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한국행에 성공한 탈북자 정은혜 씨(백두한라회 총무·선교부장)가 북한의 종교자유 실상에 대해 증언을 시작했다. 정은혜 씨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4대째 예수를 믿어온 북한의 지하교인이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았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북한 당국이 부르짖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에서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고모를 잃고, 보위부의 온갖 핍박과 통제, 감시 속에 생활하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입니다.” 정 씨는 이렇게 길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러한 말로도 그녀의 고난과 역경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정 씨의 증조할아버지는 몰래 예배를 드리다 발각돼 보위부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고, 남은 가족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척박한 산간지대로 추방됐다. 그러나 할머니의 굳은 믿음으로 가족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와 비밀예배를 드리던 중 알게 돼 결혼했고, 고모와 고모부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 씨의 집으로 찾아와 숨소리를 죽여가며 몰래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다 가곤 했는데, 보위부에서 이를 눈치채고 집과 주변에 감시를 붙였다. 결국 그들은 발각돼 예배드리던 아버지와 고모는 물론, 멀리서 찾아와 함께 예배드리던 사람들까지 체포됐다. 그때가 15년 전, 어디론가 끌려간 이후 정 씨는 아직도 그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 이도 모자라 보위부는 그녀의 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끝내 대대로 물려받으며 간직해온 성경책을 빼앗기고 말았다.
남은 가족들과 친척들도 매일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미리 만들어 놓은 죄목을 적어놓은 문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했다. 그 도장은 ‘반동’이라는 낙인으로 돌아왔고, 다시 더 깊은 산골로 추방당했다.
감시와 통제밖에 없는 산골로 쫓겨온 정 씨는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놓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핍박과 고통을 받고 살아도, 앞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모든 고난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지쳐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을 내미시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믿음은 그렇게 점점 더 확고해졌지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경제사정은 더 나빠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식량이 부족해 수백만명이 굶어죽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추방되기 전 살던 곳에서도 그렇게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정 씨는 깊은 산골로 추방돼 밭에서 낟알을 심어 가꾸고 집짐승도 길러 먹을 수 있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북한 당국은 저희를 못살게 괴롭히려고 깊은 산골로 추방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앞일을 미리 아시고 저희를 살리기 위해 이곳으로 이끌어주신 것이라 믿어요. 마치 형들을 살리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연명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알던 한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중국에서 목회하는 그 목사님이 정 씨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은 방문단으로 신분을 가장해 자주 북한을 드나들 수 있었고, 수소문 끝에 산골로 쫓겨난 정 씨 일행을 찾아낸 것이다. 목사님은 그녀를 두만강 건너 중국으로 이끌어 냈다.
중국에서 드린 첫 예배, 목사님과 교회 가까이로 가는데 높이 선 십자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가니 박수치며 찬양하는 소리도 들렸다. “목사님, 이러면 보위부에서 다 붙잡아 가지 않습니까?” 정 씨는 놀라서 물었다. 목사님은 웃으며 “여기는 중국 땅이야. 괜찮아.”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예배당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배가 끝날 때까지 내내 울기만 했다. 북한에서 숨죽이며 겨우 예배드리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낯설기만 했던 중국 생활, 목사님과 교회의 도움으로 조금씩 적응해 갔다. 그러나 신분증이 없는 중국 생활은 너무나 위험했다. 인신매매로 팔려가기 일쑤, 바라던 한국행은 5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저는 6개월도 안 돼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어요.” 이제 정 씨는 대학생이다. 또래들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북한이 자유의 땅으로 열리는 그날 북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아 안은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려요. 이제 받은 사랑을 교회공동체를 통해 다른 이웃들과도 나누는 삶을 살래요.”
정 씨는 한국에 와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북한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았지만, 평양에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탈북하고 중국에 가서 한국 목사님들이 쓰신 책을 통해 알게 됐어요.”
그녀는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며 자랑스레 말씀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면 가슴이 참 아프다. “북한 땅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벗겨 죽을 쒀 끼니를 때우고 있어요. 또 당국의 종교 탄압 때문에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죠. 그런데도 ‘우리도 교회가 있고, 예배도 있다’며 국제사회에 선전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세운 가짜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왔다고 자랑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요.”
정 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그런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북한이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면, 왜 성경을 보거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붙잡아 죽이거나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고 있을까요? 잘 가꿔지고 정돈된 듯한 평양의 겉모습 이면에 감춰진 진실, 독재의 어둔 그늘 아래 ‘반동분자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신음하는 힘없고 가난한 주민들의 신음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여 보셨나요? 그리고, 저와 제 가족들처럼 ‘평양에는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몰래 숨죽여 예배드리다 발각돼 이름도 없이 순교당한 북한의 수많은 신앙인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셨는지….”
