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 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 인터뷰

크리스천인 길희성 교수(서강대 불교학)가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자처하며 <보살예수>를 발간, 최근 신학계와 한국교회에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태도를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종교간 열린 시각과 대화의 창구를 뚫어내고 싶었다”고 말한 <보살예수>의 저자 길희성 교수, "종교다원주의, 이제 침묵하지 말고 씨름할 때다"라고 강조한 감신대 이정배 교수(조직신학), "이 담론은 한국교회에서 더 이상 묻혀져서는 안될 중대한 과제다"라고 강조하는 한신대 김경재 교수(신학과)에 이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을 표방하는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를 만나 인터뷰했다

-종교다원론을 바라보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을 쉽게 설명해달라

복음주의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이다. 이러한 복음주의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WCC가 그동안 복음주의와 변질된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에 복음주의 1974년 스위스 로잔 회의 때에 존 스토트 목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는 우리의 입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서 절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1989년에도 소위 제2회 로잔대회가 열린 필리핀, 마닐라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 분명히 천명했던 바 있다

국내에서도 1995년 서울에서 생겨난 'GCOWED'이라는 단체 또한 그 노선을 분명히 확인했었다.

한편 1990년대 초에 감신대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론이 큰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에 대한 '반대' 논문이 복음주의자들(나를 포함해서)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종교다원론을 향한 반론을 위한 반론을 하긴 했지만, 지금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답변이 될만한 내용이 충분히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내게 아쉬운 점으로 기억된다

나는 종교다원론을 다룰 때 사실적인 차원과 평가적인 차원을 나눠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적인 차원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종교가 다원화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두 번째, 평가적 차원이라는 것은 종교다원주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 복음주의자들이 평가적 차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이 사안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 다원화 시대,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없고, 무조건 종교다원론에 대한 반론을 목적으로 하는 글을 썼던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그 당시 썼던 본인의 논문에서 핵심내용은 무엇인가?

▲"타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만남의 장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배본철 교수. ⓒ송경호 기자
그 때 썼던 논문의 핵심은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선교적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우리에게 있는 우리가 복음을 예외없이 전해야 할 타종교인들을 가능한 한 많이 만나고 대화하면서 접촉의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만남의 장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복음전파에 있어 타종교와의 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예수님께서도 전도를 제자를 삼아, 관계 중심적으로 접근해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대화는 필연적이다. 그게 바로 종교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 바로 '선교적 대화'다.

복음주의자들이 배타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수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 때문이지 무조건 타종교와의 만남 자체를 터부시하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타종교를 향한 열린 마음과 대화'다. 종교다원론이 역으로 지혜롭게 활용할 시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서 다원주의자라는 것이 참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고, 또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예수는 길이요, 생명이고, 진리다'라는 신앙을 갖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세계 많은 종교가 크게 혼합주의와 배타주의 이 두 성격의 종교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유교, 도교, 불교 등 혼합주의 종교의 경우는 생리적으로 다른 종교를 용인해 줄 수 있다.

반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배타적인 종교들은 '내 종교성 아니면 안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결국 기독교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다른 길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게 가능하다는 말은 복음주의 측에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복음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길 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없다.

-얼마전 인터뷰 한 김경재 교수는, "'종교다원론'과 '종교다원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은?

"~론"을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면 종교다원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종교다원론이라는 이론은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종교다원론이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면, 종교다원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타종교를 대하는 데 있어 복음주의적인 자세는 어떤 것인가

▲"다른 길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가능하다는 다원주의자들의 말은 복음주의 측에서 납득하기가 어렵다"고 배본철 교수는 말한다. ⓒ송경호 기자
크게 네 가지 반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가장 보수적이고 완고한 태도로써 기독교의 타종교는 모두 악한 것, 절대 가치가 없다. 마귀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수호하겠으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타종교인들의 신앙을 이해해주고 그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가장 확실한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데, 나머지 종교는 희미한 구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들은 나머지 종교의 희미한 구원을 보충해 줄 책임이 있다'라는 이야기다.

