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그래스 교수에 대해서는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신학자이며, J. I. Packer의 수제자로서, 금년 51세인 그는 21세기 최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 그는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위클립프 홀 학장이며, 가나다 리젠트 대학에서도 교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그의 채들은 대부분 평신도 양육용으로 씌어졌으나, 이 '현대 독일 기독론'(1986)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독일 개신교회의 기독론 연구 과정을 소상하고 깊게 소개하면서, 그 결과를 특히 영국의 기독론 연구 결과와 매우 심도 있게 비교한 점이 필자에게는 비상한 관심을 끄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필자는 오래 전부터 영국의 근대 신학사상의 무역사성(無歷史性, ahistoricity), 즉 삶의 실존성(existentiality)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그 기독론의 기초에 대해 일종의 회의와 거부감 같은 것을 가져왔었기 때문이었다.

맥그래스 교수는 이 책의 결론, 마지막 두 면에서 이렇게 적었다.

'교부들과 스콜라주의자들을, 그리고 그들 이후의 종교개혁자들과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를 크게 괴롭힌 문제들은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연구에서 숙고된 비평 문제들을 무시함으로써 다른 자들은 - 그리고 영국교회는 이런 어리석음을 예증한다 - 당시의 시대정신을 다루는 데 실패했으며, 따라서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했다'(p.296-7).

저자의 이 결론 중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은 ‘다른 자들은 오늘날의 연구에서 숙고된 비평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정신을 다루는데 실패했으며, 영국교회는 이런 어리석음을 예증하고, 따라서 현대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을 영국교회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상한 견해에 나타난바 영국인 신학자 맥그래스의 강한 자아 반성의 고백이다.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그 자신의 논의의 경위는 이렇다.

즉 영국에서는 중세의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1280?-1349) 이후 지금까지 손곱을만한 기독론 연구자가 거의 없었으며(p.9), 영국의 기독론이 이처럼 발전을 보지 못한 이유는 영국 신학이 시종일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접근'에만 그치고, 독일에서처럼 역사적, 비평적-실존적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가 본서에서 반복하는 주장이다(p.4, 8-9, 14, 37, 40, 85, 258, 279, 286-7). 기독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이란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초자연주의적 정통주의에 갇혀서,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의 잣대로만 복음을 이해하고 전하려는 교회의 비현실적 성경 해석과 설교의 풍토를 말한다.

따라서 저자의 본서 집필의 목적은 '고전적 유신론인 형이상학적 하나님 개념은 영국적 유신론이며, 그것은 곧 무신론이면서 반(反)유신론이므로, 이는 즉시 시정되어야 한다'(p.286)라는 그의 말에 요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거듭 밝힌다.

1. '현대 기독론의 중심 문제는 교부시대를 지배했던 존재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계시와 역사의 관계 문제이다. 교부시대에 지배적이던 형이상학적 실재관(實在觀)이 19세기 후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이해로 대체되면서, 필연적으로 전통적인 기독론 접근을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나타난 결과는 지금도 여전히 신학집단에서 강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역사 비평적 사고의 등장은, 고전적 고대로부터 상속되어 17세기 후반까지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지배했고, 영국에서는 지금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사고 시대를 종식시켰다. 기독교 계시는 더 이상 자연 및 역사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p.3-4). '영국에서는 지금도 형이상학적 사고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저자의 자아 비판 정신이 본서의 핵심이라고 본다.

2. '(독일 계몽주의의) 계시의 본성과 성경의 권위에 관한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과 의의라는 문제에 집중되고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비록 영국의 특히 성공회의 신학집단에서는 이런 도전이 무시되거나 그 특유의 평범한 방식(=형이상학적, 비역사적, 추상적 방식)으로 다루어졌지만, 그들의 독일 동료 집단에 의해서는 탁월하게 대치(代置)되었다'(p.6).

3. '독일에서 비롯된 사상이 영어권 세계의 신학적 논의에서 배제됨으로써 지금도 여전히 성공회 내부에 만연되어 있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신학의 풍토병적이고 맹목적인 오만함을 연장시키고 있다'(p.8-9, 각주 11). (맥그래스는 성경적 기독론에 대한 이 '풍토병적이고 맹목적인 오만함'은 성공회뿐 아니라 영국 개신교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본다).