‘하나님은 없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있다면, ‘조선의 하나님’ 김일성과 김정일 뿐. 그녀는 “철저한 무신론적 사회환경과 교육, 끊임없는 반종교 선전에도, 북한 당국을 피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써가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며 울먹였다. 참석한 대학생들도, 외국인도 함께 울었다.
정 씨의 증언은 17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윤현)이 美 국제종교자유위원회(위원장 Michael Cromartie) 대표단과 펠리스 게이어(Felice D. Gaer) 유엔고문방지위원의 한국 방문을 맞아 고려대 국제대학원(원장 서창록),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원장 Alan L. Button)과 함께 주최한 서른번째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학술토론회 ‘북한의 인권: 종교의 자유와 고문’에서 이뤄졌다.
제1부 ‘북한의 종교자유 실태와 국제사회의 개선권고’에서는 신혜수 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의 사회로 ‘창살없는 감옥 요약본’을 원재천 교수(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가, ‘북한의 종교억압 의혹에 대한 국제사회의 견해 및 권고’를 탈랄 이드(Talal Y. Eid) 美 국제종교자유위원 등이 발제했고, 임순희 위원과 김병로 위원(이하 통일연구원)이 토론했다. 2부에서는 ‘북한의 고문실태와 국제사회의 개선권고’를 주제로 펠리스 게이어 위원, 정광일 팀장(북한민주화운동본부), 이영환 팀장(북한인권시민연합), 박기갑 교수(고려대 법학과), 이규창 팀장(통일연구원), 데이빗 호크 전 AI 미국지부 사무총장(‘감춰진 수용소’ 저자) 등이 나와 토론했다. 정 씨는 1부에서 증언했다.
마이클 크로마티(Michael Cromartie) 美 국제종교자유위원장은 정 씨의 증언에 앞서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국가이며, 외부 정보가 주민에게 도달하는 것을 막는 통제적 국가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우리가 수호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 주민들은 장기간에 걸친 억압과 핍박, 기근과 고문 등에 노출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피로감에 빠져있다”며 “정치인·외교관들은 북한인권 개선이 동북아 안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책적·외교적·법적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았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북한 당국이 부르짖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에서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고모를 잃고, 보위부의 온갖 핍박과 통제, 감시 속에 생활하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입니다.” 정 씨는 이렇게 길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러한 말로도 그녀의 고난과 역경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정 씨의 증조할아버지는 몰래 예배를 드리다 발각돼 보위부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고, 남은 가족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척박한 산간지대로 추방됐다. 그러나 할머니의 굳은 믿음으로 가족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와 비밀예배를 드리던 중 알게 돼 결혼했고, 고모와 고모부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 씨의 집으로 찾아와 숨소리를 죽여가며 몰래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다 가곤 했는데, 보위부에서 이를 눈치채고 집과 주변에 감시를 붙였다. 결국 그들은 발각돼 예배드리던 아버지와 고모는 물론, 멀리서 찾아와 함께 예배드리던 사람들까지 체포됐다. 그때가 15년 전, 어디론가 끌려간 이후 정 씨는 아직도 그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 이도 모자라 보위부는 그녀의 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끝내 대대로 물려받으며 간직해온 성경책을 빼앗기고 말았다.
남은 가족들과 친척들도 매일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미리 만들어 놓은 죄목을 적어놓은 문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했다. 그 도장은 ‘반동’이라는 낙인으로 돌아왔고, 다시 더 깊은 산골로 추방당했다.
감시와 통제밖에 없는 산골로 쫓겨온 정 씨는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놓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핍박과 고통을 받고 살아도, 앞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모든 고난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지쳐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을 내미시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믿음은 그렇게 점점 더 확고해졌지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경제사정은 더 나빠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식량이 부족해 수백만명이 굶어죽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추방되기 전 살던 곳에서도 그렇게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정 씨는 깊은 산골로 추방돼 밭에서 낟알을 심어 가꾸고 집짐승도 길러 먹을 수 있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북한 당국은 저희를 못살게 괴롭히려고 깊은 산골로 추방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앞일을 미리 아시고 저희를 살리기 위해 이곳으로 이끌어주신 것이라 믿어요. 마치 형들을 살리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연명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알던 한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중국에서 목회하는 그 목사님이 정 씨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은 방문단으로 신분을 가장해 자주 북한을 드나들 수 있었고, 수소문 끝에 산골로 쫓겨난 정 씨 일행을 찾아낸 것이다. 목사님은 그녀를 두만강 건너 중국으로 이끌어 냈다.
