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시미션 대표 조병호 박사는 '한국기독청년 학생운동100년사 산책'(땅에쓰신글씨)을 편찬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조 박사는 1945년 해방이후 한국 개신교 성장과 한국 민주화 성취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진·보수 학생운동을 비교적 균형자적인 입장에서 연대기적으로 기술, 과거 기독학생운동의 의의를 살펴봤다.
조 박사는 그의 프롤로그에서 "지금까지 존재 해 온 기독학생운동 양 진영의 대립과 적대주의 차원을 넘어서 서로를 역할 분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며 "이는 서로에 대한 오해로부터 화해를 찾아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기독학생운동의 시발점은 1910년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전 일제시대 때 기독청년학생들은 매년 실시되는 학생하령회(Summer Student Conference)를 통해 한일합방 후 1910~1919년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다지며 기독학생 연합운동을 펼쳐 나갔다.
조 박사에 따르면 학생하령회는 계절에 따라 하령회(夏令會), 춘령회(春令會)라고 불리웠는데 대다수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 서로간의 친목과 교양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국내 명사들을 초청하여 강연회, 사경회 등을 가졌다고 한다.
이같이 일제시대 기독학생들은 교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을 통해 운동의 역량을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3·1 운동의 기초 다지기 작업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조 박사의 주장이다.
이어 조 박사는 "사회적 기득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기독청년들은 기독교의 연합을 주도했으며 그 연합의 힘으로 기독교 복음을 포기 않은 채 다른 종교와 협력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1920년대에 들어 한국의 최대 현안이자 기독학생운동의 이슈였던 것이 농촌문제였다. 당시 한 보고서는 "한국 인구의 80%가 농민이며 그 가운데 80%가 소작인이고, 다시 그 가운데 80%가 문맹이며 고리대금업자의 노예"였다고 서술했다.
특히 3.1 운동 후 해방 전까지 기독학생운동은 사회주의와의 대립 그리고 신사참배 두 가지 면에서 큰 위기와 좌절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 조 박사는 "기독청년은 공산주의 세력과 한국 농촌을 놓고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는데 "한국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와 처음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이 있다"며 먼저 공산주의는 처음부터 반제(反帝)·반자본주의 운동과 함께 반기독교적 공격자세를 굳혀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기독교계 민족운동가들도 예외없이 사회주의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 그것을 주도하기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후자에 관해 대표적 인물로 이동휘(1893~1935)를 들어 1918년 러시아 하바로스크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사회당'을 창당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YMCA가 농촌운동에 뛰어들게 된 배경도 좌익사상이 청년들에게 만연되는 것을 우려해 기독교회가 적극적으로 농촌활동을 폄으로써 기독청년을 유물론적 사상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정치적·사상적 격변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혼란의 주무대가 바로 학원이었다. 이때 기독학생들은 '학원을 그리스도화 하자!'란 목표로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학내 신앙 계승운동을 시작했다.
조 박사는 당시 기독학생운동을 '교회연합 성격을 띤 기독학생운동' '경동교회 기독학생회' 'YMCA 재건 노력' '서울대학기독학생회' 등으로 크게 네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국기독학생운동은 해방을 전후해 단절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주장한 조 박사는 "기독학생들이 그 위기의 순간에도 캠퍼스 내 신앙을 계승해야 한다는 운동을 별였으며 그 결과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역설했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두 가지 운동이 태동되는데 그 하나는 복음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회복과 사회 구원을 추구하는 사회참여 운동이었다. 이같은 운동의 성격의 차이는 결국 기독학생운동이 진·보수 학생운동 양 진영으로 갈라지게 될 것임을 시사해 주기도 했다.
1953년 6월 10일 장로교는 신학 노선의 차이로 '기장'과 '예장'으로 분리되는데 이는 결국 1948년에 창립된 초교파적 기독학생 연합회였던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의 분열을 낳고 말았다.
조 박사는 "'기장' '예장' 양 세력은 두 번에 걸쳐 기독청년들을 놓고 대결을 했다"고 전했다. 첫 번째는 1953년 부산의 금정산 KSCF 총회 때 예장계에서 "기독학생운동이 강원용이라는 신신학파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회장 선거에 자파 후보를 내세워 당선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사건.
두 번째는 1955년 8월 11일 서울 난지도 KSCF 총회 사건이다. 실제로 이 사건을 전후해 기독학생운동은 진·보수 학생운동으로 양분된다. '예장' '기장'이 별도로 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조 박사는 "이때부터 소위 진보 진영에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을, 그리고 소위 보수 진영에서는 한국의 복음화 운동을 주도하여 각각의 운동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계속..)