네 번째는 모든 종교는 상대적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유형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은 복음주의적인 두 가지 스타일의 입장이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다원주의적 신앙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차이를 굳이 들자면, 세 번째는 '그래도 기독교가 월등함을 인정한다' 하면서,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으로 네 번째 스타일이 가장 용감한 다원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종교다원론자들이 말하는 '선한 양심을 지키며 살았던 선조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기에 지옥에 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분들의 두려움은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너무 극단화시킨 탓에 있다. 심판받으면 떨어진다는 지옥을 가장 극악하고 처절한 그런 상태라고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순신 세종대왕 예수님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행한 대로 값을 치루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또 율법이 없는 자들의 경우는 양심에 의해서 심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생전에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정당한 값은 사후에 다 치뤄지게 되는 것이 그의 내세이고 그의 지옥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지옥이라는 설정이 대개 불교에서 우리에게 전래되어온 지옥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런 불교적인 관념의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생전에 모든 것들의 값이 그대로 치루어지는 지옥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가 개인마다 다 다르기에, 지옥의 상태는 사람마다 같다고도 할 수 없다.

한번도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도 행한대로 심판받는다. 하나님은 다시 말하지만 심판에 있어 매우 공의로우시다.

그렇다면, 선하게 산 사람들이 또다시 예수를 믿어야 하고 구원받을 필요는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내면 안에 있는 죄성이나 흉악함을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대부분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고통과 절망의 상태를 느끼고 구원에 대한 갈증이 크다.

결국 "이대로 죽으면 참 나의 영혼의 대가가 밝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하튼 이들은 이 갈증을 극복하려고 완전주의적 삶을 지향하다 보니, 율법주의 같은 신앙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증하여 이 땅 가운데 드러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용서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가 명백해진다.

모든 사람들은 다 행한대로 보응을 받는다. 정말 우리들이 오늘 이 상태로 죽게 될 때 천국의 기쁨과 평강을 맞이할 수 있을까? 모든 인생의 레코트가 하나님 앞에 풀어질 때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다원론이 그래서 신학계에서 민감한 문제로 거론되는 것은 종교다원론이 만약 맞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생명구원사역인 세계선교에 대한 절박함과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보수-진보진영 신학자들 간에 종교다원론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실제로 복음주의 노선에서 보는 신학계 종교다원론 담론의 현황과 실태는 어떠하다고 보는가

▲배본철 교수는 "종교다원론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생명구원사역인 세계선교에 대한 절박함과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송경호 기자
현황은 말한 것처럼 긴장감이 있고 또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종교다원론자의 대표자 변선환 교수님께서 돌아 가시기 얼마 전에 나에게 새벽에 전화를 하셨던 일이 있다.

그러면서 "배 교수 논문을 좋게 읽었다"며, "내가 한국 교회에 덕을 못세웠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 이게 무슨 말인가? 변 교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종교다원론을 자랑스럽게 가르치신 분이었다. 힌두교, 기독교인들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불교의 스님 앞에서 강연하고 타종교인들간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런데 이 당시 우리 한국교회는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론을 씹어먹고 소화시킬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토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변 교수가 "이 고기를 도대체 왜 못먹냐?"면서, 약한 사람들에게 막 집어 던지니 결국 그의 이론을 듣고 먹는 사람들마다 다 배탈이 나고 체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종교다원론이 진리' 라고 생각했겠지만 말년에 가서는 후회했다. 한국 교회에 덕을 못세웠다'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던져주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신앙인의 자세인데 말이다.

물론 변 교수는 그런 진리를 외쳤기에 또한 몸소 삶으로도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하셨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존중할 것은 존중하지만 종교다원주의가 한국교회를 강타할 때 신자들의 신앙이 다 강타될 수 있는 위험성은 분명 절연해야 한다.

-'종교다원론과의 씨름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내세우는 진보 신학자들의 노선과 달리,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종교다원론의 등장과 움직임을 선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어떻게 해석해야겠는가

시대가 변하면 선교의 전략이 바뀌어져야 하는데, 중세 때의 경우, 무력 선교를 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선진국들이 돈이나 문화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는 힘에 의한 선교를 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이 시대 더 이상 세계에 먹혀 들여가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떠한 선교를 해야 하는가? 힘에 의한 선교에서 과감하게 스스로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자신의 몸을 드려 성육신되신 예수님의 선교, 종이 되신 선교에 우리는 전념해야 한다. 또 낮아짐의 정신이 있어야만 관계중심적 전도의 결실이 맺어질 수 있다.

종래에는 한 부족을 통채로 개종시키려고 개종주의적인 전도를, 그리고 선교를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식으로는 안된다. 관계 중심적으로 한 사람의 복음적 회심을 선교전략을 목표로 해야 한다.

