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 교회의 세속화는 이 같은 그리스도교적 이해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깊은 이해와 접근의 지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성서의 메시지를 시대 시대에 올바로 해석해 주고 말을 해주기 위하여 늘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 왔다. 중세교회는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등) 존재론적 언어를 사용하였고, 루터나 칼빈은 개혁자로써 대체로 계시의 언어를 사용하여 왔으며,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17세기니 18세기의 정통주의적이고 교리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경험론적인 언어와 종교적인 언어, 그리고 관념론적인 언어를 사용하였다. 교회는 반듯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익숙한 언어 외에는 안 된다는 제한과 틀 안에 갇혀 있지만은 아니했다.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역사가 이렇게 인도하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교회가 그 시대마다 세상에서 사용해 오는 고전적인 언어를 현실에 맞게 해석하고 개입하고 참여하는 길을 열어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교인들은 이 세상과 시대 속에서 영원한 골동품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세속문화 속에서 신앙으로 누룩이 되고 밀알이 되기 위한 전위대요 정병이 되어야 세속가운데서 거룩을 이루게 될 것이다.
교회가 관심하는 것은 꼭 내세 (천국) 만이 아니고, 다시 창조되고 보존되며 법들에 의해 쓰여 왔으며 구속되고 갱신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소망은 세상에 난 사람들이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에 합당한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펼쳐 가는 일이다. 그것은 구약에서 보다 신약에서 더 뚜렷하게 그 소망이 강조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신 것처럼 이 땅위의 삶을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남김없이 마음껏 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자라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거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요, 땅에 묻힌 것은 적극적인 세속이며, 부활하사 승천하신 것은 그 이상 없는 영광인 것이다. 이 적극적인 세속의 끝에 거룩하고 신령한 부활이 있다.
교회 즉 신앙공동체란 이 험난한 세상에서의 피난처가 아니다. 하나님의 호의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는 하나(거룩성),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적으로 세상을 위하여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남을 위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남을 위해 사신 것처럼 교회도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나” 개인에게는 하자(瑕疵)가 발생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교회는 결코 그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자못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교회와 문화, 교회와 세상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문화로부터 물러나 편안한 크럽 (Club)으로 고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세속에서 죽어 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몬 문둥이 집에서도 잡수시고, 세상에서 지탄받는 세리 마태와 삭개오의 집에서도 잡수시었으며 죄인이라고 멸시받고 천대당하는 여인의 시중도 소중히 받아들이셨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은 “저가 죄인의 친구로다” 하고 비난하고 비웃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이 받았던 것과 같은 수모와 멸시와 천대, 지탄을 받아보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편안히 전하여 지고 선교사도 많이 보냈으며, 웅대한 교회당이 우뚝 서 있는 이 시대가 과연 교회사에 빛나는 복음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교회의 황금기는 더 이상 종교개혁이나 화려한 중세교회 시대가 아니라 이 세속주의적인 세상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죽어 갈 때에 , 교회의 황금기를 도래할 것이다. 이 새 천년대라고 하는 이 시대를 종말이 가까운 '때'라고 말한대서 안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만이 아니며 또 박해 앞에서 다소곳이 얼굴을 숙이는 일만도 아니다. (계속)
교회가 관심하는 것은 꼭 내세 (천국) 만이 아니고, 다시 창조되고 보존되며 법들에 의해 쓰여 왔으며 구속되고 갱신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소망은 세상에 난 사람들이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에 합당한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펼쳐 가는 일이다. 그것은 구약에서 보다 신약에서 더 뚜렷하게 그 소망이 강조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신 것처럼 이 땅위의 삶을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남김없이 마음껏 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자라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거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요, 땅에 묻힌 것은 적극적인 세속이며, 부활하사 승천하신 것은 그 이상 없는 영광인 것이다. 이 적극적인 세속의 끝에 거룩하고 신령한 부활이 있다.
교회 즉 신앙공동체란 이 험난한 세상에서의 피난처가 아니다. 하나님의 호의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는 하나(거룩성),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적으로 세상을 위하여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남을 위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남을 위해 사신 것처럼 교회도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나” 개인에게는 하자(瑕疵)가 발생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교회는 결코 그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자못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교회와 문화, 교회와 세상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문화로부터 물러나 편안한 크럽 (Club)으로 고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세속에서 죽어 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몬 문둥이 집에서도 잡수시고, 세상에서 지탄받는 세리 마태와 삭개오의 집에서도 잡수시었으며 죄인이라고 멸시받고 천대당하는 여인의 시중도 소중히 받아들이셨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은 “저가 죄인의 친구로다” 하고 비난하고 비웃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이 받았던 것과 같은 수모와 멸시와 천대, 지탄을 받아보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편안히 전하여 지고 선교사도 많이 보냈으며, 웅대한 교회당이 우뚝 서 있는 이 시대가 과연 교회사에 빛나는 복음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교회의 황금기는 더 이상 종교개혁이나 화려한 중세교회 시대가 아니라 이 세속주의적인 세상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죽어 갈 때에 , 교회의 황금기를 도래할 것이다. 이 새 천년대라고 하는 이 시대를 종말이 가까운 '때'라고 말한대서 안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만이 아니며 또 박해 앞에서 다소곳이 얼굴을 숙이는 일만도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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