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월간조선사에서 최근 발행된 이근미 씨의 책 <큰 교회 큰 목사 이야기>에서 다루어진 대형교회 목사들의 리더십과 교회의 성장비결을 소개한다. - 편집자주

수원침례교회 원로 목사이며,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 극동방송 사장, 한국 YFC명예이사장, 김장환 목사(金章煥)의 이름을 한국교회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그는 독특한 성장배경, 학창시절, 결혼생활, 목회활동 등 여느 사람과 구별되는 특이한 삶을 살아 더 더욱 주목받았다.

그가 얼마나 흥미로운 인물이었는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얘기에 잘 나타나 있다.

"1962년에 우리 교회 청년회에서 김장환 목사님을 부흥회 강사로 초청하는 바람에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너무 놀랐지요. 나와 동년배인데 자가용은 운전해서 서양 여자를 옆에 앉히고 온 것을 보니 달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신기해 보이더군요. 저 사람은 외국유학까지 하고 외국여자까지 마누라로 데리고 왔구나 하는 생각에서 마음 속으로 시기도 좀 났지요. 그 때 김 목사와 나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우리는 그저 신발짝밖에 없었을 땐데 자가용을 타고 왔으니..."

1만 7,000명 성장비결, 활발한 전도활동, 영어와 성경교육

수원중앙침례교회는 현재 1만 7,000명 교회로 성장했다. 사실 수원지역은 인구가 많지 않아 폭발적으로 교인 숫자가 늘어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러나 수원중앙침례교회는 매주일 1만여 명이 출석한다.그 가운데는 중국, 몽골, 필리핀, 아프리카, 미국인 등 외국인이 150여 명 정도 되고 매주 일 새로 등록하는 신자는 20-3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수원중앙침례교회도 1959년 말 당시에는 교인이 12명에 불과했다. 건물은 낡아 비가 새고 마루는 곧 내려앉을 것처럼 삐걱대는 교회였고 김 목사가 출석할 당시에는 거동불편한 최성업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유학생활하다 바로 귀국하여 한국어 구사가 어려웠던 김 목사. 그런 교회에 키 작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최 목사는 세워 기도와 설교를 시키면서 결국 최 목사는 김 목사에게 교회 담임 목사 자리를 전폭적으로 물려준다.

그 당시에 애초에 교회를 맡아 교회에 매이는 목회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던 김 목사는 최 목사의 청에 난감했지만, 당장 설교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기에 정기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지금의 교회로 부흥시킨 것은 그의 뜨거운 전도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과 마찬가지로 수원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노방전도를 하고 또 외국인 선교사들은 풍금을 치거나 트럼본을 불면 사람들이 호기심에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면 김장환 목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설교했다.

활발한 전도활동으로 교인들은 차차 불어났고 무엇보다 김장환 목사 부부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이 출석해 교회는 젊은이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김 목사는 동역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전도가 몸에 벤 사람', '부지런한 사람', '한국의 빌리 김'이라는 증거와 별칭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김 목사가 수원중앙침례교회 성도들에게 변치 않고 하는 말은 "복음선교 전도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으로, 새 신자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7주 프로그램을 통해 결신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다.

"정식 목사 부임이후 교회건축 후, 수원중앙침례교회의 비약

1966년 최성업 목사가 거동이 불가능해지자, 김장환 목사는 본교회를 아예 정식으로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수원중앙침례교회는 김 목사가 정식으로 부임한 그 해 학생이 200명으로 불어났고, 부임 8개월 만에 수원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이 당시 수원중앙침례교회는 성전건축를 해야하는 문제가 시급했다.너무 낡아 새로 지어야 한다는 의견은 많은데, 교세가 약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또 남침례 선교국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도와줄 수 없었다'는 것.

이 때 많은 성도들이 헌금을 성의껏 내어놓지 않았다면, 지금의 본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금반지와 시계를 내어놓는 사람들, 미군들의 건축헌금들은 낡은 교회를 헐고 6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2층 교회를 1년 만에 건축했다.

김 목사는 성전건축과 관련, "우리는 분란이 일어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성경에도 빚지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멈추었다가 돈이 생기면 다시 지었죠. 1층이 되면 1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2층이 완공되면 다시 2층에서 예배를 드리는 방법으로 차근차근 일을 처리했습니다"

교회는 건축한 지 1년만에 교인들이 꽉 들어찼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이후 교인들은 더욱 늘어나 예배를 두 번씩 드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래도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어 1984년 성전을 다시 건축, 그 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증축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헌금을 할 때 성도들은 한 사람이 많은 헌금을 낸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김 목사가 성도들에게 멍에가 될만한 확장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성도들이 형편에 맞게 헌금할 수 있도록 배려한 탓이다.