다원화된 종교사회가 세계선교 완수를 요청하고 있다. 결국 종교다원론의 출현은 사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매우 완고한 전통적인 선교관념이나 태도에서 벗어나서 열린 자세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자의 입장에서 분명 종교다원주의는 옳지 않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에서 종교다원론이 강조하는 '타종교를 향해 열린 자세, 대화'가 관계중심적 전도전략의 올바른 태도인 것은 확실하다.

-세계선교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한국 기독교라면 앞서 언급한 소위 '선교적 대화'라는 배본철 교수님의 표현에 주목했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선교적 대화'는 것은 무엇이며, 이것은 선교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겠는가

선교적 대화의 첫째 단계는 복음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그 다음 타종교인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자꾸 대화하는 과정을 갖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이나믹한 성령의 능력이 언젠가 만남의 장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선교적 대화를 꼭 준비해야 할 것으로 권면하고 싶은 것은 내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내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한편 외면적으로는 가장 관용적이고, 포용적이며 용납하는 사랑의 자세로서 타종교인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사실 대부분 보수적이다 보니 잘못된 종래의 선교관념으로 타종교인을 너무 무시하고 배타하고 마귀적으로 대해 그들이 절대 크리스천 앞에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이고 정말 회개해야 할 내용이다.

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해 보았던 경험이 종종 있었다. 이때 전도의 방식은 일단 여호와 증인, 몰몬교, 구원파들을 일부러 만나서 집으로 초청해서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마음을 연다. 이때 이들에게 어떤 한계가 있는가 설명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화하기에 앞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라.이는 물론 먼저는 상대가 말하는 타종교를 향한 절대적 신념과 신앙을 일단 존중해서 마음이 열린 상태에서 가능하다. 또 이와 함께 사랑으로 대접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결국 그들도 우리 앞에 마음을 열게 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어떤 대우를 받는가 보면, 험악한 대우들, 즉 욕부터 시작해서 정말 그들을 마귀 대하듯 쫓아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럴 때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십니까?'라고 그들에게 물어보면, '성경에 보면 무릇 경건하게 사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생각을 하고 더 위로를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여호와 증인이 이단이라고 하면서 아예 사람 자체를 배척하고, 금을 긋고 무시하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결코 그들의 영혼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땅끝'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남은 '땅끝'은 타종교인들의 영혼이다.

이 시대는 타 종교인들을 얻으려면 우리가 다른 모습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신념은 물론이지만, 그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들의 한계를 또한 이해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기독교가 타종교에는 접근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식의 극단적 폐쇄적 태도는 지양해야 하며 종교다원론이 우리로 하여금 타종교인들과 이단에 빠진 모든 영혼들을 구원해야 겠다는 데 눈을 돌리게 해주는 고마운 숙제를 안겨준다"고 역설하는 배본철 교수. ⓒ송경호 기자
오늘날의 시대가 변화된 세계이며 다원화된 시대임을 받아들이자. 그러나 시대는 변해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오직 예수가 길이라는 데 변함없지만 보다 효과적인 모습으로 타종교인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살려야 한다는 선교적 원칙을 잊지 말자.

그런 다원화 시대에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께서 신학계에서 기독교 복음주의와 서로 대치된 것으로 싸움하라고 등장시킨 논쟁 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종교다원주의 같은 이슈들이 일어남에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다문화 시대에 세계선교완수를 위해 필요한 효과적 전도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개발과 훈련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고 기독교인의 타종교를 향한 잘못된 태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다원론에 대한 담론조차 묻혀지고 없으면, 오늘의 기독교가 타종교인들이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생각하고, 결국은 그들을 선교하는 것에 자칫 무관심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그들에게로 가라고 명하시는데 우리는 '그들은 우리의 관심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문제다.

우리 주위에서 더이상 전도할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주위에 있는 친척, 친구 중에서 타종교인들과 이단들을 제외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기도 리스트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무조건 타종교에는 접근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식의 극단적 폐쇄적 태도는 지양해야겠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명 완수를 위해 성도들이 타종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킬 책임이 있다. 그러니 종교다원론이란 한국 기독교와 부딪힐 대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탁월한 선교와 타종교인들과 이단에 빠진 모든 영혼들을 구원해야 겠다는 데 눈을 돌리게 해주는 신학계에 있어 고마운 숙제를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