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일 분간 평균 25번 눈을 깜빡인다고 합니다. 한 번 눈을 깜빡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0.2초이기에 40 마일 속도로 열 시간 자동차를 드라이브한다면 총 주행 거리 중 약 30 마일은 눈을 감고 운전한다는 놀라운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보기는 해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었는데 정작 듣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듣기는 들어도 건성으로 듣고 그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지만 겉만 보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관찰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것을 어느 유행가 가사에 심도 깊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사람들이 말은 하지만 의미없는 말만 하고)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사람들이 듣기는 듣지만 의미는 깨닫지 못한 채 듣고)
마가복음 6장에 재미있는 실제의 예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후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십니다. 남은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가는데 바람이 몰아치므로 어려움에 빠집니다. 괴로이 노 젖는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으사 그들을 도우려 배 위에 올라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바라보며 놀람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상태를 마가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분석합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막6:52).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이적과 표적, 그리고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신 기적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고 물 위를 걸으실 수 있는 우리 주님이라면 바람을 잠잠케 하실 수 있으신 만유의 주이시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것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의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기에 우리의 삶에 우리 주님이 진정으로 주인이 되지 못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고백의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기에 교회가 인간적인 사람의 모임이 되는 수가 왕왕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복음을 깊이 생각지 못하기에 복음이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해된 채 머물고 있습니다. 복음을 깊이 생각 하십시오. 삶에 넓게 적용하십시오. 말씀을 깊게 파고 들어가십시오. 설교를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이에 생명이 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보기는 해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었는데 정작 듣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듣기는 들어도 건성으로 듣고 그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지만 겉만 보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관찰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것을 어느 유행가 가사에 심도 깊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사람들이 말은 하지만 의미없는 말만 하고)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사람들이 듣기는 듣지만 의미는 깨닫지 못한 채 듣고)
마가복음 6장에 재미있는 실제의 예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후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십니다. 남은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가는데 바람이 몰아치므로 어려움에 빠집니다. 괴로이 노 젖는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으사 그들을 도우려 배 위에 올라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바라보며 놀람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상태를 마가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분석합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막6:52).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이적과 표적, 그리고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신 기적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고 물 위를 걸으실 수 있는 우리 주님이라면 바람을 잠잠케 하실 수 있으신 만유의 주이시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것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의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기에 우리의 삶에 우리 주님이 진정으로 주인이 되지 못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고백의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기에 교회가 인간적인 사람의 모임이 되는 수가 왕왕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복음을 깊이 생각지 못하기에 복음이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해된 채 머물고 있습니다. 복음을 깊이 생각 하십시오. 삶에 넓게 적용하십시오. 말씀을 깊게 파고 들어가십시오. 설교를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이에 생명이 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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