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로스파탁을 집시선교의 베이스로 잡다
동유럽 집시선교를 위해 헝가리의 샤로스파탁(Sarospatak)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 베이스를 두기로 했다. 샤로스파탁은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270Km 떨어져 있어 부다페스트에서 자동차로 한 세 시간 남짓 쉬지 않고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아담하고 예쁜 도시로 인구야 고작 인근에 있는 이웃 마을과 합쳐서 15,00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샤로스파탁은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교회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곳인데 종교개혁의 바람이 서유럽으로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유럽의 헝가리에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종교개혁과 더불어 1531년에 이곳에 헝가리에서는 최초로 샤로스파탁에 개혁신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집시선교를 위해서 샤로스파탁에 베이스를 몇 가지 이유는 첫째는 이 지역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집시들 더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 전체 인구의 약 10%에 달하는 집시민족의 비율이 이 지역에는 약 25% 이상이 거주하고 있고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은 이 비율보다 더 많은 집시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헝가리 세계선교 연합회 회장, 헝가리 개혁교회 장로회 연합회 회장, 샤로스파탁 개혁신학교 선교학 교수로 계시는 사보 다니엘 목사님이 오래 전부터 집시선교를 해오고 계셨는데 이곳에서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집시선교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셋째 이유는 샤로스파탁에서 슬로바키아가 자동차로 약 15분 남짓, 우크라이나의 경우 한 시간, 루마니아가 약 두 시간 반이면 국경에 이를 수 있는데 이 지역들은 헝가리의 과거 역사 중에 1920년 이후에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서 주변 일곱 나라에게 지금의 영토보다 두 배가 넘는 지역을 분할 당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는 헝가리 문화권에 있는 집시들이 많이 살고 있고 또한 칼빈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헝가리 개혁교회들이 잘 세워져 있어 집시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최적지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집시선교 사역을 위해 우선은 집시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샤로스파탁 개혁 신학교에 들러 교수님들, 신학생들과 교제를 나누고 때로는 도서관에 들러서 집시들에 관한 책이나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종종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집시선교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기도 하였다. 또한 집시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든 기관이든 모두 만나서 집시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였지만 많은 정보가 있음에도 정확하게 딱 짚어서 “이것이다”라고 정의하기는 힘이 들었다. 나중 글에서도 언급되겠지만 집시들의 상황이나 문제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정황 속에서 여러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단 집시선교 뿐 아니라 선교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일 것이다. 헝가리 언어를 익히는데 있어 샤로스파탁은 작은 도시여서 부다페스트처럼 어학원이 있어 체계적으로 언어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었지만 이곳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던 샤로스파탁 짐나지움(고등학교 과정)의 독일어 교사인 죠리 아니코(Gyori Aniko) 자매, 우크라이나 출신의 포보도르 유딧(Povodor Udit), 그리고 예원이의 유치원 교사인 에제드 카티(Egyed Kasti) 등으로부터 부정기적으로 헝가리 언어를 익힐 수밖에 없었다.
집시 마을 체펠(Csepel) 방문
그런 와중에 집시들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헝가리 백인과 집시들을 확연히 분간할 수 있으며 시내에서 만나는 집시들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덧 한 달이 흘러서 비록 헝가리 언어는 되지 않지만 집시 마을을 방문하기로 작정을 하고 당시에 샤로스파탁 개혁교회 신학교의 학장이신 죠리 이스트반(Gyori Istvan) 교수님에게 집시 마을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인근에 있는 체펠(Csepel)이라는 마을을 소개해 주셨다.
이스트반 교수님은 집시 마을을 가는 도중에 나에게 먼저 주의를 주셨다. 일반인들이 집시 마을을 방문이라도 하게 되면 집시 아이들이 지나가는 차량에 돌을 던지기도 하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차를 세워놓고 마을 주변만 살핀 후에 그날은 집시 가정을 방문하지는 않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체펠(Csepel)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체펠 마을은 약 25 가정, 130여 명 남짓 집시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첫 눈에 들어온 마을의 모습은 그저 황량하고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특이한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형편없는 처지임에도 집집마다 두서너 마리의 큰 개들을 키우고 있었고 겨울임에도 지붕이 휭하니 뚫린 집들과 창문이 부서져 비닐로 겨우 가림막을 한 모습이었다. 또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는 사람과 동물의 오물들이 널려있었다.
