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2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대화해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개최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에서 강원용 목사(평화포럼 이사장)는 '대화를 완성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에 본지는 강원용 목사를 만나 그의 대화 철학과 앞으로의 한국교회 대화합의 방향성을 들어보았다. - 편집자주


-지난 한복협 월례회에 참석해서 지난날의 회개할 일을 회고하며 특히 "6-70년대 대화와 화해의 운동을 매듭짓지 못한것을 회개한다"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기독교 화해운동을 시작될 당시에는 완전한 초교파 운동이었다. 모든 교파가 합해서 참 열심히 했는데 해방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교파가 합해지고 모두가 하나였다. 그런데 기독교계는 당시, 해방 직후에 총회를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는데 친일파라고 해서 물러가라고 하던 때다. 기독청년들이 200만이나 있고 3.8선이 눈앞에서 생길 판인데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하나되어야 되지 않느냐. 바깥에서 문을 닫아매고 항의를 해가지고 결국에 서로 분열은 안하고 소위 남조선기독교연맹을 먼저 만들어서 가게 됐다. 그러다가 각 교파로 감리교는 감리교,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갈라졌다.

기독교가 분열되면 안된다고 하나로 합해야 된다고 가장 강하게 운동한 사람이 본인이다.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고 교파가 갈린 이후에도 연합운동을 한 것이다. 결국에 국내에서도 교파운동을 하려고 만든것이 40년대에 한국기독교연합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미국에서 A. 매킨타이어(A . MacIntyre)란 사람이 이런 연합운동은 '첫째로 비신학이고 둘째로 카톨릭적이고 셋째는 용공이다' 하면서 몰아세우기 시작하면서 소위 연합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에 대화운동을 실패했다는 것은 이 사람들과 싸우게 되니 실제로는 기독교의 두 연합이 싸우는데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에 선 것이 되어버렸다. 기독교지도자협의회라는 것은 당시에 정부가 배후에서 조종을 하고 자연히 운동은 서로 기독교가 합해야 한다는 쪽인데 결과적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져 한 쪽에 서게 되니까 결국 대화가 막혀 버린 것이다. 결국 1953년에 장로교가 갈라지고 기독교장로회가 될 때 소위 그 보수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신(新)신학 진보파에 서게 된 것이고 이 배경에서 대화와 화해를 시키며 소위 말하는 진보세력에 서게 되었다.

대화와 화해운동은 65년 10월 18일부터 시작했다. 불교, 천도교, 유교, 카톨릭과 대화를 시도하자 기독교안에 굉장한 반대가 일어났다. '우상숭배나 하는 불교하고 무슨 대화냐' 하고 부딪히고 또 변명하기 위해 싸우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기독교는 서로가 다를지라도 서로 대화하고 화해하고 나가야 된다. 이것은 목사가 되기 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이렇게 밀리니까 자연히 한쪽에 서 있다는 모순이 생겼다.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이같은 상황에 휩쓸리지 말고 초연히 서서 그 모든 세력들을 화해시켰어야 하는데 그 일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회는 종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화해케 하는 사절단이다. 어느 특정한 하나의 교회에다가 강제로 묶어버리면 개신교는 더욱 안된다. 서로가 다른 교파이고 다른것은 다른 그대로 이해하면서 같은 점을 이해하고 협조해야 한다. 종교간, 노동자와 사용주, 정치계의 여야간의 대화 운동도 해왔지만 이 배후에 기본적인 것은 화해다.

요새 대화란 말을 많이 쓰지만 62년도에 시작할 당시에는 대화란 말이 한국에는 없었다. 67년도에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씨가 나와서 '정치도 대화해야 한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대화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화란 서로 다르지 않다면 대화가 필요없다는 것이다.

대화운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다르면 원수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서로 터놓고 대화하다 보면 '대립되는 쪽의 잘못된 것만 내가 알았구나', '내가 몰랐던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터놓고 이야기하면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잘못이 있었구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 다른 것이 차츰 줄어든다. 다른것은 다른데로 존중하고 서로 공통된 점은 같이 하며 협조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대화 운동이다.

