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견 키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강아지와 함께 방에서 자기도 하고, 강아지가 커서 개가 될지라도 그 개집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을 것이다. 애완견이라 해서 요즘에는 외국에서 거의 수입하는 개들이지만 과거에는 토종개들이었다. 귀가 반쯤 덮이고 황토색깔을 한 개들이었다.

요즈음은 장난감처럼 보이는 개들을 사람처럼 신발까지 신기거나 칫솔질을 시키기도 한단다. 그런데 애완견들을 키울 때 유의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애완견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다가가는 것은 금물이다. 그들과 함께 산책하는 것은 좋지만 그들이 뱉어내는 배설물들을 치우는 것은 정말 짜증나게 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을 주지 않고 애완견들만 먹는 음식을 주기도 한다. 그래야 배설물을 적게 치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애완견들은 때를 따라 털을 갈기 때문에 봄이 되면 그 털들이 날릴 때 매우 큰 주의를 요한다. 그 외에도 애완견을 키울 때 드는 비용은 사람 한 사람을 양육하는데 드는 비용과 거의 맞먹는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애완견을 아끼는 이유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들 중 하나는 주인에게 충실하다거나 주인만을 따르고, 그리고 가는 정이 있는 것만큼 오는 정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도 없고, 사치도 없고, 그저 본 대로, 느낀 대로, 아는 대로 평범하게 이해하고 따라준다는데 있을 것이다.

힘든 사회생활에, 찌든 생활에 반기는 애완견은 정말 귀엽기만 하다. 그래서 기억으로는 1학년 국어책에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밖에 갔다 돌아오면 멍멍...” 한다는 문맥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정말 귀한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애완견들 가운데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썰매를 끄는 것처럼 사람의 일을 돕기도 한다. 장애인들에게는 덧없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귀하고 필요한 애완견이라도 너무 힘들게 하면 사나워진다.

예를 들면, 목에 사슬을 매고 키우면 성질이 매우 사나워진다. 경계심을 갖게 되어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집 대문에는 ‘개조심’이라는 어구를 내붙이는 집들도 가끔 본다. 이런 경우에는 개가 집을 지키는 경비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사나우면 사나울수록 주인에게는 덕이 될 것이다. 그만큼 안전하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손님들이나 객들에게는 매우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인데도 짖으면 괜히 두렵다. 물것만 같고 달려들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충실하고 착한 개라도 환경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주인에 따라 개들의 성질은 달라진다.

자녀의 행위나 행동은 청소년 다음부터는 대체적으로 친구나 매스컴을 통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부모의 영향을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부모에게서 늘 힘들게 자란 자녀의 성품은 날카롭게 되고 이해의 폭이 좁기도 하다. 부모의 삶을 보고 자녀들은 자신들의 습관과 행동들을 키워나간다. 공부하라고 너무 강요하지 않아도 부모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는 자녀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날마다 잔소리처럼 “공부하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게 되면 공부는커녕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행동을 말로 인해 바꿀 수 있다면 말을 듣고 누구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은 말로 이뤄지지 않고 마음의 의지가 변할 때에만 변하게 된다. 의지의 변화는 감동에 의해서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이성으로 인식하여 감동될 때 행동의 동기가 있게 된다. 동기가 있다고 해서 행동으로 모두 옮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새로운 동기 부여가 또 주어져야만 한다.

자녀 교육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부모의 성실한 삶과 신뢰를 자녀들이 보고 갖고 있다면 자녀들의 행동의 앞날은 밝다. 출세하고 돈 벌고 하는 전망보다도 사람답게 성실한 사람으로 사회에서 자신 있게 사는 것, 남을 도우면서 사는 것, 이웃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등등.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가정교육처럼 잔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들은 틀린 말이 아니다. 틀리지 않기 때문에 행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잔소리들이 대체적으로 올바른 말이지 경우에 어긋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잔소리를 듣고 행동으로 즉각 행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 옳은 말씀을 듣고 산다. 옳은 말씀만을 듣는 것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마는 않다. “전도하라”는 말씀이 백번 옳은 말씀이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무엇이 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 체험이 부족 한다든지 가정의 여러 일들로 번민에 빠져 있다든지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래서 잔소리와 같은 것, 즉 판에 박힌 소리로 성도들을 바로 이끄는 것은 정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진리의 음성은 결코 짜증이 아니다. 흐르는 냇가의 물소리와 같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같다.

잔소리보다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거나 행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애완견을 키우는 것만큼이라도 성도들을 아끼는 경우가 있었으면 한다. 물론 힘들게 하는 성도들이 있기는 하다. 애완견들 가운데서라도 거리의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애완견을 사랑하는 이유 가운데 큰 것은 단점보다도 장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성도들끼리 잘못된 점만 보기 시작하고 그것들을 가리켜 지적만 한다면 불쾌지수만 높이는 결과가 될 뿐이고, 나중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경우가 되기도 한다.

주님은 인내하신 분이시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언제까지나 기다렸던 분이시다. 그분의 사랑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래서 신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그분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살기로 작정했다.

힘든 사회생활과 복잡하게 일들이 꼬이다보면 성격마저 변하여져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모본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친구이시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시다. 너무 힘들 때에라도 그분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일들을 성실히 감당하도록 하자.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