우리가 첫 번째 방문한 집시 가정은 구야쉬 라슬로(Guyas Laszlo)라는 네 자녀를 두고 있는 20대 후반인 젊은 형제의 가정으로 교도소에서 막 출감한 이후였다. 교도소에서 막 출감을 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던 내 모습과는 달리 라슬로 형제는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는 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할 때에 샤로스파탁 신학교 학생들이 교도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예배에 동참했던 이야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더 놓이는 듯하였다. 다니엘 목사님은 나를 소개하시면서 “한국에서 집시선교를 위해서 온 선교사”라고 소개를 하시자 라슬로와 그의 가족 모두 헝가리에 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다음날 저녁 7시 경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지금 생각으로는 11월 말경이었던 것 같은데 아내인 안나 선교사와 예원이 함께 체펠 마을을 다시금 방문하게 되었다. 그해는 일찍 겨울이 오기도 했지만 체펠 마을에는 달빛이 눈밭에 반사되어 가로등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이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는지 조용하던 마을에 오직 개 짓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라슬로 형제 집에 이르렀을 때에 누군가가 창밖을 내다보더니 곧 이어 그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금 집안으로 안내를 해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겨우 얼굴이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희미한 불 빛 아래 여섯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작은 방에 가구라야 헌 침대와 난방을 위해서 나무를 때는 작은 난로 하나가 고작이었다. 제대로 된 전등도 없고 주방에 수도도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형편을 보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이 가정에 대한 긍휼함과 깊은 슬픔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우리가 서야할 자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주 집시선교 보고(3)은 집시선교의 현장으로(2-1)로 정정합니다*
동유럽 집시선교를 위해 헝가리의 샤로스파탁(Sarospatak)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 베이스를 두기로 했다. 샤로스파탁은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270Km 떨어져 있어 부다페스트에서 자동차로 한 세 시간 남짓 쉬지 않고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아담하고 예쁜 도시로 인구야 고작 인근에 있는 이웃 마을과 합쳐서 15,00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샤로스파탁은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교회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곳인데 종교개혁의 바람이 서유럽으로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유럽의 헝가리에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종교개혁과 더불어 1531년에 이곳에 헝가리에서는 최초로 샤로스파탁에 개혁신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집시선교를 위해서 샤로스파탁에 베이스를 몇 가지 이유는 첫째는 이 지역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집시들 더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 전체 인구의 약 10%에 달하는 집시민족의 비율이 이 지역에는 약 25% 이상이 거주하고 있고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은 이 비율보다 더 많은 집시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헝가리 세계선교 연합회 회장, 헝가리 개혁교회 장로회 연합회 회장, 샤로스파탁 개혁신학교 선교학 교수로 계시는 사보 다니엘 목사님이 오래 전부터 집시선교를 해오고 계셨는데 이곳에서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집시선교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셋째 이유는 샤로스파탁에서 슬로바키아가 자동차로 약 15분 남짓, 우크라이나의 경우 한 시간, 루마니아가 약 두 시간 반이면 국경에 이를 수 있는데 이 지역들은 헝가리의 과거 역사 중에 1920년 이후에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서 주변 일곱 나라에게 지금의 영토보다 두 배가 넘는 지역을 분할 당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는 헝가리 문화권에 있는 집시들이 많이 살고 있고 또한 칼빈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헝가리 개혁교회들이 잘 세워져 있어 집시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최적지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집시선교 사역을 위해 우선은 집시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샤로스파탁 개혁 신학교에 들러 교수님들, 신학생들과 교제를 나누고 때로는 도서관에 들러서 집시들에 관한 책이나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종종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집시선교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기도 하였다. 또한 집시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든 기관이든 모두 만나서 집시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였지만 많은 정보가 있음에도 정확하게 딱 짚어서 “이것이다”라고 정의하기는 힘이 들었다. 