정부도 처음에는 토론 공화국이란 말을 썼지만 그러나 토론과 대화는 전혀 다르다. 자기가 '옳다 그르다'하는 토론의 끝에는 이기고 지는 승패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대화는 다르다. 대화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자신속에 고쳐야 할 점을 깨닫고 무엇을 협력할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 이것이 되어야 한다. 하물며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대화운동의 가장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할 기독교가 이에 대해 움추려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NCC계통이나 한기총에도 잘못이 있다고 본다. 대화운동을 다른 종교, 노사간에는 추진했지만 기독교 안에서의 대화 운동에 전력했다면 그래도 기독교계가 좀더 나아지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동안 단절되다시피한 대화와 화해운동을 재연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인가

본인은 현 기독교의 문제는 이것이라고 본다. 요새 교황을 방문해 취임식도 하고 세계가 떠들썩하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회고해보면 당시 카톨릭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였고 유럽의 상황을 보게 되면 대단히 잘한 일이였다. 감리교는 영국에서 요한웨슬레의 하나의 부흥 운동으로 영국에는 성공회, 카톨릭이라 해서 굳어진 곳에서 웨슬레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장로교는 제네바에서 요한 칼빈이 운동을 통해 일어났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일어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고 결과도 좋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16세기의 독일도 영국도 아니다. 제네바가 아니라 한국땅에서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왜 아직도 거기에 매달려 대립하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21세기란 시점에서 한국이란 좁은 분단된 땅에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뭐냐. 교파간에 대립이란 있을수 없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개신교 교파가 148개라고 들었는데 나는 '148개다, 248개다' 이런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올만해서 나온 것이지 않은가. 우리의 문제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오늘의 달라진 상황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남북문제, 세계문제등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다. 거기서 서로 의견이 다른것은 차츰 대화로 풀고 같은 것만이라도 의견을 합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라는 것이 숫자도 많고 소리도 크지만 정말 성서가 말한대로 서말 가루속에 들어간 누룩,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맞은 현상황과 관련해 강원용 목사는 한국 교계에 만연되어 있는 교단 분파주의뿐 아니라 획일적인 통합또한 역시 시대와 맞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 송경호 기자
한국기독교장로회 50주년때에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와서 하는 말이 "오는 10년에 장로교가 합하자"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내가 "기독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왜 장로교만 합하느냐"고 말한 적도 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는 장로교 안에 '정통'이고 '합동측'이고 이렇게 될수가 없다. 나는 넓게 보면 한국에 기독교를 전부 합해서 크게 셋으로 본다. 하나는 서방 카톨릭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전세계적'이라는 말인데 교회 전체를 합해 놓은 것이 카톨리시즘(catholicism), 곧 동방의 정통교리다. 이에 비해 개신교라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곧 저항인데 이제는 저항의 대상이 달라졌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크게 보면, 서로가 협조하고 기계적으로 기구적으로 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전체를 말하면 이승만 박사는 '뭉치면 살자'고 하는데 그건 자기 중심으로 뭉치자였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총력 안보라며 자기 중심으로 뭉치자는 말이였다. 그러나 그건 안되는 것이다. 서로가 상호적으로 이해하고 협조해야 한다. 총회장을 누가 하느냐고 할 때에 '이번엔 예장계통에서 내자', '이번엔 감리교 계통에서 내자' 나는 이런 것에서는 별로 기대를 걸지 않는다. 대화를 통한 협력운동은 역사의 현장에서 절실하게 일어나야 한다. 내후년이 되면 나는 90세가 되는 사람이고 지금 내가 나서서 교회 연합운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본인이 앞서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방향이 맞다는 것이다. 보다 2,30년 아래에 후배들이 이끌어가고 있고 본인은 뒤에서 후원해 줄 생각이다.

