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모 목사(커네티컷 하트포드연합감리교회, 뉴욕연회)는 한인연합감리교회 오병이어선교회를 대표하여 송종남 목사(텍사스 성루가연합감리교회)·조대현 목사(노스 캐롤라이나 샬롯한인연합감리교회)와 고신측 목회자인 최영호 목사(DE)·김원호 목사((NC) 등과 함께 두만 하류 중국 훈춘시 특수교육학교(김찬영박사, CRAM: Christ Reachout Asia Mission 선교회)를 방문해 교육현장을 견학했다. 또한 중국 온정 국경초소를 경유해 북조선(북한) 라진-선봉시를 방문, CRAM이 운영하는 ‘유치원’과 ‘탁아소’, 그리고 ‘보건진료소’를 방문했으며, ‘사랑의 빵공장’과 ‘콩우유 가공공장’과 ‘소사육장’ 등지를 둘러 봤다. 다음은 송 목사의 방문기 -편집자 주-

필자는 이번 중국 및 북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말로만 듣던 선교현장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으며, 과연 중국과 북한은 자기들의 헌법에 보장된‘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는 지를 알아보고자 희망했다.

중국에서는 일만개소에 육박하는 ‘삼자교회’(自養-自治-自傳)를 중심으로 수천만을 헤아리는 크리스천들이 활발히 선교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는데 반해 북조선에서 특히 라진과 선봉지역 일대에서는 소위 ‘개방특구’라는 이름은 특명은 가졌으나, 현재까지 전혀 종교의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보장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북조선에서는 소위 ‘종교인사’의 북한방문은 환영치 않고, 애써 다른 호칭으로 통용하기를 선호하였다. 곧‘사장’이니, ‘선생’이니 하여 선교목적방문이 퇴색함을 느끼게 되니, 한편으로 아쉬운 것이다. 결국‘식량구제’나‘의료봉사 및 ‘재정지원’을 유치하는 것만이 외부인의 입북을 허용한 목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더욱이 식량이나 재정지원 조차도‘교회로부터 온 것’임을 알리지 못하였으니,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된 교회들로부터 얼마나 지속적 후원을 기대하는 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적십자활동’처럼‘조건 없이 와서 도우라’는 식이다.

과연 북한은‘거대한 감옥이나, 병영과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른 아침 7시, 광장 앞 네거리에서는 대형 확성기를 지붕에 장착한 자동차가 나타나 서더니, 지축을 울리는‘우렁찬 혁명가’를 방송하고 있었다. 아침 출근시간임에도 거리는 한산하였는데, 이따금씩 자전거로 이동하는 이들과 트럭 짐 칸에 노동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는 어디론가 이동해 가는 모습만이 간간히 눈에 띄는 정도였다.

김일성 주석이 두 번이나 다녀갔다는 남산 호텔에 여장을 풀었지만, 호텔이라야 시골 여인숙에 못 미치는 초라한 시설이었고, 그나마 샤워도 제대로 하기 곤란한 열악한 수준이었다. 미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1분에 미국 돈으로 8불을 요구하였다. 아침에는 같은 호텔에서 묵은 듯 보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온 동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으나, 감시원들이 있어서인지‘한 마디 인사’에 그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북조선 인민을 돕는 일에 계속적으로 참여해야 할까? 과연 이런 류의 봉사활동은‘선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혹, 재정지원을 하게 되면, 그 자금은 ‘군대와 당 유지비로 쓰여질 것’이라는데…. 차라리, ‘나는 레위인거나 혹 제사장이라서, 또 나는 안식일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으니…’라며 발뺌하는 편이 현명한 것일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결코, 먼저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기보다, 가엾은 병든 자를 고치셨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봉사의 일과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사역에 치중하시었다. 먼저 생명을 살려 놓고 나서‘천국의 복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는‘그들 손에 죽임을 당하셨지만’그를 부활케 하시고 세상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게 된다면, 누군가 기억해 주리라. ‘그때 어느 예수교인들이 다녀갔다고…아무런 요구와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틀림없이 북조선 당국자들은 필시, 모든 외부 방문자들의 신원파악을 다 해두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굳이 일반백성들에게는 정체를 알리지 말도록 부탁하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 스스로가 아직은‘개방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여 두려워함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문화생활의 차이는 고사하고 삶의 질적 차이를 느끼게 하였다. 얼굴도 같고 말도 통하며 모든 역사를 공유하는 형제들인데, 휴전선이 가로막고 동해와 황해는 물론, 압록과 두만으로 가로막혀 자유로이 오가지 못하는 북녘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동포 형제들이 오늘도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