김장환 목사의 목회철학, "목사라는 직함을 가장 사랑합니다"

김장환 목사는 대형교회 담임은 물론 청소년 선교, 해외선교, 방송선교를 병행 특히 YFC를 통해 200여 명의 목회자를 배출한 바 있고, 2000년 7월 5일 서구사회의 존경과 신임을 받는 5년 임기의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다양한 직함 중 어떤 직분을 가장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김 목사는 "목사"라고 대답한다.

"언제나 목사라는 직함을 사랑하고 목사로 불리는 것이 기쁩니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 연구와 경건생활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축복받은 속박'이지요"

김장환 목사 설교특색, 쉽고 명쾌하며 청중들과 호흡한다

김장환 목사는 쉬워서 마음에 잘 다가오는 또, 지적이면서도 명쾌한 설교, 청중들과 아이 컨텍하는 설교로 유명하다. 그의 설교 원칙은 첫째로, 말씀은 말씀으로 풀이하는 것으로 그의 설교는 성경말씀 인용이 비교적 많다.

이와관련,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는 <목회>라는 잡지에서 김 목사의 설교를 "매우 쉽다. 그리고 성경구절 인용이 빈번하고 예화도 등장하지만 진부하지 않다. 아울러 그의 설교는 청중과의 호흡에 무척 신경쓴다"고 평가했다.

김 목사가 그러한 설교를 준비하는 일정은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월요일은 서울에 와서 방송국 관련 업무를 보고 월요일 저녁에 수원으로 돌아가면서 주제를 구상하고 화요일에 서재에서 한 주일 말씀을 대강 정하고 자료를 찾는다. 그런 후 한 주일 내내 머리속에서 가다듬다 토요일에 완성하고 토요일 밤에 기도로 무장한다.

또한, 그는 설교내용 구상에서 도입부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쓴다. 이에 대해 청년시절부터 김장환 목사의 설교를 들어왔던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는 "김장환 목사의 설교스타일은 제목 설교"라며, "제일 큰 장점은 설교의 서론이 탁월하여 마음을 연다는 것"이라고 호평했다.

특히 김장환 목사 설교에 유명한 '아이 컨텍' 활용사연은 "그가 허공을 보고 설교하면 성도들의 마음이 분산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예배를 축제로 구제는 즐겁게

김 목사는 예배를 축제라고 표현한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시달린 성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희망을 주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축제말이다. 김 목사는 축제를 축제답게 하는 데 중요한 요소를 찬양으로 꼽으며, 음악국을 개설 현재 송금석 음악목사 이하 6명의 음악전도사가 본교회에는 시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가대도 4개의 장년부성가대와 2개의 여성성가대, 교구성가대, 2개의 어린이 합창단, 오케스트라와 관악앙상블, 경배찬양단, 5개의 중창단까지 합치면 교회 내에 음악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모두 1,10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수원중앙침례교회는 음악예배에 관심이 많은 교회와 종교음악 관련학과의 견학 코스에서 제외될 수 없단다.

게다가 김 목사는 설교와 성가의 가사의 내용이 연결되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겨서 매주 화요일 지휘자에게 설교내용을 전달하고 대중찬송가도 설교와 연계하여 선곡하는 센스도 발휘할 줄 아는 감각있는 목회자다.

한편, 김 목사는 구제에 있어어도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 번은 1996년 설날을 한 주 앞둔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한 교인 5,000여 명에게 1만 원씩을 나눠주었다. 그날 설교 제목은 '달란트 비유'였는데, 설교를 마친 뒤

헌금시간에 현금을 1만원씩 나눠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 돈으로 장사하여 번 돈을 구제와 선교에 쓰자"며, 교인들에게 장사기간 6주간의 시간을 준다.

그 결과 교인들의 노력으로 1억 원의 이윤이 났고, 그 돈을 구제활동에 사용했다. 이처럼 수원중앙침례교회만이 하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구제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전 교인에게 만 원씩 주었더니>>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김장환 목사의 인생신조, "다른 사람의 디딤돌이 되려는 일념으로 삽니다"

이런 김 장환 목사는 2004년 12월 담임목사직을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된다.

여기서 김 목사의 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교회를 물려받지 않을까 추측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김장환 목사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고명진 목사가 담임이 되었다.

김 목사는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중앙기독초등학교를 설립해 법인으로 등록시켜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그리고 여러 기관에서 일하지만 사례비는 교회에서만 받고 강연비나 책 인쇄 등은 극동방송에 헌금한다.

이러한 김 목사 인생을 정작 본인은 디딤돌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디딤돌로써의 역할에서도 탁월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그가 후배양성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이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국제회의에 많이 참서시키고 외국의 신학교에 국내 신학생들을 많이 보낼 예정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고 싶은데 기회가 없는 사람, 신학교가 가고 싶은데 돈이 없는 사람에게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연결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죠"이 말은 퇴임후에 아예 모든 역량을 여기에 쏟겠다는 그의 확고한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