-한국교회가 대사회앞에 선각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후퇴하는 감이 없지 않다.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예언자적인 정신이나 전통이 있다면 무엇인가

함석헌 선생이 영향을 받은 것은 일본에 우찌무라 간조, 소위 무교회주의 운동이였는데 당시에는 그런 운동이 생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교회안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성서에서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일하는 모습이니 '성서를 중심으로 하자'고 외쳐야할 이유가 있었다. 안병무 박사도 그러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민중신학이 나올 때에는 두가지의 배경이 있었다. 하나는, 국내에서 박 대통령이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고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 당시에는 기독교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편에 확실히 서야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북미주에서 흑인신학이 소위 차별받는 흑인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이것이 합쳐져 국내에 들어올만한 명분이 있었다. 오늘에와서 그 문제가 해소되거나 기독교안에서 문제가 시정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적인 민중은 오늘날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전체 패러다임이 바뀌어졌다. 한국안에는 여전히 이전날의 문제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긴급한 문제는 남북에 전쟁이 터지면 '올소독스(Orthodox)가 뭐다'하는 것이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매년마다 나오는 황사문제는 분명 6,70년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문제가 아니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현재 우리앞에 전개되는 가장 큰 문제에 매달려야 된다. 당시 시대의 예언자들이 이야기한 것은 당시의 상황(context)안에서였고 우리가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계승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기독교 복음을 말할 때 내가 이야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무엇이냐. '성경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돌비석에 씌워진 죽은 문자냐. 아니면 내가 살아있는 오늘날 여기에 살아 역사하시는 산 말씀이냐'는 그 차이다. 산 말씀이 되려면 오늘의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한다. 나날히 새롭고 또 항상 앞서가야만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되 나날이 새롭게 한다'는 말씀처럼 그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에도 정당성이 있다는 말이다. 새로운 과제가 우리앞에 와있지 않겠는가.

-새로운 문제라면 최근 강조점을 두고 있는 '생명'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렇다. 이 문제 앞에서는 기독교장로회고 감리교고 순복음이고 교회들이 가릴 필요가 없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란 '구원'을 사람의 구원에만 국한시키고 사람의 영혼에만 국한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 우주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나 영혼을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 당시때에 마니교나 조로아스터교처럼 되는 것이다. 조로아스터에 나오는 두개의 하나님, '선의 하나님과 악의 하나님이 있다'라는 이원론에 빠지기 쉽다. 정말 크게는 우주, 거기에 앞서 기후, 즉 기후에 따라 우리 전체가 죽고 산다. 기후에서도 한국, 전쟁이 터진다면 다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 상황에 촛점을 두자. 이 명제 앞에서는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다 통합측이다 문제될 것이 없지 않는가. 이 문제에 촛점을 둔다면 오히려 기독교인의 수는 오히려 적고 또한 약하다. 본인의 주장도 이 명제에 담겨있다.

-21세기 한국교회를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도력이란 무엇이라 보는가. 일각에서는 목회 현장에서 성공한 대형교회 목회자들만을 중심으로 리더쉽이 편성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강원용 목사는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구원을 사람의 구원에만 한정시킬 때 이원론에 빠질수 있다"고 경고하며 창조 만물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대형교회 자체만을 두고 좋다,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대형이냐, 소형이냐하는 크기를 떠나 교회라는 것이 왜 있는 것인가. 제과회사는 과자를 만드는 곳이고 시멘트 공장은 시멘트를 만들지만 교회란 곳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지금으로부터 5,60년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세계 신학자들이 모여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 결국 마지막에 난 결론은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데 교회가 크면 좋지 않은가? 다만 문제는 교회를 하나의 기업체로 만들어놓고 묶어 두려하는 방향만큼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크기를 떠나서 다만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세운 예수님의 몸된 교회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고 허허벌판을 누리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는 삶이였다. 세상을 위해 일하자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좋다. 다만 힘을 만들때 만들더라도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제대로 서야 한다.

교회의 크기라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가장 잘못된 목사란 무엇인가. 그저 교인들을 어찌되든지 끌어들여 자기 교회에 모아놓고 교회만을 위해 살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이다. 목사의 머릿속에는 항상 세상으로 나아갈 이 사람들을 세상속에 들어가게 해서 제 구실을 다하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순전히 교회라는 기관을 위해 교회가 서 있다면 매우 잘못된 방향이다.

