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면, 인본주의에 푹 젖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를 비웃는다.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그렇게 서글픈 종교를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의 신앙 경력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데에 이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이 주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신가?“하는 의문의 단계에서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이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신구약성경 전편에 흐르는 내용은 이 우주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Sovereignty)을 인정하지(acknowledge)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accept)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아담에게 주신 에덴동산에서의 언약(covenant)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에 이르는 8번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들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통치권하에서 설정된 언약들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Almighty)을 인지하고 그의 절대 통치권을 받아들이게(accept) 될 때, 인간은 복음이라고 불리우는 신약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기반이 준비된다. 푹 젖어있던 인본주의와 무신론과 불가지론의 옷을 벗고 믿음의 옷을 입을 준비가 되게 된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한 “하나님의 종 혹은 예수를 위한 노예(slave)”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수긍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나는 그가 만드신 도구라는 말씀을 수긍할 수 있게 되며, 타협이나 거래가 불가능한 절대통치권자에 대한 절대 복종의 자세를 가질 준비가 되게 된다. 그래서 현대인의 “그 서글픈 종교--?”의 관점에서 “나는 그가 만드신 토기“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도 하루 아침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설교에서 “천국시민권”이라는 말이 의외로 자주 쓰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단지 한번 이 말을 사용하였다. 아마도 그는 오늘의 교회를 생각하고 말을 아꼈는지 모른다. 복음서들의 해설서라고도 설명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하늘왕국”의 오역인 “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 보다는 천국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사는 길을 가르친다.

사도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노예로 또 도구로 살 것을 가르친다. 이는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영주권을 가지고 시민과 같이 사는 길을 익히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우리는 매우 맹랑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설교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처음만난 성도에게 묻는다. “구원의 확신은 있으십니까?” 혹은 “천국시민권은 받으셨읍니까?”

푹 젖어살던 인본주의의 옷을 벗고 왕국 백성의 옷을 입기 원하여 교회에 온 이에게,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도, 그의 절대 통치권에 대한 확신도 없는 이에게 성경구절 몇구절 가르쳐주고, 암기시키고나서 “당신은 이제 구원 받았고,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확신을 가져도 좋습니다”라고 가르친다면, 성경적으로 어딘가 모순이 있어보인다. 그리스도의 노예로 인생을 산 바울사도께서는 말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혹은 이미 완전해 졌다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것을 위해서 나를 붙잡으신 바의 그것을 붙들기 위하여 애쓰노라. 형제들이여, 나는 내 자신이 아직 이를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나는 한 일을 하거니와, 이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힘써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상을 받도록 하늘을 향하여 나를 부르신 바 그것을 받기 위한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노라[빌3:12-]”

우리의 왕께서는 복음전파하라고 했지 시민권 남발하라고 했는가?고 당신을 추궁하시지는 않겠는가? 심어서 싹도 안난 씨에게 확신만 주려는가? 씨가 싹이 나서 자라서 계절의 혹독함을 수 없이 겪고 그리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닌가? 목표를 향하여 갈 길이 많이 남은 이에게 다 왔다고 속여서 혹세무민하려는가? 최면을 걸어서 확신시킨다고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지겠는가? 오히려 입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나, 영적 비만자나, 영적으로 오만한자들이나, 영적 불구자들이나 교회에 암세포와 같은 이단자를 양산해내지는 않을 것인가?

이 자연이 우리에게 육체적 양식을 제공하는 것과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양식을 제공한다. 성경을 영적 식량의 보고(寶庫)로 보자. 구약과 신약에서 우리는 골고루 영양가 있는 영적 양식들을 섭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 한글개역성경은 온통 베일에 가리워서 접근해서 먹을 수 없는 밭이 도처에 있으며, 어휘가 어려워서 소화할 수 없는 딱딱한 음식이 편재해있다.

그러한 상황에 부드럽고 달달한 구절만을 몇 개 뽑아서 톡톡쏘는 세상 양념을 팍팍쳐서, 마치 맥도널드 햄버거를 조리하듯이 요리하고 포장해서 드립다 먹여대면, 살만찌지 않겠는가? 아주 영적 체질을 버려놓지는 않겠는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고혈압에 걸리고, 당뇨에 걸리며, 비만에 걸리며, 암에 걸리며, 성인병들에 걸리지 않도록 우리 교회는 영적식단을 재검토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맛으로 경쟁해서 사람을 문턱 안으로 끌어들이는 맥도널드나 버거킹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과 관용의 피가 흐르지 않아서 절단되고 분열되는 교회가 이를 입증하지 않는가? 성도가 어떤 영적몸체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전 교단들이 힘을 합하여 오류투성이인 한글개역성경을 재번역하고 그 번역본을 사용할 때에 이르렀다. 이 일은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도되어야한다. 교회와 교단에 이를 요구하고 촉구하자.

마이클 송 <동서성서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