4. '독일의 역사 비평적 방법이 산출한 기독론적인 결과들은 한 세대의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오해를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p.297). (맥그래스 교수의 본서 집필의 목적은 영국 신학이 이 오해를 속히 청산하게 되는 일이다).

5. 몰트만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부연(敷衍)한 그의 책'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81)에서 '형이상학적 신학은 하나님과 성경적 십자가 신학에 대한 반역'이라고 지적한다(p.258).

6. '형이상학적, 고전적 유신론자는 무신론자와 동일하다'(p.263).

따라서 맥그래스에 의하면 영국교회는 성공회나 개신교나 성경의 역사적 연구에는 눈을 감은채 실제로는 무신론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황당한 현실을 근본부터 변혁하고, '영국교회가 독일교회에 내어주고 있는 신학적 우위성을 되찾게 하고, 그것을 풍성케 하려는' 저자의 소망과 열정(p.9, 11)이 이 책에서 넘치고 있다.

7. 맥그래스는 자유주의 신학을 날카롭게 비평하면서도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 리츨(A. Ritschl)과 그의 학파는 형이상학이 신학에 침투하는 것을 강하게 회의했었다'(p.85)고 지적함으로서 자유주의 신학보다도 더 유해한 형이상학적 신학을 경계한다.

8. '예수의 역사성 증명에 필요한 정보의 입수가 불가능하고, 그 최소한의 핵도 나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의 역사성을 나는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못한다'는 불트만의 견해의 부당성을 맥그래스는 지적하지만(p.214, 219), 그러나 그는 불트만의 다음의 견해를 중요시한다: '복음을 자기충족적(自己充足的) 관념의 역사적 표명, 혹은 그것이 무시간적인 도덕적 진리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p.175), (=복음을 인간의 도덕이나 철학과 동일시 하면서, 그런 주장을 영원한 진리라고 강변하는 신학의 신봉자들과는 상관할 가치가 없고, 그들의 견해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뜻).

9. 영국의 신학, 특히 기독론이 독일의 그것에 뒤진 이유를 맥그래스 교수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이 '학생시절부터의 신학적 기본 틀에서 벗어나려는 변화의 의지가 부족하고, 그들이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십자가로 돌아가라', 정득실 역, 생명의 말씀사, 2003, p.165).

반면 독일에서는 16세기 이후부터 루터를 비롯해서 18세기에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칸트, 헤겔 등 일반에게는 철학자로만 알려진 석학들까지도 기독론 연구에 크게 기여한 점들을 이 책은 다음 같이 소개한다.

1. '독일 계몽주의가 영국과 프랑스의 짝들과 달랐던 점은 이 (원죄)교리를 비판하면서 보여준 신학적 정교성이었다'(p17).

2. 맥그래스는 칸트와 헤겔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루터의 기독론의 심오한 경지를 독자들이 깊이 있게 접하도록 거듭 소개한다(p.47, 89, 136, 147, 189, 206, 257-9, 268, 270, 276, 284-5).

3.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철학의 사변적 중심으로 규정하고'(p.43), 그의 변증법 철학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으셨던 하나님 자신의 수난 가능성'을 증거하려 했던 헤겔의 견해를 맥그래스는 본서의 결론 부분에서 다시 상세하게 풀이하는데, 몰트만, 판넨베르크를 이어서 독일 기독론을 최근에 활기 있게 규명하고 있는 윙엘(E. Jüngel)의 기독론과 200 년 전의 헤겔의 변증법 철학 안에서의 기독론과의 연계(p.255-289)는 과연 본서의 백미(白眉)라고 부를만한 중요한 부분이다.

'윙엘의 신학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관해 책임 있게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본회퍼)(p.270), 또는 '하나님이 버림을 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p.275, 윙엘의 주저<主著>, '세상의 비밀이신 하나님', p.1-16)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본서의 중심에 있으며, 또 윙엘이 '위로부터의 신론'(=정통신앙)과 '인간론적 신론'(=자유주의)을 예리하게 구분짖는 사실(p.258, 270), 그리고 이런 논의들은 '기독교적 이해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다'(p.275)는 윙엘이나 맥그래스의 공통 인식이 본서를 필자가 세계의 교회 앞에 추장하는 소이(所以)이다.