지난 한복협 모임에서 조용기 목사, 그분의 이야기를 참 좋게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먹이고 돌보라 했는데 그일을 다하지 못했다, 교회가 잘못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던 때에 그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연이 파괴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그런 방향으로 간다면 얼마나 좋은가. 수십만의 교인들이 이같은 방향으로 돌아선다면 굉장히 일이다. 방향은 바로 보고 있다. 다만 그대로 실천할 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한국교계의 대표적인 원로이자 진보 기독교계의 거장으로서 지금의 신학계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작년에 들은 바로는 한국에는 120개 정도의 신학교가 있는 것으로 안다. 수가 많다고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120개나 되는 학교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교회를 위해 희생하겠다며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부인 베드로를 부르시며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도해서 교회로 오도록 전도하는 것이고 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반대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에 물으신 것은 무엇인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을 되풀이 해서 물으시고 내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결국에는 낚시질을 한다는 것이 나쁘다가 아니다.

그런데 실제 양들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기록돼 있다. 양들 속에 들어가서 몸을 던져야 하는 그 양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불신자를 교회에 나오게 하고 주일날에는 붙들어 두는 것인가? 성도 100명을 1000명되게 하는 것인가? 좋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신학이 진보냐 보수파냐는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살겠다' 하는 아름다운 결실이란 구체적으로 뭐냐. 이 점을 묻고 싶다.

-한국교회안에서도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간에 대화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종교다원주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보수 신학계의 대담을 제의할 경우 보수신학계는 '대화는 곧 긍정'이다 하는 위기의식때문에 거절하기도 한다.

종교다원주의 같은 경우는 오래 전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종교간의 대화라는 것도 내가 세계에서 제일 처음 일으켰다. 본인이 가장 이해하면서도 동의하지 않는 것은 결국 기독교도 불교도 모슬렘도 같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산봉우리는 같은데 그 정상에 오르기까지 하나는 언덕길로 하나는 개울길로 가는 것이지 결국 마지막 목적은 같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또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동양에서 나왔다고 하는 역사적인 연유가 다를 뿐이지 결국은 기독교도 불교다 다 같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철두철미하게 크리스천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요"라고 말할수가 없다. 다만 예수님이 보여준 그 길을 가는데 가고보니까, 현장에 들어가 일하다 보니까 이 일이 내가 믿는 그리스도교인만이 할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논쟁과 관련, 타종교와 기독교가 하는 일이 같을 수는 있어도 복음의 근본적인 차이까지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했다.ⓒ 송경호 기자
내가 그리스도교를 믿기때문에 다른 종교와 같지 않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곳이 이북인데 기독교는 단순히 '불쌍하니까 돕는다'고 하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들 안에서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다. 그 고통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를 본다. 구체적으로 내가 예수를 보고 결과적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굶주린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한국에 유교가 그런지는 몰라도 공자의 살신성인, 인을 실천하기 위해 죽어도 좋다하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것이지 결국, 천교도나 불교나 천주교가 말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틱낫한이 말하는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란 책을 보면 대단한 사람인데 예수님과 부처님을 똑같이 생각한다.

그 사람의 글에 대해 나는 상당히 기본적인 평을 했다. "당신은 그렇게(같다고) 말하지만 결코 같지 않다." 그러나 탁닛한은 "둘이 같은데 예수는 서른 세살에 죽었고 부처는 장수해서 입적했고 이런 점이 다르다. 또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모양은 비슷하지만 맛이 다른 과일과 같다"고도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불교에는 근본적으로 원죄사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 죄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은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

불교는 도를 닦으면 나로 하여금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르다는 것을 자꾸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고 하는데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라.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 역사의 현장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점을 이야기하려는 자체를 반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거기에 있지 않다.

