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청물장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은 과거나 현재나 언제든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물을 자유롭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경우는 과거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집 안에 우물이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 우물을 파서 사용하든지 산기슭 옹달샘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이에 반해 여유 있는 집에서는 물장수에게 물을 사 먹곤 했다. 당시 물장수들 가운데 유난히 추운 산악지역인 함경도 북청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물장수를 하면서 자녀들을 동경 유학까지 보내는 등 교육열이 높아 “북청 물장수” 라는 말이 생겼다.
이와는 조금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mamasboy” (마마보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의미는 ‘과보호를 받는 남자아이,’ ‘여자 같은 아이,’ ‘응석꾸러기,’ 등등을 말한다. 이 두 말의 의미를 갖고 볼 때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부모들의 귀한 헌신이 깃들여 있기도 하다.
정말 한국 부모님들은 자녀들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다. 특별히 교육열이 대단하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다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점에 있어 기독교인 부모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녀를 위해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이러한 열성은 미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들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미국 이민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비싼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고 은행에서 빚지지 않고 졸업시키기 위해 정말 새벽부터 저녁까지 힘껏 수고한다. 이러한 가정이 많이 있다. 정말 부모들의 헌신은 대단하다. 과히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듯싶다.
그 비근한 예로서 입시시절이 되면 교회당에는 기도의 물결이 이어진다. 자녀들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며 앞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잠만이 아니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는 지극 정성을 잊을 수 없다.
미국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취급받는다. 부모의 도움을 받아 대학교에 가는 것을 스스로 꺼린다. 그래서 4년에 마칠 수 있는 과정을 휴학을 하면서 졸업 후 갖게 될 직장에 미리 찾아가 그곳에 다니면서 학자금을 마련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경우에 대학 졸업이 6년이나 7년에 마치기도 한다. 미국 청년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독립성을 갖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자립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어 부모들의 간섭에서 떠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쳐나간다.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그것을 대체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독교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는데서 그릇된 자녀관은 시작된다고 믿어진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녀를 양육하는 양육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러한 자녀관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자녀의 앞날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즉 양육권을 가진 자로서 최선을 다해 자녀들을 후원하고 도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도울 자는 부모뿐이라는 생각에 집착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힘든 경우가 있어 자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자녀까지 죽이는 경우가 있다.
자녀의 앞날이 자신의 권위 아래 있다는 매우 부정적인 일례이다. 자녀의 앞날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들의 키를, 그들의 지혜를, 그들의 성품을, 그들의 삶의 방식을, 등등 어느 하나도 우리는 간섭할 수 없다. 단지 모본으로서 보여줄 뿐이다. 부친을 통해 아들을 남자의 상을, 모친을 통해 딸은 여자의 상을 그린다. 그러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 상담하여 가보지 않은 미래들을 하나씩 개척해 나간다. 부모들은 자녀의 동반자며 후원자이다. 권위자가 아니다.
자녀들의 앞날이 부모들만큼 더 걱정하고 애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기독교 부모들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자녀의 앞날을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분만이 아신다. 내가 그분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그분은 자녀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자녀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자녀들도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진정으로 그러하다면, 자녀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여 결정하면 시행착오를 겪게 지만 그 신앙을 믿고 나가도록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부모들이 모든 것을 간섭하게 되면 그들은 정말 ‘마마보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믿음을 소유해야만 한다.
이에 반해 여유 있는 집에서는 물장수에게 물을 사 먹곤 했다. 당시 물장수들 가운데 유난히 추운 산악지역인 함경도 북청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물장수를 하면서 자녀들을 동경 유학까지 보내는 등 교육열이 높아 “북청 물장수” 라는 말이 생겼다.
이와는 조금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mamasboy” (마마보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의미는 ‘과보호를 받는 남자아이,’ ‘여자 같은 아이,’ ‘응석꾸러기,’ 등등을 말한다. 이 두 말의 의미를 갖고 볼 때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부모들의 귀한 헌신이 깃들여 있기도 하다.
정말 한국 부모님들은 자녀들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다. 특별히 교육열이 대단하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다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점에 있어 기독교인 부모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녀를 위해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이러한 열성은 미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들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미국 이민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비싼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고 은행에서 빚지지 않고 졸업시키기 위해 정말 새벽부터 저녁까지 힘껏 수고한다. 이러한 가정이 많이 있다. 정말 부모들의 헌신은 대단하다. 과히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듯싶다.
그 비근한 예로서 입시시절이 되면 교회당에는 기도의 물결이 이어진다. 자녀들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며 앞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잠만이 아니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는 지극 정성을 잊을 수 없다.
미국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취급받는다. 부모의 도움을 받아 대학교에 가는 것을 스스로 꺼린다. 그래서 4년에 마칠 수 있는 과정을 휴학을 하면서 졸업 후 갖게 될 직장에 미리 찾아가 그곳에 다니면서 학자금을 마련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경우에 대학 졸업이 6년이나 7년에 마치기도 한다. 미국 청년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독립성을 갖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자립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어 부모들의 간섭에서 떠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쳐나간다.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그것을 대체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독교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는데서 그릇된 자녀관은 시작된다고 믿어진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녀를 양육하는 양육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러한 자녀관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자녀의 앞날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즉 양육권을 가진 자로서 최선을 다해 자녀들을 후원하고 도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도울 자는 부모뿐이라는 생각에 집착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힘든 경우가 있어 자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자녀까지 죽이는 경우가 있다.
자녀의 앞날이 자신의 권위 아래 있다는 매우 부정적인 일례이다. 자녀의 앞날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들의 키를, 그들의 지혜를, 그들의 성품을, 그들의 삶의 방식을, 등등 어느 하나도 우리는 간섭할 수 없다. 단지 모본으로서 보여줄 뿐이다. 부친을 통해 아들을 남자의 상을, 모친을 통해 딸은 여자의 상을 그린다. 그러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 상담하여 가보지 않은 미래들을 하나씩 개척해 나간다. 부모들은 자녀의 동반자며 후원자이다. 권위자가 아니다.
자녀들의 앞날이 부모들만큼 더 걱정하고 애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기독교 부모들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자녀의 앞날을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분만이 아신다. 내가 그분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그분은 자녀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자녀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자녀들도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진정으로 그러하다면, 자녀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여 결정하면 시행착오를 겪게 지만 그 신앙을 믿고 나가도록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부모들이 모든 것을 간섭하게 되면 그들은 정말 ‘마마보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믿음을 소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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