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목사 납북 사실이 정부의 침묵 속에 사건발생 5년이 지나 또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더구나 탈북사역을 통해 북한 복음화의 꿈을 품고 있었던 김 목사 납북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납치 피해 국가다. 그리고 한국보다 앞서 납북자 가족 모임을 결성하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대국민적 여론을 모으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 왔다. 일본인 납치 사실은 KAL858기 폭파사건이 있은 이듬해인 88년 1월, 일본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현희가 납치된 일본인으로부터 일어를 배운 사실을 증언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납북문제가 일본에서 이슈화되기까지는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 '북조선피랍자구출가족협의회'(구원회)의 니시오카 쯔토무 교수(동경기독교대학)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 납치 문제는 한국 국민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지에 달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더구나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던 과정에서 김 목사가 납북된 사건에 같은 믿음을 가진 공동체인 교회가 나서야 한다"면서 한국교회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일본 납치문제 이슈화까지 20여년..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나

현재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납치 피해자는 15명. 이들은 모두 70년대 말에서 80년대 후반 사이에 납치된 사람들이다. 북조선피랍자구출가족협의회에서는 60년대도 납치 피해자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납치자 가족들의 경우 갑작스럽게 실종된 가족들이 그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납치 피해자들은 해변에서 사라졌으며, 모녀가 시장에 갔다가 함께 사라지기도 했다. 최근 북한이 전달한 일본인 피랍 여성 유골이 가짜인 것으로 밝혀져 문제가 되기도 했던 요코다 메구미씨는 납치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으며 하교길에 실종됐다. 가족들은 가출 혹은 자살이 아닌가 생각하며 애태웠으나, 쯔토무 교수는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북한이 납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실종사건이 있을 때마다 일본 근해에 북한 공작선이 모습을 드러냈고 극비로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북한공작원들은 캄캄한 밤에 작은 배를 갈아 타고 일본땅으로 와서 일본인을 유인, 납치했다.

79년에는 북한 피랍에 관한 일본공안회의가 있었으나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80년 1월 산케이 신문은 70년대 실종사건이 북한에 의한 납치사건일 수 있다는 기사를 썼으나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북한 무선을 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이 오히려 적에게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는 판단하에 침묵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국회에 3분의 1이 친북세력일 만큼 좌익의 세력이 강했던 시대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후 80년대 말 김현희의 증언으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가 사실로 드러났으며, 납치된 일본인들은 일본어, 일본 문화 등 공작원이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법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러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88년 3월의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국가 치안의 최고책임자인 가지야마 시즈로크 국가공안위원장은 기자회견서 연쇄 실종 사건이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이 크다는 역사적인 답변을 했다. 공개적으로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북한의 납치를 인정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일본의 언론매체에 납치자 가족들은 외면당했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은 국가공안위원장의 발언한 납치 문제에 대해 한 줄도 쓰지 않았으며, 산케이, 닛케이 신문도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당시만해도 기자들 중에 좌파가 많았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영향력이 강하여 북한 비방 기사를 쓰면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 쯔토무 교수의 설명이다.

사실 납치자 가족들은 피해자의 신변에 해가 미칠것을 두려워하여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97년 메구미씨의 부모는 피해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모임인 북조선피랍자구출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국민여론에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북한 공작원의 증언으로 공작원양성학교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요코타 메구미씨의 납치 문제가 세간의 주목을 끌면서 일본정부는 납치문제를 외교문제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현재 가고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모임은 전국적으로 34개 지부가 있으며, 현재까지 5백만명의 일본 국민들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이 모임은 99년부터 1년에 한차례씩 수천만 명이 모인 국민대집회를 열고, 정부에 서명을 제출하기도 했다. 또 총리에 두 번의 탄원을 내고 정부 각료와 외무성 경찰성 담당관 등과 면담을 갖고 납치문제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요구했다. 2002년 4월 일본국회는 납치가족지원법을 제정했다. 납치가족지원법은 피해자 및 가족지원법을 만들고 재정지원은 피해자에 한해 하기로 했다. 정부기구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수시로 정보를 제공하고, 납북자 관련 회담이 있을 때마다 가족들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정상회담에서 김정일에게서 '납치', '사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 때 일본은 결국 김정일로부터 납치 사실을 받아냈고, 5명의 피해자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피해자 가족들이 나선지 5년만에 일본 정부가 납치 문제를 정상회담의 의제로 삼으며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었다. 2003년에는 일본 국회선거에서 납치를 테러로 인정하는지 여부와 대북경제제재법 신설 찬성여부에 대한 조사에서 각각 80%, 70%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82명의 전후 납북 미귀환자, 누가 구할 것인가