중국에서 드린 첫 예배, 목사님과 교회 가까이로 가는데 높이 선 십자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가니 박수치며 찬양하는 소리도 들렸다. “목사님, 이러면 보위부에서 다 붙잡아 가지 않습니까?” 정 씨는 놀라서 물었다. 목사님은 웃으며 “여기는 중국 땅이야. 괜찮아.”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예배당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배가 끝날 때까지 내내 울기만 했다. 북한에서 숨죽이며 겨우 예배드리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낯설기만 했던 중국 생활, 목사님과 교회의 도움으로 조금씩 적응해 갔다. 그러나 신분증이 없는 중국 생활은 너무나 위험했다. 인신매매로 팔려가기 일쑤, 바라던 한국행은 5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저는 6개월도 안 돼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어요.” 이제 정 씨는 대학생이다. 또래들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북한이 자유의 땅으로 열리는 그날 북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아 안은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려요. 이제 받은 사랑을 교회공동체를 통해 다른 이웃들과도 나누는 삶을 살래요.”
정 씨는 한국에 와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북한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았지만, 평양에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탈북하고 중국에 가서 한국 목사님들이 쓰신 책을 통해 알게 됐어요.”
그녀는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며 자랑스레 말씀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면 가슴이 참 아프다. “북한 땅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벗겨 죽을 쒀 끼니를 때우고 있어요. 또 당국의 종교 탄압 때문에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죠. 그런데도 ‘우리도 교회가 있고, 예배도 있다’며 국제사회에 선전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세운 가짜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왔다고 자랑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요.”
정 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그런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북한이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면, 왜 성경을 보거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붙잡아 죽이거나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고 있을까요? 잘 가꿔지고 정돈된 듯한 평양의 겉모습 이면에 감춰진 진실, 독재의 어둔 그늘 아래 ‘반동분자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신음하는 힘없고 가난한 주민들의 신음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여 보셨나요? 그리고, 저와 제 가족들처럼 ‘평양에는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몰래 숨죽여 예배드리다 발각돼 이름도 없이 순교당한 북한의 수많은 신앙인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셨는지….”
‘하나님은 없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있다면, ‘조선의 하나님’ 김일성과 김정일 뿐. 그녀는 “철저한 무신론적 사회환경과 교육, 끊임없는 반종교 선전에도, 북한 당국을 피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써가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며 울먹였다. 참석한 대학생들도, 외국인도 함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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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열린 토론회 장면. 맨 왼쪽이 정 씨다. ⓒ이대웅 기자 | |
정 씨의 증언은 17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윤현)이 美 국제종교자유위원회(위원장 Michael Cromartie) 대표단과 펠리스 게이어(Felice D. Gaer) 유엔고문방지위원의 한국 방문을 맞아 고려대 국제대학원(원장 서창록),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원장 Alan L. Button)과 함께 주최한 서른번째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학술토론회 ‘북한의 인권: 종교의 자유와 고문’에서 이뤄졌다.
제1부 ‘북한의 종교자유 실태와 국제사회의 개선권고’에서는 신혜수 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의 사회로 ‘창살없는 감옥 요약본’을 원재천 교수(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가, ‘북한의 종교억압 의혹에 대한 국제사회의 견해 및 권고’를 탈랄 이드(Talal Y. Eid) 美 국제종교자유위원 등이 발제했고, 임순희 위원과 김병로 위원(이하 통일연구원)이 토론했다. 2부에서는 ‘북한의 고문실태와 국제사회의 개선권고’를 주제로 펠리스 게이어 위원, 정광일 팀장(북한민주화운동본부), 이영환 팀장(북한인권시민연합), 박기갑 교수(고려대 법학과), 이규창 팀장(통일연구원), 데이빗 호크 전 AI 미국지부 사무총장(‘감춰진 수용소’ 저자) 등이 나와 토론했다. 정 씨는 1부에서 증언했다.
마이클 크로마티(Michael Cromartie) 美 국제종교자유위원장은 정 씨의 증언에 앞서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국가이며, 외부 정보가 주민에게 도달하는 것을 막는 통제적 국가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우리가 수호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 주민들은 장기간에 걸친 억압과 핍박, 기근과 고문 등에 노출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피로감에 빠져있다”며 “정치인·외교관들은 북한인권 개선이 동북아 안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책적·외교적·법적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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