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周) 장로가 강단에 올라와 내 곁에 서서 죄를 자복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 후로 다시 그러한 광경을 보아도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를 자복할 때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떨면서 번민으로 그야말로 신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금까지 그처럼 번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간음죄와 재물의 횡령을 고백하였으며 마침내 그는 마루 바닥에 주저앉아서 번민 때문에 그야말로 풀이 죽어 신음하였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부흥 운동과 20세기 교회의 부흥운동에 대해 학문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세계 석학 영국 Univ. of Edinburgh D. Kerr 교수, 중국 상해 복단대학교 석원화 교수, 영국 York St. John College 김창환 교수, 미국 Univ. of California 옥성득 교수 등과 장로회신학대 김인수 교수, 총신대학교 유상섭 교수, 연세대학교 김상근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이후정 교수, 전주대학교 김종윤 교수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지난 25일부터 26일까지 장신대 세계교회협력센터 국제회의장, 한경직 기념 예배당에서는 '20세기 개신교 신앙부흥과 평양 대각성운동'란 주제로 제5회 장신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세계 여러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학들이 한 자리에 모여 더욱 의의를 깊게 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 김인수 교수(장신대 역사신학)는 미국교회 대각성운동과 한국교회의 1907년 대부흥운동을 비교하면서, 유사점으로 개인과 사회의 회개와 도덕성 회복, 교회의 성장과 교육기관의 증가, 전도와 선교운동, 인권신장 운동, 연합운동의 실천, 애국운동을 들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부흥운동은 신자 각 개인이 죄를 참회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부흥운동의 기수들은 대개 회개를 강요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1737년 에드워즈가 주도한 노드엠턴 지방의 각성운동 첫 해에 약 300명의 교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각성운동은 미국 남부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장로교회의 부흥운동은 종교적인 한계를 넘어 사회적, 정치적 격변을 가져올 첫 번째 대중운동이었다. 무디(Dwight L. Moody)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선데이 목사의 중심적 메시지는 술과 주점을 공격하는데 있었으며, 미국이 1920년대 금주법을 통과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각성운동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악을 참회케 하였고, 사회가 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은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하여 참된 회개를 경험하게 됐다. 참된 회개와 성령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결단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1903년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 집회에서 하디 선교사가 회개한 것이 바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첫 봉화가 되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정월 사경회에서도 한 사람이 일어나 회개를 할 때 도미노현상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회개하기 시작하면서 대부흥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지은 죄악, 즉 도둑질, 간음, 불효, 이웃에 대한 증오와 모함, 심지어 살인한 죄까지 적나라하게 회개했다. 개인의 회개는 가정을 변화시켰고, 사회를 개조시키는 놀라운 변혁을 가져왔다.

김 교수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축첩제도가 확립되어 있어서 아무도 이를 죄악이라고 규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지만, 부흥운동을 통해 이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따라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죄 개념을 갖게 되었으며, 이 위대한 사건으로 한국 민족 교회의 정신적인 역사가 출발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또한 1907년 한 해 동안 평양의 부흥운동기간 중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의 수가 3,000명이 넘었다.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장로교회의 성장은 세례자 수가 12,506명에서 15,097명으로 29%가 증가하였고, 원입은 44,587명에서 59,787명으로 15,200명이 늘어 34%가 증가했다. 또한 한국교회 전체적으로는 1906년 18,107명의 교인이 1907년 39,613명으로 무려 118%가 증가했다. 부흥운동은 기독교 학교의 설립을 촉진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06년 6월, 208개의 학교가 이듬해 같은 달에는 344개로 늘어나 무려 130개 이상의 학교가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학생들도 늘어 1906년에 3,456명이 이듬해에는 7,504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각급 학교에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늘어났으며, 이는 앞으로 일어날 항일 운동의 선두 주자들이 늘어날 것을 예시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기미 3.1독립운동이 촉발되었고, 교회가 이 운동에 앞장섰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덧붙여 김 교수는 "한국에서는 부흥운동의 결과로 인권이 신장되고, 인간 차별의 전통이 서서히 붕괴되는 격었다"며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짓눌려 있던 여성들의 인권이 신장되고, 차별 전통이 깨어지고, 여성이 남성과 같은 위치에 서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예배당 안에도 남, 여 좌석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부흥운동 전후로 남, 여석 사이의 휘장이 걷혔고, 여자들도 교회에서 남자들과 같이 직분을 받아 봉사하기 시작했다. 상인계급에서는 부인에게 하대(下待) 하던 습관을 버리고, 황해도 감바위 교회에서는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쓸 것과 한 자리에서 식사할 것을 결정' 하였다. 각지에 여학교들이 설립되면서 남자 아이들과 같이 여자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교육을 시킨 것도 전통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권시장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한편, 김 교수는 미국교회 대각성운동과 달리 한국교회에서만 나타난 특징으로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기도회'와 온 교우가 한꺼번에 기도하는 '통성기도'를 제시했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회의 형태를 만들었으며, 이 새벽기도회는 부흥운동 때부터 한국교회에 정착되어 한국교회의 특유의 기도형태로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1907년 정월 사경회의 마지막 날 저녁, 그래함 리(Graham Lee) 선교사는 회중에게 기도하자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여러분이 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기도 합시다'라고 말하니 온 회중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 대부흥운동은 통성기도라는 한국 특유의 기도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어 새벽기도와 더불어 오늘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주요기도 방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미국과 한국은 그 문화적, 교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을 평면에 놓고 비교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지만, 두 교회가 경험한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은 모두 성령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성령운동은 인간의 벽을 넘는 것이기에 문화적, 교회적 벽도 넘을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21세기가 시작되어 역사는 새로운 천년기로 접어들고, 소위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세상이 휩쓸려 들어가고 있지만, 영원히 변하지 복음만은 여전히 모든 인류의 삶의 지표가 될 수밖에 없다"며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2007년의 문턱에서 한국교회는 교회와 민족을 위해 새로운 성령운동의 불길을 지필 때가 되었으며, 이로서 교회가 새 시대에 걸 맞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