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한복음21:16)
아사히신문에 나온 기사 중에“사람이 주는 먹이로 낚을 수없는 원숭이의 마음”이란 글을 읽으면서 몇해전에 오오사카 북쪽에 있는 "미노"라는 공원에 유학생들과 야외예배를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교오또에 있는 입명관대학에 유학 온 학생의 어린아이가 과자봉지를 들고 공원에서 놀다가 갑자기 달려온 야생 원숭이에게 과자봉지를 빼앗겨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리며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원래 원숭이는 나무 열매를 채취하여 먹고 사는 동물인데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다보니 나무열매를 채취해먹는 노동보다는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즉 일할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그러한 원숭이가 자식을 낳고 또 자라서 그 다음의 자식을 낳다보면 손자원숭이 대에서는 일하여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보다 자기보다 연약하게 생각되는 여자나 아이의 먹을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먹이를 빼앗는 강도원숭이가 되고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먹이를 던져달라고 보채고 요구하는 거지원숭이로 전락해서 일생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이런 거지원숭이나 강도원숭이에게 있어서는 먹이를 주지 않는 인간이 나쁘다고 보기에 훔치거나 빼앗는 행동을 하게 된다.
지금 일본의 산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다.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와는 달리 야생동물은 눈앞에 보이는 먹이를 먹어도 좋은지 나쁜지를 분별하지 못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음식물 찌꺼기나 먹이를 야생동물들이 먹게 됨으로 점점 더 먹이를 구하려는 본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먹이를 공급하지않고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이러한 파괴되어 가는 야생동물의 생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보지 않을수 없다.
경제회복의 대명제를 등에 업고서 예외없는 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원리의 관철이라는 일련의 조류는 오늘날의 사회, 경제의 모든 것을 휘감아 크나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행되고 있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도 예외없이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위급한 사태가운데 이르게 되었다.이러한 정황가운데서 교회는 교육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나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사랑이요 자비의 마음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인데 오늘날의 상황은 사람들로부터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소멸시켜 나가고 있다. 그대신 탈취해도 된다는 정신구조가 일반화된 사회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취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려도 된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심어놓은 사회구조로 인하여 이런 어른들의 심적상태를 보고 자란 어린아이들도 이윽고 어른이 되면 같은 맥락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교육시키고 있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요구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하게 상실된 상황으로 변질되어감을 우려 한다.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내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며 우리가 어떤 것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자.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
아사히신문에 나온 기사 중에“사람이 주는 먹이로 낚을 수없는 원숭이의 마음”이란 글을 읽으면서 몇해전에 오오사카 북쪽에 있는 "미노"라는 공원에 유학생들과 야외예배를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교오또에 있는 입명관대학에 유학 온 학생의 어린아이가 과자봉지를 들고 공원에서 놀다가 갑자기 달려온 야생 원숭이에게 과자봉지를 빼앗겨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리며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원래 원숭이는 나무 열매를 채취하여 먹고 사는 동물인데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다보니 나무열매를 채취해먹는 노동보다는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즉 일할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그러한 원숭이가 자식을 낳고 또 자라서 그 다음의 자식을 낳다보면 손자원숭이 대에서는 일하여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보다 자기보다 연약하게 생각되는 여자나 아이의 먹을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먹이를 빼앗는 강도원숭이가 되고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먹이를 던져달라고 보채고 요구하는 거지원숭이로 전락해서 일생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이런 거지원숭이나 강도원숭이에게 있어서는 먹이를 주지 않는 인간이 나쁘다고 보기에 훔치거나 빼앗는 행동을 하게 된다.
지금 일본의 산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다.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와는 달리 야생동물은 눈앞에 보이는 먹이를 먹어도 좋은지 나쁜지를 분별하지 못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음식물 찌꺼기나 먹이를 야생동물들이 먹게 됨으로 점점 더 먹이를 구하려는 본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먹이를 공급하지않고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이러한 파괴되어 가는 야생동물의 생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보지 않을수 없다.
경제회복의 대명제를 등에 업고서 예외없는 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원리의 관철이라는 일련의 조류는 오늘날의 사회, 경제의 모든 것을 휘감아 크나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행되고 있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도 예외없이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위급한 사태가운데 이르게 되었다.이러한 정황가운데서 교회는 교육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나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사랑이요 자비의 마음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인데 오늘날의 상황은 사람들로부터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소멸시켜 나가고 있다. 그대신 탈취해도 된다는 정신구조가 일반화된 사회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취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려도 된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심어놓은 사회구조로 인하여 이런 어른들의 심적상태를 보고 자란 어린아이들도 이윽고 어른이 되면 같은 맥락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교육시키고 있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요구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하게 상실된 상황으로 변질되어감을 우려 한다.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내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며 우리가 어떤 것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자.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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