-한국의 양극화는 비단 대사회적인 문제만이 아닌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보법 폐지나 사학법 개정등 사회적인 이슈로 인해 양분되며 극단적인 대립의 모습을 보여왔는데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한국교회의 문제는 양극화라기 보다는 대립이다. 사람들이 너무 좁게 본다. 좁게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 보수주의고 경건주의고 신령파고 모두 그러하다. 사회 구조악을 주장하면 보수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하지만 양쪽이 아주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것만을 붙잡지는 말아야 한다. 삶의 현장을 보라. 보수파라고 해도 '이웃 사랑을 네 몸과 같이 하라'라는 말을 거부하진 않는다. '개인이냐 사회냐' 하는데에는 서로 말이 있겠지만 이웃에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은 보수파라도 다를수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이웃을 사랑한다는게 영혼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영혼이 육체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이교도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결국 내 이웃이라는 것은 전체 생명이다. 내 생명이란 무엇인가. 태양빛이 차단되면 난 죽는다. 공기가 들어 오지 않아도 죽고 물을 마셔야만 사는 것이다. 바다와 육지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는 먹고 살고 있다. 이것이 끊어지면 죽는다. 부자다, 가난하다 이런 것을 떠나 사람이 살자고 한다면 태양빛이 있어야 하고 공기가 맑아야하고 물이 더럽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 "아 그건 환경론자나 생태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다" 하는데 그건 말이 안된다. 막연하게 영적이고 인격적이고 하는 추상적인 말만 해서 그렇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한 개인은 혈연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간에 서로 어울려 살게 되어있다. 요새에는 어떤 신학이 나와있는지 전부 읽진 못하지만 가령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세기 신학자로서 칼바르트, 브론노, 몰트만, 불트만등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하여 가장 깊이 알았던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가 바로 알버트 슈바이처라고 생각한다. 신학자고 음악가고 의사고 그 사람이 선교사로서 아프리카로 가기도 했는데 결국에 생명에의 외경, 생명을 향한 존중을 그는 부르짖었던 것이다. 칼 바르트도 인간의 생명만을 생각했다. 슈바이처와 같은 사람은 나무 한 단을 써도 다 구부러져 못쓰게 된 나무를 잘라썼지, 생생한 나무를 잘라 쓰지 않았다. 밤에도 화장실을 가려다가 고양이가 깰까봐서 다른 길로 돌아나갔다. 이같은 사람이 진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던 사람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사랑만 알려고 하니까 그런것은 사랑도 아닌것으로 안다.

12세기 성 프란시스는 44세에 숨을 거두면서 부른 노래가 태양의 노래, 23절중에 6절이 우리 찬송가다. 저 태양, 저 달을 만든 하나님,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찬양하라. 흘러가는 구름 하나 태양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한다. 오늘날은 이 위대한 삶을 한 성자의 삶으로만 보고 도무지 교회안으로 가져와 기틀로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만물속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다. 21세기에 이같은 기독교가 나와야 할 때가 아닌가. 신학자들의 잘못이라 보진 않는다. 그런데 신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옳지, 전체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적인 차원에서 보면 서로 대립될 것도 없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종교간의 대화와 화해의 측면에서 개신교는 타종교에 배타적이다해서 혹평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안에는 '예수는 그리스도다'하는 고백이 타종교의 창시자나 위인들과 상대성을 띌수는 없다하는 신앙고백이 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는 어느 선까지를 존중해줘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의 차원에서는 역시 카톨릭과도 다르다. 카톨릭에서 소위 성자라는 말, 이번에도 요한 바오로 2세를 성자로 추대하느냐 마느냐는 것과 한국에도 이미 성자가 103명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는 하되 나 자신이 성자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로마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님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기독교가 절대로 양보하면 안된다. 가장 확실한 건 '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불완전하다. 아주 공통된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한 하나의 원죄일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도 성령이란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도 기록되었는데 예수는 우리의 구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경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그는 죄는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성서에 기록된 것을 아무리 다 찾아봐도 그는 전체가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는 없다. 우린 사랑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랑이 하나님임을 알았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모두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지 않으면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발광체가 아니다. 스스로에게서 빛이 나올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사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그 하나님의 사랑이 비춰올때 그 빛이 반사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받고 생명을 살리는 이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던 사람들을 많이 안다. 그중에 한국에 유명한 연극배우가 있는데 지금은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지만, 감리교에 열심히 나가던 사람이였다. 예수를 믿지않게 된것이 교회 목사의 부인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이가 죽었다. 한달도 못되어서 목사가 그 교회 전도사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목사란 사람도 이런건가 실망을 해서 나갔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어쩔수 없는 죄인이다는 말은 '도둑질했다', 무엇을 했다하는 말들이 아니고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자기 탐욕이다.