4. '죽음이란 본질적으로 하나의 전이(轉移)인데, 이 전이를 통해 변증법적 과정 안에 있는 유한자(=인간)의 대응자(하나님)는 이 과정의 최대한의 깊이에서 '사변적인 수난일(受難日)'에 도달하게 된다. 즉 '되어간다'는 변증법적 과정 내에서 부정(否定) 단계에 앞선 안티테제적(반립적<反立的>)인 유한성의 한 극단으로서 그 깊이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헤겔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는 감정' - (루터교의 찬송을 시사하고 있음을 유의하라!)은 '순수 이데아의 순간, 그러나 유일한 순간(=절대 진리가 나타난 순간)'이며,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비로소 하나님 자신이 되신다고 한다'(p.281).

여기서 맥그래스는 결론 짖기를 '그러므로 헤겔을 신학적인 무신론자, 심지어 그 선구자로 오해하는 것은 심각하게 오도된 것이다: '하나님의 죽음은' 단지 '하나님' 개념의 발전 과정에서 소극적인 한 전이적(轉移的) 단계로, 그의 변증법적인 전제들과 완전히 일치하며, 현저하게 영민(英敏)한 방식으로 시대정신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 이런 통찰들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죽었을 가는성에 대한 그의 깊은 고찰을 통해서였다’(p.281-2, 초역).

이처럼 이 책의 후반은 '헤겔적 함의(含意)' 안에서의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에 동참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수난 가능성'(vulnerability), 또는 '하나님의 가사성(可死性)' 논의가 오늘 판넨베르크, 몰트만, 윙엘 등에 의해서 깊이 탐구되기에 이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취급했다. 200년 전의 헤겔과 오늘의 독일 첨단 신학자들과의 사상적 연계가 본서에서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맥그래스 교수는 슐라이엘마허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데(p.13-70), 필자는 신학교 재학시절 이 신학자에 대해서 '자유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은 교수님들에게서 교육을 받았었으나, 이 책을 통해서 필자가 전에 모르던 그의 기독론 연구의 깊이를 여러 모로 깨닫게 되었다(p.30-44).

'슐라이엘마허의 '신앙론'(1842)에는 성숙한 기독론이 나타났으며, 이는 숙고의 가치가 있다’고 맥그래스는 보았고(p.35), ‘사상가는 그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분리 혹은 추상화(抽象化) 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p.35), '독일 계몽주의는 경험론적 오류와 정통주의의 마술적, 미신적 오류를 탈피해야 한다'(p.36), '구속자(救贖者)의 신적 권위는 신화적, 혹은 초자연적(=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된다'(p.40)는 슐라이엘마허의 견해들은 200 년을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선함 자체이다.

5. 맥그래스 교수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계시와 역사의 관계'를 거론하기 시작하여(p. 3-26) 이 주제를 책의 끝에서까지 일관되게 추구한다(p.291-5). 성경의 역사적 내용을 '냄새 나는 넓은 개천'으로 불렀던 레싱(p.4, 25, 26, 141)과, 프랑스의 데카르트, 네덜랜드의 스피노자, 독일의 라이마루스 등에 의해서 대표되는 계몽주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반(反)역사주의였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들 중 특히 독일의 다수 신학자들은 19세기 이후 오늘까지 비록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마침내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는 역사 자체'(부른너, p.148-9)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역사에 대한 추상적(抽象的)이고 무시간적인 초자연주의적 접근은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공허한 것이다'(아돌프 슐라터).

필자가 기독교 계시의 이해에서 다윗사(史)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 현대의 모든 독일 기독론 신학자들이 제시한 그 정교한 사변적 이론들은 성경 자체의 다윗사(史)를 그 논리적 증거로 제시하기 전에는 결말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필자는 보는 바이다.

맥그래스 교수가 조국 영국의 교회를 위해서, 특히 기독론 이해를 중심으로 이처럼 반성하는 모습에서 오늘 영국교회 이상으로 형이상학적 설교가 지배적인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배울 바가 매우 많다고 필자는 본다.

알리스터 E. 맥그래스 저, 김성봉 옮김/도서출판 나눔과 섬김, 2001,

한제호 목사/ 안양대학교 교목 및 교수,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초대원장, 한국성경신학회 초대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