조 박사는 그의 프롤로그에서 "지금까지 존재 해 온 기독학생운동 양 진영의 대립과 적대주의 차원을 넘어서 서로를 역할 분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며 "이는 서로에 대한 오해로부터 화해를 찾아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기독학생운동의 시발점은 1910년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전 일제시대 때 기독청년학생들은 매년 실시되는 학생하령회(Summer Student Conference)를 통해 한일합방 후 1910~1919년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다지며 기독학생 연합운동을 펼쳐 나갔다.
조 박사에 따르면 학생하령회는 계절에 따라 하령회(夏令會), 춘령회(春令會)라고 불리웠는데 대다수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 서로간의 친목과 교양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국내 명사들을 초청하여 강연회, 사경회 등을 가졌다고 한다.
이같이 일제시대 기독학생들은 교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을 통해 운동의 역량을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3·1 운동의 기초 다지기 작업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조 박사의 주장이다.
이어 조 박사는 "사회적 기득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기독청년들은 기독교의 연합을 주도했으며 그 연합의 힘으로 기독교 복음을 포기 않은 채 다른 종교와 협력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1920년대에 들어 한국의 최대 현안이자 기독학생운동의 이슈였던 것이 농촌문제였다. 당시 한 보고서는 "한국 인구의 80%가 농민이며 그 가운데 80%가 소작인이고, 다시 그 가운데 80%가 문맹이며 고리대금업자의 노예"였다고 서술했다.
특히 3.1 운동 후 해방 전까지 기독학생운동은 사회주의와의 대립 그리고 신사참배 두 가지 면에서 큰 위기와 좌절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 조 박사는 "기독청년은 공산주의 세력과 한국 농촌을 놓고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는데 "한국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와 처음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이 있다"며 먼저 공산주의는 처음부터 반제(反帝)·반자본주의 운동과 함께 반기독교적 공격자세를 굳혀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기독교계 민족운동가들도 예외없이 사회주의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 그것을 주도하기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후자에 관해 대표적 인물로 이동휘(1893~1935)를 들어 1918년 러시아 하바로스크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사회당'을 창당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YMCA가 농촌운동에 뛰어들게 된 배경도 좌익사상이 청년들에게 만연되는 것을 우려해 기독교회가 적극적으로 농촌활동을 폄으로써 기독청년을 유물론적 사상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정치적·사상적 격변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혼란의 주무대가 바로 학원이었다. 이때 기독학생들은 '학원을 그리스도화 하자!'란 목표로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학내 신앙 계승운동을 시작했다.
조 박사는 당시 기독학생운동을 '교회연합 성격을 띤 기독학생운동' '경동교회 기독학생회' 'YMCA 재건 노력' '서울대학기독학생회' 등으로 크게 네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국기독학생운동은 해방을 전후해 단절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주장한 조 박사는 "기독학생들이 그 위기의 순간에도 캠퍼스 내 신앙을 계승해야 한다는 운동을 별였으며 그 결과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역설했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두 가지 운동이 태동되는데 그 하나는 복음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회복과 사회 구원을 추구하는 사회참여 운동이었다. 이같은 운동의 성격의 차이는 결국 기독학생운동이 진·보수 학생운동 양 진영으로 갈라지게 될 것임을 시사해 주기도 했다.
1953년 6월 10일 장로교는 신학 노선의 차이로 '기장'과 '예장'으로 분리되는데 이는 결국 1948년에 창립된 초교파적 기독학생 연합회였던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의 분열을 낳고 말았다.
조 박사는 "'기장' '예장' 양 세력은 두 번에 걸쳐 기독청년들을 놓고 대결을 했다"고 전했다. 첫 번째는 1953년 부산의 금정산 KSCF 총회 때 예장계에서 "기독학생운동이 강원용이라는 신신학파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회장 선거에 자파 후보를 내세워 당선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사건.
두 번째는 1955년 8월 11일 서울 난지도 KSCF 총회 사건이다. 실제로 이 사건을 전후해 기독학생운동은 진·보수 학생운동으로 양분된다. '예장' '기장'이 별도로 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조 박사는 "이때부터 소위 진보 진영에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을, 그리고 소위 보수 진영에서는 한국의 복음화 운동을 주도하여 각각의 운동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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