죄라는 것은 첫째, 탐욕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욕심부터 채우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자는 생각을 갖지 못하는 마음. 나는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얻고, 세례를 받으면 천당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받는다 하는 그런뜻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이미 죽음이 지배하는 영토에서 생명이 지배하는 영토로 돌아왔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여기에서 본다.

나 자신은 내 속에선 항상 욕심도 나오고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곳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살아가니 이미 죽음이란 없어진 것이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전도를 하는 것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좋겠다. 결국에 '우리의 삶이란게 어떻게 되어지는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고쳐진다면 서로 다른것이야 좋은 것이지, 어느것이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이번에 출간한 <내가 믿는 그리스도>란 책을 통해 가장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복음은 '복받는 소리'가 아닌 '복된 소리'이다." 강원용 목사는 끝으로 한국교회가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함을 회복할 것을 당부했다.ⓒ 송경호 기자
이 책은 신학책도 설교집도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는가에 관하여다. 정통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어왔느냐'다. 김명혁 목사에게 서평을 써달라고 하면서 보수정통파로서 비판을 좀 해 달라고 했더니 너무 칭찬을 해서 송구스럽게 됐다. 본인을 '사상이 진보적인데 신앙은 보수적이다'고 하지만 나는 진보신학, 보수신학 이런것이 없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란 말은 전부 나처럼 믿으란 말이 아니다. 다르게 믿을수 있다. 결국 촛점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이다.

다만 근본적인 것은 '복음' '복음' 하는데 복음이란 말이 대단히 오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란 말이 신약성서에 씌여진 것은 희랍어로 유한겔리온이다. 라디오도 tv도 없는 시절에 대사회에서 전쟁에서 승패를 알고자 마을서 소식을 들으려고 모여있다. 그러면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 보다가 마지막에 상대가 항복을 하면 흰 깃발을 올리고 '우리가 이겼다'고 하는 것, 이게 유안겔리온이다. 그런데 우리는 '복 복'자와 '소리 음'자, 즉 '복된 소리'라고 한것을 잘못 읽어 '복받는 소리'로 믿게 된것이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다'고 하는 여기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고 본다. 교회는 어느 교회를 나가도 좋은데 다만, 진짜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복음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만은 알고 믿었으면 좋겠다. 내가 가장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있다. 할렐루야 교회나 온누리 교회에서도 설교했다.

한국교회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문제이다. 옛날에는 나이가 한 70세 된 건강한 할아버지, 노인을 생각했다. 그러나 요새는 은행창구의 수납계에 앉아있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저 복을 받으려고 "이거 주십시오, 저것도 주십시오" 하고 손을 내밀면 "예금한게 얼마나 되는지 보죠" 하고 물으면 "철야기도를 얼마했고 십일조를 꼬박꼬박했고"라고 대답한다. 그럼 넌 이만한 복을 받을수 있다고 하는 은행출납계에 앉아있는 그 여자, 그게 무슨 하나님인가.

내가 믿는 하나님이란 어떤 하나님인가. '복 주십시오 복 주십시오' 하면 얼마든지 줄수 있다. 그것을 두고 나쁜놈이라고 부르실 만큼의 옹졸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확실하다고 본다. 난 내가 가진것을 다 줬는데 태양을 만들고 달을 만들고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 줄 것을 다 주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줬는데 이제 더 뭘 달란 말이냐. 내가 받아야 할것은 다 줬다.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며 사는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예배도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고 찬송도 그러하다. 그런데 앉아서 고함을 지르고 통성 기도를 하고 2시간이며 3시간이며 '이것도 해주십시오', '아들 대학에 입학하고 시집, 장가 가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의 기복 신앙이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종교는 아니다. 그것만이라도 깨닫고 해주고 싶은 바램이 책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