주도했는데 민족대표 33인에 들 수도 있었지만 자기보다 손위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생각해 양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 선생은 산정현교회 장로를 했는데 그 시대 장로는 요새 장로 이미지와는 격차가 다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위치였지요. 시민들끼리 소송하고 싸움을 할 때도 조만식 선생에게 먼저 심판을 받자하면 조만식 선생이 재판에 가기 전에 싸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농촌운동도 많이 기원을 했고 모든 삶이 ‘자행일치’ 즉, 아는대로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박재창 장로는 “조만식 선생을 아직도 다 조명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해방과 6.25 이후 조만식 선생에 대한 자료들을 일찍 찾고 민족의 스승으로 모셔야 했으나 이러한 활동이 뒤늦었다는 것이 박재창 장로의 말이다.
“아직도 제 힘이 모자라 조만식 선생을 제대로 조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민족의 스승인데 지금 우리는 대개 의병투쟁과 같이 무력적인 투쟁을 한 위인들을 조명하는 것 같아요. 물론 이런 분들도 유명해져야 하지만 이제 시대가 지나면 조만식 선생과 같은 올바른 삶과 미래를 내다보는 위인을 알아볼 때가 올것같습니다”
박재창 장로는 조만식 선생이 살아 있다면 지금의 사회를 한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도 장로지만 평신도 중에 모범을 보이는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우리 기독교인이 전체의 20%라고 하는데 이 엄청난 숫자를 갖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6.25 참전용사들이 다 적이 되고 맥아더가 통일을 못하게 했다고 동상을 없애는 그런 나라 꼴이 걱정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립묘지에 안장된 순국선열들은 모두 적이되는 겁니다. 지금 조만식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뭐라 말씀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무덤에 가서 물어 볼수도 없고... 아무튼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아닌가 생각해요”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