99년 4월 북조선피랍자구출가족협의회가 국민집회를 할 때 한국인 납치자 가족들이 일본 대중 앞에 나서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선언했다. 2000년 2월에는 한국에서 납북가족모임이 발족했으며, 그해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납치문제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피해자 가족들은 통일봉 앞에서 '우리도 햇볕 정책의 혜택을 받고 싶다'며 피켓 시위를 했었다. 쯔토무 교수는 "한국과 일본은 여러 차이가 있으나, 일본이 5년 정도의 운동기간을 거쳐 사회적 이슈가 된 후 정상회담을 한 것이 한국과 큰 차이"라고 전했다. 그는 정부 담당자나 전문가들만 아는 단계에서는 국가차원에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피해자 가족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소와 언론의 지원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특히 김동식 목사 납북 사건이 납북가족모임이 발족한지 5년째 다시 이슈화된 것 또 하나의 전환의 계기가 될 것에 그는 기대감을 전했다. 쯔토무 교수는 "국민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1995년 탈북자 선교를 하다가 납치된 안승운 목사에 이어 2000년 김 목사 납치사건에 "이는 정치적 문제를 떠나 종교적 문제, 신앙적 문제"라며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닌 것처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목사가 납치된 이 사건에 가만히 있으면 교회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납북문제, 기독교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

납북자가 한 사람도 없는 미국이 제정한 북한인권법은 정치적 이유를 떠나 북한 인권문제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기독교적 신념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쯔토무 교수의 주장이다. 이에 비해 직접적인 피해국가인 일본과 한국은 납치에 관한 법안을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이 사실이다. 쯔토무 교수는 "피해자 가족의 심정을 가장 우선 생각해야 한다"며 한국인 납치자 가족들이 계속 용기를 가질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덧붙였다. 메구미씨의 어머니는 납치사건 후 백방으로 딸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심한 마음 고생을 하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에 그 어머니는 복음주의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메구미씨의 어머니는 이처럼 슬픈 일이 왜 자신과 가족에게 일어나는지 하나님의 참 뜻을 전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또 납치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해결되는데 확신을 얻게 됐다고 한다.

메구미씨 가족이 97년부터 피해자 가족회를 구성하고 일본 전역을 다니며 캠페인을 벌일 때, 메구미씨 어머니와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아주머니들은 이 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모임이 점차 발전하면서 2000년 생명의말씀사 회장이 사옥 예배당에서 메구미씨와 그녀의 어머니를 지원하는 기도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국민의 힘이 납치문제 해결에 큰 역할 할 것

6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김동식 목사 송환대책토론회에서 발표하기도 한 그는 김동식 목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한 탈북자가 "자신(탈북자)은 자유로운 한국에 왔지만, 김 목사가 결국 암흑의 북한에 가게 된 것을 미안해하며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일본의 경우 북한이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경제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납치한 일본인은 13명뿐이다', '메구미씨를 비롯한 8명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을 깨부수기 위해, 일본 단독으로 대북경제제재를 가하고, 유엔 안보이사회에서 대북한 경제제재를 발동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 김동식 목사와 납북자 가족모임 대표 최성룡씨의 부친 최원모씨,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 최우영씨 부친인 최종석씨 등 한국인 납북자들의 구출활동을 일본과 연계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이 외 한국, 미국, 영국 등 각국 국회의원들과의 국제적 의원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쯔토무 교수는 "미국 정부는 앞으로 북한과 협상할 때 일본인 납치문제를 언급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한국인 납치문제는 한국 정부의 요청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언급하지 못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한국 정부의 도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 중에 오히려 70년대 일본의 지식층과 같이 좌파가 많아 안타깝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와 인국 국민이 납치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하고 국제 사회에서 얼마나 지원해주는지에 달렸음을 거듭 강조했다.