나중 글에서도 언급되겠지만 집시들의 상황이나 문제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정황 속에서 여러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단 집시선교 뿐 아니라 선교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일 것이다. 헝가리 언어를 익히는데 있어 샤로스파탁은 작은 도시여서 부다페스트처럼 어학원이 있어 체계적으로 언어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었지만 이곳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던 샤로스파탁 짐나지움(고등학교 과정)의 독일어 교사인 죠리 아니코(Gyori Aniko) 자매, 우크라이나 출신의 포보도르 유딧(Povodor Udit), 그리고 예원이의 유치원 교사인 에제드 카티(Egyed Kasti) 등으로부터 부정기적으로 헝가리 언어를 익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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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로스파탁 성(城)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은 1494년에 세워진 카톨릭 성당과 오른 쪽은 종교개혁 이후에 1536년에 세워진 샤로스파탁 개혁교회 모습. | |
집시 마을 체펠(Csepel) 방문
그런 와중에 집시들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헝가리 백인과 집시들을 확연히 분간할 수 있으며 시내에서 만나는 집시들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덧 한 달이 흘러서 비록 헝가리 언어는 되지 않지만 집시 마을을 방문하기로 작정을 하고 당시에 샤로스파탁 개혁교회 신학교의 학장이신 죠리 이스트반(Gyori Istvan) 교수님에게 집시 마을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인근에 있는 체펠(Csepel)이라는 마을을 소개해 주셨다.
이스트반 교수님은 집시 마을을 가는 도중에 나에게 먼저 주의를 주셨다. 일반인들이 집시 마을을 방문이라도 하게 되면 집시 아이들이 지나가는 차량에 돌을 던지기도 하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차를 세워놓고 마을 주변만 살핀 후에 그날은 집시 가정을 방문하지는 않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 사보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체펠(Csepel)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체펠 마을은 약 25 가정, 130여 명 남짓 집시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첫 눈에 들어온 마을의 모습은 그저 황량하고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특이한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형편없는 처지임에도 집집마다 두서너 마리의 큰 개들을 키우고 있었고 겨울임에도 지붕이 휭하니 뚫린 집들과 창문이 부서져 비닐로 겨우 가림막을 한 모습이었다. 또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는 사람과 동물의 오물들이 널려있었다.
우리가 첫 번째 방문한 집시 가정은 구야쉬 라슬로(Guyas Laszlo)라는 네 자녀를 두고 있는 20대 후반인 젊은 형제의 가정으로 교도소에서 막 출감한 이후였다. 교도소에서 막 출감을 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던 내 모습과는 달리 라슬로 형제는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는 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할 때에 샤로스파탁 신학교 학생들이 교도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예배에 동참했던 이야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더 놓이는 듯하였다. 다니엘 목사님은 나를 소개하시면서 “한국에서 집시선교를 위해서 온 선교사”라고 소개를 하시자 라슬로와 그의 가족 모두 헝가리에 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다음날 저녁 7시 경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지금 생각으로는 11월 말경이었던 것 같은데 아내인 안나 선교사와 예원이 함께 체펠 마을을 다시금 방문하게 되었다. 그해는 일찍 겨울이 오기도 했지만 체펠 마을에는 달빛이 눈밭에 반사되어 가로등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이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는지 조용하던 마을에 오직 개 짓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라슬로 형제 집에 이르렀을 때에 누군가가 창밖을 내다보더니 곧 이어 그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금 집안으로 안내를 해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겨우 얼굴이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희미한 불 빛 아래 여섯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작은 방에 가구라야 헌 침대와 난방을 위해서 나무를 때는 작은 난로 하나가 고작이었다. 제대로 된 전등도 없고 주방에 수도도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형편을 보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이 가정에 대한 긍휼함과 깊은 슬픔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우리가 서야할 자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주 집시선교 보고(3)은 집시선교의 현장으로(2-1)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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