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혼율 33%의 시대.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높은 이혼율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혼까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정서적 이혼 상태에 빠진 가정까지 합친다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가정은 이혼해도 그대로 유지되지만 한국의 가정은 이혼상태가 아닌데도 무너지고 있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정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가정 중요한 원인은 아무래도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사랑을 즐긴다.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덕규 집사의 오리지날을 불렀던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라는 노랫말을 보면 개인주의적 사랑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비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 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그 마음 가운데 오직 ‘자신’만이 가득하기에 그 마음 가운데 주님마저 거할 공간이 없다. 그저 나, 나만 있다. 세상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그러다보니 헛된 것들로 내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마음에는 스스로 이길 수 없는 슬픔들이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아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들이 서로 부대끼고 울어대고 나를 찾아 온 여러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나에게서 기쁨을 얻고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로 인해 그것이 가시가 되어서 아프게 하고 찌르고야 만다.
그럴수록 나는 외로워지고 괴롭기도 하지만... 슬픈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 보지만... ‘그 휑한 마음을 누가 채워줄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미를 이 노래는 담고 있다.
가슴이 텅비니 당연히 세상적인 것들로 채워보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만이 가득한 마음에는 평안이 없다. 온통 가시나무만이 있다보니까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이별이라는 그림자를 남기게 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개인주의적 가치관은 ‘내 가족’만을 지상 최고로 여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배출해 낸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자기의 유익에 반하면 그냥 뒷전으로 몰아내 버린다. 자기의 유익을 해치는 것이라면 가족마저도 냉정하게 내어 버린다. 그러다보니 가족이라는 끈끈함도 사라져 버리고 부부라는 관계도 쉽게 무너져 내리고야 마는 것이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그 현실을 지금 우리는 이러한 결과로 목도하고 있다. 결국은 성경이 말하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공동체’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가정의 해체는 어찌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조류가 될 것이다. 결국은 교회가 대안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해결책이다.
그러나 교회 역시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팽배로 인한 영향권 안에 들어가 버린다면 더 이상 우리는 기대를 걸 곳이 없다. 불행하게도 지금 나타나는 ‘개교회주의’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정말 이대로 주저앉고야 말 것인가? 잊지말자. 세상은 지금 우리만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추부길 목사(웰빙교회, 한국가정사역연구소)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정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가정 중요한 원인은 아무래도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사랑을 즐긴다.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덕규 집사의 오리지날을 불렀던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라는 노랫말을 보면 개인주의적 사랑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비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 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그 마음 가운데 오직 ‘자신’만이 가득하기에 그 마음 가운데 주님마저 거할 공간이 없다. 그저 나, 나만 있다. 세상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그러다보니 헛된 것들로 내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마음에는 스스로 이길 수 없는 슬픔들이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아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들이 서로 부대끼고 울어대고 나를 찾아 온 여러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나에게서 기쁨을 얻고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로 인해 그것이 가시가 되어서 아프게 하고 찌르고야 만다.
그럴수록 나는 외로워지고 괴롭기도 하지만... 슬픈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 보지만... ‘그 휑한 마음을 누가 채워줄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미를 이 노래는 담고 있다.
가슴이 텅비니 당연히 세상적인 것들로 채워보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만이 가득한 마음에는 평안이 없다. 온통 가시나무만이 있다보니까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이별이라는 그림자를 남기게 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개인주의적 가치관은 ‘내 가족’만을 지상 최고로 여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배출해 낸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자기의 유익에 반하면 그냥 뒷전으로 몰아내 버린다. 자기의 유익을 해치는 것이라면 가족마저도 냉정하게 내어 버린다. 그러다보니 가족이라는 끈끈함도 사라져 버리고 부부라는 관계도 쉽게 무너져 내리고야 마는 것이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그 현실을 지금 우리는 이러한 결과로 목도하고 있다. 결국은 성경이 말하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공동체’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가정의 해체는 어찌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조류가 될 것이다. 결국은 교회가 대안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해결책이다.
그러나 교회 역시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팽배로 인한 영향권 안에 들어가 버린다면 더 이상 우리는 기대를 걸 곳이 없다. 불행하게도 지금 나타나는 ‘개교회주의’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정말 이대로 주저앉고야 말 것인가? 잊지말자. 세상은 지금 우리만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추부길 목사(웰빙교회, 한국가정사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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