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한권 소개받았습니다. 김훈의 장편 소설 ‘남한산성’입니다. 소개하는 분의 말에 의하면 “나는 글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온 몸이 전율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탁을 했더니 책방에서 일하는 서국일형제가 돈을 받지 않고 선물이라며 오늘 가지고 왔습니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날이기에 읽을 수 가 없었지만 새 책을 받으면 늘 하는 것 처럼 앞뒤 겉장을 읽어 보고 속을 한번 어림으로 들쳐 보았습니다. 한 문장을 읽으며 추천한 분의 말이 조금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 뒷장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고난주간 설교를 준비하는 나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표현이었습니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으리.” 주일 저녁 모든 교회 프로그램이 끝나면 빨리 집으로 가서 단숨에 읽으려 합니다.
좋을 글을 만나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좋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란 너무도 많은 군더더기와 헛된 몸짓의 반복이 많기 때문에 허탈할 때가 많지만 글 속에서 만나는 세상은 그래도 순화되고 아름다움을 향한 몸부림의 낭비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책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현실로 바로 돌아오는 훈련이 그래도 잘 되어 있다고 자부합니다. 책 속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만큼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도 그렇고 기도의 시간도 하나님과 만남의 깊이에 따라 내가 살아가는 어떨 때는 냉혹한 삶의 현실이 그만큼 거룩해지고 아름다워 집니다.
어느 모임에 갔더니 교회에 대한 조소적이고 비판적인 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기도 하고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오늘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도 그렇고 비판과 비난은 잠깐이어야 하고 소망과 가능성 발견에 많은 시간과 관심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그것이 교회이건 가정이건 완전한 이상적 현실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이미 이루어 진 것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 역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많이 부족해도 우리 교회에서 그런 소망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교회를 세워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치유와 구원 그리고 해방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하신 것처럼 “눈이 있는 자는 보아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망보다는 포기에 익숙합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이 앞섭니다.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비판하고 비난하기에 빠릅니다. 저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이상주의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관념적 이상주의자들은 역사변혁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너무도 절실합니다. 철저하게 육신의 한계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마지막 숨마저 모두 하나님께 드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관념이 아니라 추상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의 현실을 모르는 비현실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고 결국에는 교황청으로부터 ‘비현실적 해방신학자’라 불리우고 신학교에서 쫓겨난 이후 남미 가난한 마을에서 목회를 하시는 소브리노 신부님을 찾아간 미국 기자가 던졌던 첫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현실입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Sobrino 신부님의 답은 “Reality is the Cross of Jesus Christ.”(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한마디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노년의 신부님의 말씀은 참으로 강하게 제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책 뒷장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고난주간 설교를 준비하는 나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표현이었습니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으리.” 주일 저녁 모든 교회 프로그램이 끝나면 빨리 집으로 가서 단숨에 읽으려 합니다.
좋을 글을 만나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좋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란 너무도 많은 군더더기와 헛된 몸짓의 반복이 많기 때문에 허탈할 때가 많지만 글 속에서 만나는 세상은 그래도 순화되고 아름다움을 향한 몸부림의 낭비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책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현실로 바로 돌아오는 훈련이 그래도 잘 되어 있다고 자부합니다. 책 속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만큼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도 그렇고 기도의 시간도 하나님과 만남의 깊이에 따라 내가 살아가는 어떨 때는 냉혹한 삶의 현실이 그만큼 거룩해지고 아름다워 집니다.
어느 모임에 갔더니 교회에 대한 조소적이고 비판적인 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기도 하고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오늘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도 그렇고 비판과 비난은 잠깐이어야 하고 소망과 가능성 발견에 많은 시간과 관심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그것이 교회이건 가정이건 완전한 이상적 현실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이미 이루어 진 것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 역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많이 부족해도 우리 교회에서 그런 소망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교회를 세워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치유와 구원 그리고 해방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하신 것처럼 “눈이 있는 자는 보아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망보다는 포기에 익숙합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이 앞섭니다.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비판하고 비난하기에 빠릅니다. 저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이상주의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관념적 이상주의자들은 역사변혁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너무도 절실합니다. 철저하게 육신의 한계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마지막 숨마저 모두 하나님께 드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관념이 아니라 추상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의 현실을 모르는 비현실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고 결국에는 교황청으로부터 ‘비현실적 해방신학자’라 불리우고 신학교에서 쫓겨난 이후 남미 가난한 마을에서 목회를 하시는 소브리노 신부님을 찾아간 미국 기자가 던졌던 첫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현실입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Sobrino 신부님의 답은 “Reality is the Cross of Jesus Christ.”(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한마디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노년의 신부님의 말씀은 참으로 강하게 제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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